Ⅲ. 지방 통치체제
1. 지방 통치체제의 특징
조선조 역대 지방통치의 기본방식은 왕권의 강약, 집권체제의 강화와 이완, 재지사족과 향촌사회의 성장 추세 및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집권세력의 성향에 따라 상이하였다. 勳戚과 관직에 일차적인 세력기반을 두고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서울의 훈구세력들은 군현제와 경재소, 유향소 향촌 통치체제를 관권 주도형으로 운영하려 하였다. 이에 반해, 사회·경제적 기반을 일차로 향촌에 둔 사림은 재지사족 주도형으로 그것을 운영하려 하였다.
지방 통치체제의 근간인 군현제는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정비되어 마침내 15세기에 들어와서 획기적으로 개혁되었다. 고려의 다원적인 道制가 일원적인 8도체제로 개편되고 신분적·계층적인 군현 구획을 명실상부한 행정구역으로 개혁하는 과정에서 屬縣과 鄕·所·部曲·處·莊 등 任內의 정리, 소현의 병합, 군현 명칭의 개정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고려의 事審官制가 경재소와 유향소로 분화되어 발전해 나갔는가 하면, 임내의 소멸과 直材化 및 인구의 증가에 따른 자연촌의 성장과 함께 군현의 하부구획으로 새로운 면리제가 점차 정착되어 나갔다. 또한 종래의 按廉使와 監務를 2품 이상의 관찰사와 士類 출신의 현감으로 대치하는 등 감사와 수령의 직급을 올리고 外官久任法과 部民告訴禁止法의 실시를 통하여 왕권의 대행자인 외관의 권한을 강화하였으며, 종래 향읍의 실질적인 지배자 위치에 있던 향리를 점차 지방관서의 행정 사역인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중앙집권적 양반지배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조선 초기의 군현제 정비의 기본방향은 결국 위로는 고려시대 지방통치체제를 개혁하고 아래로는 조선 후기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가령 8도체제가 확립되었다 하더라도 전기에는 감사의 임기가 남쪽 6도와 북쪽 양계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또 양계는 「率眷兼尹」한 데 비해 6도 감사는 「單身到界」하여 1년 임기 동안에 관내의 군현을 늘 순력하였다. 한편 전기에는 임내가 전국적으로 85개(속현 72, 부곡 11, 향 1, 소 1)나 존속해 있어서 후기처럼 면리제가 전국에 일제히 실시되지 못하고 지방에 따라 직촌과 임내가 병존하였다. 또 향리의 권한도 종전에 비해 많이 감축되었다고 는 하지만, 후기와 비교해 볼 때 아직 그 지위가 현저하게 격하되지 않았으며, 재지사족의 분포도 일부 지방에 치우쳐 있었다. 또한 전기에는 경재소가 각기 해당 읍의 유향소를 거느리고 지방통치에 크게 작용하고 있었으나 이것도 임진왜란을 겪은 뒤 완전히 혁파되었다(1603).
조선 초기의 군현제 정비는 위로는 8도체제와 아래로는 면리제를 확립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지방통치는 군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지방행정은 수령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邑格과 수령의 직급은 여러 단계로 구분되었으나 행정 체계상으로는 모두 병렬적으로 직속상관인 감사의 관할 하에 있었다. 다만 수령이 겸대하는 군사직으로 말미암아 수령 간에 상하의 계통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조의 중앙집권적 지방 통치체제가 비교적 잘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은, 왕→감사→수령으로 이어지는 관치행정적 계통과 경재소→유향소→面里任으로 연결되는 사족 중심의 자치적인 향촌지배 체제 및 이들 중간에 개재한 京邸吏·營吏·邑吏의 향리계통, 이 3자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道政이나 邑政(군현통치)은 행정·사법·군사 등 전반을 취급하는 하나의 종합행정인데 여기에 감사와 수령이 단독 부임한다는 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물론 감사 밑에 都事를 비롯한 여러 屬僚가 있고 대읍에는 부관인 판관이 설치되기도 했지만, 실제는 감사 또는 수령이 도나 고을의 정사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또한 조선 초기 이래로 소현 병합책을 누누이 거론도 해보고 시도도 해 보았지만 끝내 태종조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렇게 된 배경은 대체로 국가적인 의도와 재지세력의 이해관계라는 두 가지 면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할해서 지배한다」는 원리 하에서 전국을 8도로 나눈 다음 각 도내를 다시 주·부·군·현으로 구획하고 군현 경계도 越境地와 犬牙相入地를 존속시킴으로써 군현끼리 서로 견제하고 경쟁 또는 감시하는 체제를 지속하려 했던 것이다. 양계지방을 제외한 남부 6도는 각 읍마다 土姓吏民이 존재하였고, 그들은 그 읍과 休戚을 같이 해 왔으므로 병합되거나 혁파된다는 것은, 곧 그 토착적 기반을 일조에 상실하고 타읍에 귀속되어야 했기 때문에 갖은 방법으로 군현병합을 방해하였다. 각 읍마다 경재소와 유향소를 구성한 토성사족과 유향품관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경저리·영리·읍리로 연결된 향리세력이 서울과 지방에 연결되어 있었으니 군현 병합은 바로 이러한 본관세력으로부터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군현 병합의 실패 요인 가운데는 당시 수취체제의 모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세·역역·공물·진상 등 주민에 지우는 부담이 전국적으로 균평하게 일체화하여 전결수와 토질의 비척, 물산 및 호구의 다과와 같은 객관적인 기준에 의하여 책정되지 못하고 주로 기존의 군현을 단위로 하여 배정되었기 때문에 군현에 따라 주민 부담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속현을 거느린 주읍이나 군현 병합의 결과 새로이 속현을 가지게 된 주읍은 그 속현을 착취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위로부터 배정받은 각종 부담을 속현에 과중하게 분배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읍의 몫까지 떠맡기는 것이 예사였다. 한편 양반관료사회에서 職窠가 너무 협소한 京官職에 비해 330여 읍에 설치된 수령직은 인사적체를 해소시키는데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며 동시에 有蔭子弟를 위한 진출로로 여겨지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 단행된 지방제도 정비책은 상술한 바와 같이 하나의 획기적인 개혁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은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즉 도제와 군현 구획의 개편, 연내의 직촌화, 군현 병합과 같은 시책을 실시하기도 하고 또 시도도 해보았지만 호구와 전결수를 기준한 합리적인 개편은 끝내 되지 못하였다. 또 임내의 직촌화에 따라 면리제는 정착되어 갔지만 국가 의지에 의해 구획된 행정촌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군현 병합의 한계, 경재소와 유향소의 존속, 임내와 직촌의 병렬, 월경지와 견아상입지의 광범한 존속 및 강력한 재지세력의 존재 등의 사실을 가지고, 그저 후대적인 관점에서 중앙집권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지방분권적인 성격을 강조하거나 단순히 지방통치의 미숙성만을 내세울 수는 없다. 모든 역사가 계기적으로 발전한다고 볼 때 그러한 체제가 조선 초기의 지방통치에서는 오히려 편리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182)
182) | 李樹健,≪朝鮮時代 地方行政史≫(民音社, 1989), 11∼3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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