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관직과 관계
관직은 관계를 토대로 하여 제수되었고, 관계는 관직 제수의 전제가 되었다. 따라서 동반직·서반직·잡직에 제수되기 위하여는 각각 문산계·무산계·잡직계를 가져야 하였고, 그가 가진 산계의 고하에 따라 그에 대응하는 관직에 제수되었다. 동시에 각자의 신분과 관련되어 양반은 정1품직까지 제한을 받지 않고 제수되었다. 그러나 중인인 기술관·서얼·토관·향리·녹사·서리는 원칙적으로 정3품 당하관직 이하에 제수되었고, 청요직에도 제수될 수 없었다. 천류는 잡직의 정6품직 이하에만 제수되었다.
관직의 제수에는 관품과 관계를 상응시키는 상당직(當品) 제수, 관직이 높고 관계가 낮은 守職 제수 및 관직이 낮고 관계가 높은 行職 제수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행직 제수는 제한이 없었지만 수직 제수는 7품은 2계를, 6품 이상은 3계를 각각 뛰어 넘어서 제수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다.178) 관직 제수의 실제를 보면 문종대까지는 상당직 제수가 대부분을 점하면서 부분적으로 행수직 제수가 행하여졌고, 행수직 제수도 1∼2계의 범위 내에서 행하여졌다. 그러나 단종대 이후에는 매우 잦아진 대대적인 공신책록, 軍功加資, 追恩加資 등 가자의 남발로 인한 관인의 고계화에 따라 행직 제수가 크게 확대되었다. 행직 제수는 성종대에 “당상관 100여 명이 8·9품의 군직에 행직 제수되었고, 당상관들이 遷轉의 기회를 넘겨다 보는 마음에서 녹이 없는 체아직까지 사양하지 않았다”179) 라고 하였음과 같이 비정상적인 제수가 성행하였다.180) 반면에 수직 제수는 그 수도 적고 제수규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관직을 제수할 때 개국 직후에는 정1품 이하의 모든 관인이 대간의 署經을 거쳐야 하였다. 이후 성종 원년(1470)까지 1∼3품이나 1∼4품은 국왕의 승인만으로 임명장을 내는 官敎에 의하나, 4∼9품 또는 5∼9품은 서경에 의하고, 1∼9품 모두 서경이나 관교에 의하였다가, 1∼4품은 관교, 5∼9품은 서경으로 고정되면서≪경국대전≫에 명문화되었다.181) 또 문산계·무산계·종친계·의빈계·잡직계를 보유한 자는 원칙적으로 문반·무반·종친직·의빈직·잡직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문반이 좌천되면 무반직에, 종친·의빈이문·무반직에, 무반이 문반직에 각각 제수되기도 하였는데, 이 때에는 그 산계도 제수되는 관직에 따른 산계로 전환되었다.
<韓忠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