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면리제의 정착
우리 나라에서 面里制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조선 초기였다. 面과 里의 용어는 벌써 고려시대부터≪高麗史≫와 선초≪실록≫에 산견되나, 면리제가 처음으로 법전에 구체화된 것은≪경국대전≫부터이다.
京外는 5戶를 1統, 5統을 1里로 하고, 몇 개의 里를 합쳐 1面을 만들고 통에는 統主, 리에는 里正, 면에는 勸農官을 각각 둔다(≪經國大典≫권 2, 戶典 戶籍).
그런데 이러한 법전 규정의 면리제가 실제 전국의 말단 행정구역에까지 보급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일을 요했던 것이다. 면리제가 정착되기 전의 여말 선초에는 주읍 관내에 직촌과 임내가 병렬해 있었던 것이며, 임내에는 다시 속현과 향·소·부곡 등 구획의 대소에 따라 속현 및 속현과 동일한 취급을 받던 향·소·부곡은 많은 리와 촌을 보유하고 그렇지 못한 향·소·부곡은 그 임내 자체가 하나의 리와 촌에 불과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直村에는 이른바 자연촌과 지역촌(연합촌)의 구별이 있고 다시 촌과 함께 리와 면이 혼용되고 있었다.
이른바 자연촌과 지역촌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존속되었는데, 동서남북의 방위명을 가진 촌은 지역촌의 성격을 띠어 면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고 고유명을 가진 촌은 리와 같이 자연촌도 있고 지역촌도 있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주·부·군·현이 각기 읍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면과 같이 몇 개의 방면으로 면을 나누고 이러한 면 밑에 리·촌·동의 자연촌이 부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面·坊·社·里·洞·村의 용례가 실제는 명확한 구분없이 서로 혼용되어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호칭되었던 것이다.
면리제의 정비과정도 일반적인 군현제의 발전 추세와 마찬가지로 조선 초기에는 향·소·부곡이 리·촌으로 개편되었다가 나중에 인구증가에 따른 자연 촌락의 성장으로 리·촌이 다시 면으로 승격해 갔음을 후기의 읍지 소재 坊面條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조선 초기에 향·소·부곡이 리 또는 촌으로 기재되었던 것이 17세기 이후에는 면의 명칭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조선 초기를 후기처럼 守令→面→里로 체계화된 면리제를 연상하기 쉬운데, 초기는 고려시대와 조선 후기와의 중간에 개재한 과도기적 성격을 띠어 상술한 바와 같이 면과 촌, 또는 리와 동·촌이 때로는 상하관계, 때로는 병렬적으로 존재하면서 그 명칭이 혼용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자연촌의 호수를 기준하여 행정촌으로 편성하였으나, 조선조에서는 자연촌을 그대로 행정촌으로 편성하였기 때문에 명칭은 같은 리·촌이라도 실제 호수나 면적에서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어떤 리는 10여 개의 자연촌을 연합한 후기의 면과 같은 규모를 갖춘 것도 있고 불과 20∼30호를 보유한 자연촌도 많았다. 조선 초기 군현의 하부 행정구획인 면리체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위와 같이 군현의 관내는 크게 읍치·직촌 및 임내로 구분되며, 직촌에는 다시 방위명을 가진 면이 있고 그 다음에 면과 같은 연합촌이 있으며 그 다음에 자연촌이 병렬해 있었다. 임내의 경우는 속현과≪신증동국여지승람≫속 현조 소재 부곡·향·소 및 영세한 일반의 향·소·부곡에 따라 면리체계가 각기 달랐다.
한편 면리제의 실시와 함께 종래의 향리 대신에 사족 또는 民庶 출신의 권농관 내지 監考, 里正(長)이 면리 단위의 행정업무를 담당하게 된 것은 조선 초기 지방행정의 체제정비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인 사실이다. 수령이 면리행정에서 향리를 제치고 이족이 아닌 권농관이나 이정에게 업무를 맡김으로써 이제까지 향리가 향읍을 농단하고 주민을 침어하던 폐단을 없애고 수령의 정령이 보다 충실하게 민간에 반영될 수 있었다. 재지사족 중심의 유향소가 면리행정과 연결되면서 향리의 직무는 그만큼 위축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면 조선 초기 임내의 정비에서 종래의 속현이나 향·소·부곡을 정리할 때 모두 직촌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그 중 상당수가 그냥 임내로 존치되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여기에는 당시 조선왕조로서는 한계가 있었고 군현개펀과 임내의 직촌화라는 양자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것은 힘이 벅찬 일이었다. 물론 종래의 임내 가운데 대부분은 선초에 이미 존속할 수 없을 정도로 소멸해 가는 과정에 있었으니 이를 직촌으로 개편하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직촌이 된 임내는, 첫째 임내로서의 요건을 갖출 수 없을 정도로 쇠잔해진 것, 둘째 주읍과 근접해 있어 수령이 직접 통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반대로 아직 그 때까지 임내로 존속하는 데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고 또 주읍과 멀리 떨어져 있는 임내는 수령이 직접 다스리기에는 불편한 반면, 오히려 기존의 주읍과 임내와의 행정체계를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 훨씬 편리했기 때문에 직촌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임내의 정리에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할 면리제를 임내 혁파와 동시에 실시하는 데는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였다. 이와 같이 임내 혁파와 동시에 면리제를 전국에 일률적으로 대치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종래 임내와 주읍과의 사이에 맺어졌던 행정체계를 그대로 당분간 유지하면서 서서히 면리제로 대치해 갔던 것이다.189)
189) | 李樹健,<直村考-朝鮮前期村落構造의 一斷面->(≪大丘史學≫15·16, 1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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