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향리 직제의 개혁
여말 선초에는 불교적인 향읍질서가 성리학적 향촌사회로 대체해 나감과 동시에 지방행정의 주체도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향촌 주도세력이 이족에서 재지사족으로 옮겨가는 추세에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과정에서 신분제의 재편성과 유교적인 이념에 입각한 지방제도가 정비되어 갔으며, 고려의 사심관제가 경재소와 유향소로 분화, 발전해 갔던 것이다. 조선 초기와 지방제도의 정비와 함께 對郡縣吏民策도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 초기 군현의 행정실무를 담당했던 향리의 성분은 지역에 따라 상이하였다. 경상·전라·충청·강원도 지방은 토성이족이 향리의 주체가 된 데 반해, 집권화 과정에서 볼 때 선진지역에 해당되던 개성·한양 주위의 경기·황해도 지방은 토성의 亡姓化에 따라 비토성이족이 많았고, 양계지방에는 본래 토성이 없었으니 남부지방에서 사민입거한 「入鎭姓」이나 이입해 온 「鄕戶」(향역을 담당하는 민호)들에 의하여 향역이 집행되었는가 하면, 제주도는 한때의 편법으로 原鄕吏 외에 양민 중에서 선발된 「典吏」에 의하여 향역이 수행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의≪실록≫에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향리가 원래 없다」는 기록이 자주 보이는데, 이는 토성향리가 없다는 것이지 “향역을 담당한 吏屬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이북지방에는 원래 토성이 없었으니, 이 지방에는 假吏가 있을 뿐 향리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평양 함흥 등과 같은 양계지방의 重鎭에는 향리 대신에 「土官」을 설치했다.
조선 초기의 군현이민 대책에는 상술한 바와 같이 鄕曲을 무단하고 군현을 지배하였던 고려적인 향리를, 왕권의 대행자인 수령의 하부행정체제 하에 두는 대향리 시책의 적극적 추진과 함께 이른바 토성품관·유향품관에 대한 시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한 시책에는 후술하는 경재소의 효율적인 운용과 유향소의 치폐가 첫째로 거론될 수 있다. 우리는≪세종실록지리지≫의 성씨조를 통하여 각 읍의 향리는 물론, 중외 관인의 본관과 출신지,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경재소·유향소의 조직과 경저리·영리·읍리들의 연결상 태를 파악할 수 있다.
군현 향리의 세계를 살펴보면 경재소와 유향소를 잇는 사족의 세계가 있듯 이 중앙정부와 도 및 군현으로 연결된 이족세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각 읍의 이족들은 그 출자상 향리(토성)와 가리(비토성)로 구분되며 유력한 이족들은 호장과 記官層을 장악하여 그것을 세습했을 뿐만 아니라, 혼인도 그들끼리 하였다. 유향소의 임원이 반드시 향안 입록자 중에서 선임되었듯이 군·현 향리의 중요한 직과는 반드시 「壇案」(향리안) 등재자 중에서 임용되었다.
조선왕조의 양반관료 체제 속에서 경중 각사와 군현 관아 사이에서 문서작성·전곡회계·공사전달 등의 행정실무를 담당했던 胥吏와 향리는 역사와 표면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관청과 관원 사이를 연결하면서 중앙정계와 지방통치의 밑바닥에서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실제 권력 구조면에서나 권력의 행사면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빈번한 정변과 사화, 거기에 수반된 관원들의 잦은 교체에도 행정상의 공백과 혼란이 야기되지 않고 왕조의 기본 운영체제가 유지된 것은 이들 중앙과 지방관청의 이속이 관아의 행정실무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중 각사의 서리는 「양반관료의 유모」라는 속어가 유행하였고, 교활했던 대구현의 향리 裵泄(세종조)은 역대 수령을 시봉하지 않고 솔거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며, 조선 초기의 강력한 왕권으로 군현을 병합하거나 구획을 개편코자 했을 때도 토성이민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끝내 실천에 옮기지 못한 사례도 있었다.
수령이 비록 「一邑之主」라 하더라도 치읍 경험과 행정실무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단신 부임하는 데서 결국 기존의 향리체계 위에 얹히는 것이며, 품관·향리의 협조 없이는 수령의 자리를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유력한 이족이 호장과 기관층을 세습하면서 1읍의 향리세계를 영도해 갔던 것이며 그들은 또한 上計吏·貢吏(進捧吏)·京邸吏·營吏 등의 조직을 통해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그들 중에는 경중 각사의 서리로도 진출하였기 때문에 중앙정계의 동정을 예민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또 경향 간을 연락하는 진봉리와 경저리는 경재소와 밀착되어 있는가 하면 또 그들 중에는 감사의 시중을 드는 영리로 차출되기도 했으므로, 군현의 이족들은 양반관료 못지않게 경중각사·경재소·경저리·영리·읍리를 잇는 거미줄과 같은 조직망을 형성하고 있었다.199)
조선 초기의 대향리 시책은 첫째 토호적인 향리로서 중앙집관화에 일차적인 방해가 되었던 元惡鄕吏를 철저히 색출, 응징하고 열읍 간의 향리 조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데서, 많은 향리가 토착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토호적 향리를 무력화시키는 데는 그들의 본관을 떠나게 하는 조치가 최상의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대대로 살고 있던 본관은 바로 그들 세력의 기반이요 근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착적인 향리의 기반은 여말 이래 북로 남왜로 인한 이동을 비롯하여 원악향리의 이속, 군현개편에 따른 이동 및 향호의 양계 입거 등으로 상실되어 갔다. 이는 단순한 이속이 아니라 번상과 쇠잔의 격차가 심한 열읍 간의 향리 수급을 조정하고 양계의 신설 주진에 부족한 향리를 충당해 주는 이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향리 입사로의 제한과 봉쇄, 읍리전의 혁파(1445) 및 향리의 복식 제한책도 향리의 직제개편과 함께 조선 초기에 단행한 획기적인 시책이었다.
향역의 대가로 국가가 향리에게 지급했던 고려의 外役田은 향리의 신분적 지위 저하와 함께 그 규모가 점차 감소되어 갔다. 이러한 외역전은 세종 27년(1445) 7월에 드디어 혁파되고 말았다. 이는 전제, 세제의 개정 내지 상정의 일환으로 종래의 鄕校位田, 각 관의 衙祿田·公須位田·院位田·渡津尺位田 등의 재조정과 함께 각읍 人吏位田을 일체 혁파한 것이다. 이와 아울러 그 때까지 존속했던 兵正·倉正·客舍正·國庫直 및 紙匠位田도 모두 폐지되었다.
14세기 말 왕조교체와 함께 향리의 신분적 지위는 계속 저락해가는 한편 免役·출사로도 고려시대에 비해 대폭 제한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국초에 이어 세종조에 와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고려시대의 ‘吏有子三에 許一子從仕’의 규정이 종사에서 면역으로 바뀌었던 것인데, 향리의 면역·종사로는 대체로 과거, 군공, 3丁1子로 잡과 합격 및 書吏去官者의 길이 있었다. 3정1자 면역법은 향리의 세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을 일정한 수속을 거쳐 면역시켜 주는 것이다. 일정한 수속이란 우선 향리의 「3정 1자」는 감사의 문병을 받아 잡과에 합격하거나 각사 吏典에 분속되어 仕滿 거관하는 것이다.
한편 세종 11년에는 각 읍의 향리 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호조에 명하여 최근 10년 이래의 각 읍 人吏案을 바치게 하고 향리수에 따라 기인의 선상수를 정하였는테, 이것은 후일≪경국대전≫에서 다시 조정되었다. 현직 향리가 여말의 군공으로 첨설직을 받아 사족화하듯이, 국초에도 종군·종사하여 면역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군공과 아울러 양계에 자원입거, 포도·효행, 수령에 대한 충성 등으로 면역의 특전을 받는 자도 있었다. 특히 입거향리의 면역 종사의 문제는 당시 북방 사민정책의 일환으로 국가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국가에서는 새로 개척한 양계의 연변지역에 가산이 부유하고 男丁이 많은 가호를 이민시켜 土兵을 확보함과 동시에 행정요원인 향호를 여러 가지 특혜를 주어 그 지방에 토착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는 국가에서 이 지방에 토착세력을 부식시킴으로써 북방을 영구적인 封彊으로 만들려는 국방정책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국가에서는 입거를 자원하는 향리에게는 면역 종사의 길을 열어주고 또 감사취재·토관제수 등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 후 입거향리 가운데 赴京 종사하는 자들이 많아지자 세종 28년(1446)부터는 입거 연월을 추산하여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에 비로소 상경 종사를 허락하고 京職을 받더라도 罷閑 후에는 모두 귀향케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향리의 직제와 복식은 국초에 이어 세종조에 와서 더욱 정비되어 마침내≪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고려시대의 호장층·기관(正)층·색리(史)층의 세 계층이 15세기 초에 와서는 호장층을 대폭 감축하는 한편, 군현의 지방 행정 실무를 분장하였던 6방층을 강화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중외 관직 체계와 업무분장이 吏·戶·禮·兵·刑·工으로 정비되자 향리 직제도 6방을 근간으로 이속이 편성되었다. 사실 종래의 호장층은 대개 토호적 존재로서 중앙집권화를 방해하는 위치에 있었고, 원악향리로 적발되는 향리는 주로 이들이었다. 복식은 전근대사회에 있어 신분을 변별하는 표징으로서 향리의 복식도 그 신분의 변천과 궤도를 같이 했다. ‘호장은 紫衫, 부호장에서 창정까지는 緋衫, 戶正에서 司獄副正까지는 綠衫, 兵·倉史 이하는 복색이 없다’는 고려시대의 향리 복식은 조정의 문무관과 비견할 만한 것이었으나 태조 6년(1397) 11월 예조에서 호장과 기관층에게 모두 녹삼을 입게 하고 호장에게만 木笏 지참을 허용하였다. 笠制와 장신구도 사족과 엄격한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즉 사족은 보통 갓(笠)을 쓰고 관인은 公帽 또는 紗帽를 썼는데, 태종 15년(1415) 향리 복식의 개정에서 호장·기관은 平頂巾을, 통인·장교·역리는 頭巾을 쓰게 하고 평시에는 흑색 竹坎頭를, 눈비가 올 때는 油紙帽를 쓰게 하였다. 동왕 16년 정월에는 호장·기관층을 제외한 향리를 각 사의 이전 및 성인과 구별하기 위하여 흑칠 방립을 쓰게 하였다.
세종 20년 4월에는 고려시대 호장층에 허용했던 犀帶·象笏·玉瓔·玉環·珊瑚纓 등의 장신구 착용을 엄금할 뿐만 아니라 기왕의 특사된 서대까지도 玳瑁黑革帶로 바꾸어 주었다. 그 후 24년 9월에는 상기 품목 외에 瑪瑙纓의 착용을 금지시켰다. 특히 향리들로 하여금 수령 앞에서 부복례를 행하게 하고 방립을 쓰게 한 조치는 향리의 신분적 지위를 격하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