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소현의 병합과 그 한계
조선 초기의 군현제 정비에서 또 하나 특기한 만한 사실은 主縣의 병합문제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감무의 증설과 속현 및 향·소·부곡의 정리작업은 여말이나 선초에 하나의 공통적인 현상이었지만, 주현의 병합문제는 새 왕조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소현의 병합은 태종조에 이르러 활발히 추진되었다. 태종 3년 6월에 서북면에 碧潼郡을 설치하고, 雲州와 靑山을 병합하여 雲山으로 개칭하고, 동 7년에는 貞海와 餘美 양현을, 茂松과 長沙 양현을, 이듬해 7일에는 義昌과 會原 양현을 병합하여 각각 海美·茂長·昌原으로 개칭하였다. 태종은 그 중반부터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을 위한 관제개혁, 수취체제의 정비, 奴婢中分法, 號牌法 등을 실시한 데 이어 그 13년 10월에는 도제와 군현제의 정비를 단행하였다. 그 이듬해 8월에는 군량확보와 지방재정을 절약하기 위하여 冗官을 정리하는 한편, 용구·처인 등 34현을 병합하였다. 즉 영길(함경)도를 제외한 7도 소재 34개 소현을 17현으로 병합하고 하나의 부곡과 향, 2개의 속현을 이속시켜 4현을 보강하였다.
태종 14년(1414) 12월에는 다시 경상도의 三岐·嘉樹 양현을 합쳐 三嘉縣으로, 황해도의 長淵과 連豊을 합쳐 長連으로, 경기도의 長湍과 臨津을 합쳐 臨湍으로 각각 개칭하였으며 전라도의 茂豊과 朱溪 양현을 합하여 茂朱縣으로 개칭하였다. 이렇게 소현을 병합 또는 개편하자마자 곧 여러 차례의 수정과 치폐가 반복되었다. 병합의 경우 심각한 문제는 병합당하는 현 가운데 어느 현이 주읍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대체로 병합되는 현 가운데 향리·관노비는 드세거나, 호구가 많고 면적이 넓거나 혹은 군사상 교통상 중요한 지점일 경우에는 주읍이 되고, 그렇지 못한 곳은 縣司가 폐쇄되고 향리·관노비는 신설된 주읍으로 옮겨져야 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즉 두 현이 병합하여 한 읍이 될 때 하나가 주현이 되면 다른 하나는 속현과 다름없는 처지가 되기도 하였다.
태종 16년 5월에는 제주도의 행정구획을 개편하여 종래의 17현을 제주 본 읍과 大靜·旌義 양현으로 통합 정비하고 그 나머지 14현은 모두 폐합하여 직촌으로 만들어 3읍에 각각 분속시켰다. 그런데 동왕 14년 병합된 군현은 속현과 월경지 등 특수한 구역의 병합을 제외하고는 서울의 경재소와 연결된 재지세력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동 18년 이전에 거의 환원되고 말았다.
세종 5년부터 수령구임법을 실시함에 따라 고을수의 과다로 인해 수령에 충당될 인재 확보가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워 군현 병합을 시도하였다. 세종대 전반기는 지속적으로 군현 병합이 시도되었으나 끝내 성과가 없었던 대신 그 후반기부터는 4군·6진 개척에 따른 「設鎭置守」와 「徙民入居」에 주력하여 양계 연변의 행정구획 정비에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왔다.195)
태종·세종의 유지를 계승한 세조는 원년부터 군현 병합에 관심을 갖고 의정부에 지시, 논의케 한 다음 세조 2년에는 군현 병합의 사목까지 작성, 8도 감사에 하달한 바 있다. 그러나 세조의 군현 병합책에 대하여 梁誠之는 반대 상소를 하면서 군현 병합에 앞서 전국의 지도와 지지를 작성하여 군현 개편의 필수 참고자료인 산천지세, 도로길이 및 호구·전결의 다소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96) 그 결과 세조대의 군현 병합도 겨우 수개 현을 합친 데 불과하였다.
이상과 같이 군현 병합은 태조 이래 세조대까지 누차 시도도 해보고 실천도 해보았으나 큰 진전없이 대체로 태종 13년 개편 때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세종실록지리지≫(1432)에서≪신증동국여지승람≫(1530)까지의 시간적 간격은 약 100년 내외가 되지만 전국 군현의 등급별 증감의 폭은 극히 좁다. 우선 전국적으로 보면 세종대의 336읍(主邑)이 성종 초에는 329읍으로 줄어든 것은 경기도의 臨江·臨津의 병합과 평안도의 4군 혁파에 연유한 것이며, 군현의 읍격 승강을 보면 부윤과 대도호부는 변동이 없고 목사는 3읍, 도호부는 7읍이 증가한 반면 군수는 7읍, 현령이 1읍, 현감은 7현이 감소된 것 외에는 큰 변동이 없다.
군현 병합의 국가적 목적은 시대에 따라 다소 양상을 달리 하기도 했으나대체로 조선 초기는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과 지방행정 체제의 정비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거론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왕조는 중국에 비하여 군현의 규모가 호구·전결수로 보아 영세하였다. 「官多則民弊」라는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선왕조는 국토의 면적에 비해 군현수가 확실히 과다하였다. 군현 병합의 동기는 전술한 바와 같이, 태종 14년에는 대륙정세의 긴급에 따른 군자 확보를 위하여, 세종 16년(1434)에는 수령 구임에 따른 인재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세조 2년(1456)에는 수취체제의 정비와 함께 전국 군현에 조세·공물·역역과 같은 주민부담을 균평하게 하기 위하여 각각 시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 외에도 衙祿田과 같은 지방재정을 절약하고 향리와 관노비의 부족을 해소하고 소현 주민의 부담을 경감시키며, 토착 향호들의 농간을 방지하려는 데도 병합의 목적을 두었다.
군현 병합은 세조가 말한 대로 향리들은 폐합 또는 移邑으로 인해 자기들의 토착세력 기반이 상실되니 싫어하는 것이며, 일반 주민들은 제반 부담이 경감되고 향리들의 침어가 줄어들 것이니 환영하기 마련이었다. 한편 병합 당하는 군현의 토성사족들은 鄕貫이 혁파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여 병합되거나 폐합되는 것을 적극 반대하였다. 그들도 토착향리와 마찬가지로 자기들이 이제까지 누리고 있던 토착세력 기반이나 한 읍을 농단하던 지위가 무너지고 타읍에 폐합되거나 대읍에 흡수됨으로써 무력한 상태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현 병합에서 종래의 주읍이 병합되면 그 곳의 향리는 합치는 고을에 흡수되고 완전한 적출이 되면 문제는 적을 것인데 수령만 없어지고 향리는 그대로 남기 때문에 폐단은 여전히 남게 된다. 그러니 두 현이 병합될 때 현치로 남는 곳은 주읍, 그렇지 못한 곳은 속현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두 현이 병합될 때 새 현치를 두 현의 중간에 설치하고 두 현이 혼연일체가 되도록 철저한 병합이 이루어진다면 후유증은 별로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병합 전의 대등한 관계가 병합 후에는 한쪽은 주읍, 다른 한쪽은 속현이란 주종관계가 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 주현이 될 수 있는 최소한 의 규모를 갖춘 속현은 주현으로 승격하고 직촌으로 정리할 수 있는 속현은 완전히 직촌화할 것을 요청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屬縣吏의 침학에서 현만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령을 파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는 세종 25년(1443) 사간원의 상소와 같이 임내를 완전히 직촌으로 정리해야만 任內吏의 농간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수령이 직접 다스리는 주읍은 향리의 농간이 적었으나 주읍과 멀리 떨어진 속현은 수령의 감시가 소홀하고 속현리를 통하여 수령의 정령이 전달되기 때문에 중간에서 속현리가 농간할 소지가 많았다. 세조 14년 대사간 芮承錫 등은 “수령과 속현리가 때로는 상호의존 관계를 맺고 있어 속현 주민만이 침어를 당하게 되니 그들을 일체 혁파해야 한다”197)고 주장하였다.
군현 병합이 실패한 요인 가운데 또 하나는 당시 수취체제의 모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세·공물·진상·역역 등 수취체제가 전국을 일체화하여 전결수와 토질의 비옥과 척박, 물산의 풍성과 쇠잔 및 호구수와 같은 객관적인 기준에 의하여 책정되지 못하고 주로 기존의 군현을 단위로 하여 배정되었기 때문에 군현에 따라 주민부담이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종래 속현을 거느린 한 주읍이나 군현 병합의 결과 새로 속현을 가지게 된 주읍은 그 속현을 착취대상으로 간주하여 위로부터 배정받은 각종 부담을 이들 속 현에 과중하게 분배할 뿐만 아니라 주읍의 몫까지 떠맡기는 것이 예사였다.
세조가 소현을 모두 병합하려고 했을 때 양성지가 반대한 것처럼 주·부 와 같은 대읍을 주축으로 한 소현의 존치가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는 후기처럼 군현의 하부 행정조직인 면리제가 확립되지 못한 관계로 수령이 혼자서 넓은 관내를 전담하기에는 벅찬 일이었기 때문이다. 교통과 수송수단이 미비한 당시로서는 중앙 정령의 전달과 보고, 使客접대, 조세·공부의 징수 조달하는 편의를 위해 주민과 관청과의 왕복거리가 7, 80리 이내 즉 일일생활권 안에 군현의 읍치가 있어야 한다는 데서 행정구획이 세분되었고 또 대·소읍이 뒤섞여 설치되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군현 병합책이 끝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된 배경은 대체로 국가적인 의도와 재지세력의 이해관계라는 두 가지 면에서 보아야 한다. 즉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할해서 지배」한다는 원리 하에서 전국을 8도로 나눈 다음 각 도내를 다시 주·부·군·현으로 구획하여 대·소읍을 뒤섞어 설치하고 군현 경계도 견아상입지와 월경지를 존치시킴으로써 군현끼리 서로 견제하고 감시하는 체제를 지속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양계지방을 제외한 남부 6도는 각 읍마다 장성한 재지세력이 존재하였고, 그들은 그 읍과 휴척을 같이 해 왔으므로 병합되거나 혁파된다는 것은 곧 그들의 토착적 기반을 상실하고 타읍에 귀속되어야 했기 때문에 갖은 방법으로 군현 병합을 방해했던 것이다. 토착세력이 영세한 속현 이하의 임내는 비교적 쉽게 정비될 수 있었지만 15세기 초까지 주읍으로 존속한 군 현은 각 읍마다 경재소와 유향소를 구성한 토성사족과 유향품관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경저리·영리·읍리 등으로 연결된 향리세력이 서울과 시골에 연결되어 있었으니 군현 병합은 바로 이러한 본관세력으로부터 완강한 저항을 받았던 것이다.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