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토지제도와 농업
1. 토지제도
1) 과전법체제의 확립
(1) 고려 말 사전개혁의 방향
고려 후기에는 개인 수조지로서의 사전이 전국적으로 팽창해 있었다. 또한 그 같은 사전을 일정 지역에 집중시켜 경영하는 유형으로서의 농장이라는 것도 널리 존속하고 있었다.0001) 그런데 이들 사전이나 농장은 국가의 제도적 운영에 필수 불가결한 지반으로 편성되어 있는 각종 명목의 토지를 겸병·탈점하여 국가체제의 유지를 매우 어렵게 하였다.
A. 신우 14년(1388) 7월 大司憲 趙浚 등이 상서하기를 ‘근년에 이르러 겸병이 더욱 심해져 간흉한 무리가 주군을 포괄하고 산천을 경계로 하여 그 모두를 祖業田이라 칭하면서 서로 빼앗으니, 1畝의 田主가 5, 6을 넘고 1년의 田租를 8, 9차례나 거두어 간다. 위로는 御分田으로부터 宗室·功臣田과 조정의 문무 양전, 그리고 외역전이라든가 律·驛·院·館田에까지 이르고, 무릇 다른 사람이 대대로 심어놓은 뽕나무와 집까지 모두 빼앗는다’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즉 이 시기에는 국가 각 기관의 수조지라든가 왕실·공신·양반전으로부터 군인전, 나아가서는 향리나 진·역리의 외역전 등 국가 말단 행정·교통기관에 복무하는 자들의 職役田에 이르기까지 모두 권세가가 겸병하여 자기의 사전으로 차지하였다. 당시 그 같은 사전이 전국의 전지 가운데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宗廟·學校·倉庫·寺社·祿轉·軍須田 및 國人 世業의 전민을 호강한 자들이 거의 모두 탈점”한 상태라고 하였으니0002) 아마도 전국적 현상으로 광범하게 확대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후기의 사전은 우선 조업전이라고도 칭해지면서 국가의 정당한 제도적 수속을 거치지 않고 그 자손에게 사사로이 相傳되는 토지였다. 위에 인용한 사료에서도 권세가는 그가 겸병한 대규모 사전에 대해서 “그 모두를 가리켜 조업전이라 칭하면서 서로 빼앗으니, 1畝의 전주가 5, 6을 넘고 1년의 田租를 8, 9차례나 거두어 간다”고 하였다. 趙浚과 함께 사전개혁을 발의한 趙仁沃, 李行의 상소에서도 “각기 그 先世로부터 私授한 전지를 祖業이라 일컬으면서 收食하는 것이 1,000결, 100결에 이른다”, “그 조부의 문권을 가지고서 國田을 100결, 1,000결씩 坐食하는 자가 있다”0003)고 하였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사전에서의 수조권을 실현할 수 있는 근거가 곧 조업전이라는 사실을 주장함으로써 확보될 수 있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조업전은 世業田이라고도 칭하는 것으로서 곧 조상 전래의 소유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0004) 조상 전래의 수조지로서의 사전이 어떠한 연유로 해서 조업전이라고도 칭해지고 있었는지는 아직 분명히 밝혀져 있지가 않다.0005) 그러나 그것은 국가와 민생에 다음과 같은 폐해를 자아내고 있었다.
우선 사전은 국가의 제도에 따라 정당한 절차를 거쳐 분급되거나 환수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개인의 사사로운 수수행위를 통하여 자손으로 상전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전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국가 운용의 물질적 지반을 잠식해 들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전 개혁론자들은 사전의 확대로 인한 국가사회의 폐단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전은 私門에는 이롭지만 국가에는 무익하고…사문에 이로운 것이므로 겸병이 일어나며 국가의 용도가 그 때문에 부족해진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창 원년 8월).
粢盛과 供上이 때로는 이어지지 않으며, 사대부로서 王事에 복무하는 자들이 資生 養廉할 길이 없고, 州·縣·津·驛의 국역에 이바지하는 자가 그 田宅을 잃고…國用·軍須·祿俸이 나올 곳이라고는 전혀 없이 되었으며, 국고에는 旬月을 지탱할 만한 축적이 없고 군사는 수개월의 식량도 없으며…군사로서 적과 싸우러 가는 자는 그 부모처자가 飢寒 流移하고 있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典法判書 趙仁沃 등 上疏).
뿐만 아니라 사전의 확대는 그 겸병·탈점에 따른 토지소송의 번잡함으로 인하여 국가 통치행정의 정상적 운영을 마비시키는 한편, 국가체제 유지의 바탕인 농민경영의 재생산과정 자체를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안으로는 판도사·전법사와 밖으로는 수령·안렴사가 그 본직을 폐한 채 날마다 田訟을 처리하는데, 추위나 더위를 무릅쓰고 땀을 씻고 붓을 녹여가며 文券을 조사하고 증거를 검토하며 전호에게 물어보고 古老에게 물어본다. 무릇 관련된 사람들이 감옥과 官庭에 가득 차서 농사를 폐하고 판결을 기다리는데, 여러 달의 문건이 산처럼 쌓여 있고 한 이랑의 쟁송이 수십년을 끌어가니 침식을 잊고 처리하여도 부족한 것은 사전이 쟁단으로 되어 소송이 번잡해진 까닭이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농민이 사전의 租를 바칠 적에는 남에게 빌려도 다 충당할 수가 없고 그 빌린 것은 처자를 팔아도 갚을 수가 없으며 부모가 기한에 떨어도 봉양할 수가 없다. 억울해 울부짖는 소리가 위로 하늘에 사무쳐서 和氣를 感傷케 하여 수재·한재를 불러 일으키니, 이로 말미암아 호구가 텅 비고 왜구가 깊이 쳐들어 와 시체가 천 리에 널려 있어도 막아낼 자가 없다(위와 같음).
즉 사전 전주들의 횡렴으로 인하여 이 시기 농민의 재생산활동이 무방비 상태로 유린되고 있었으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 지반의 공동화를 가져와 외적의 침략 앞에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초래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전의 횡포는 국가체제 존립의 두 가지 지반인 토지와 농민을 그 바탕에서부터 무너뜨려가고 있었으므로 결코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려 후기에는 토지와 농민에 대한 국가적인 정리작업을 기회 있을 때마다 시도하였다. 이른바 田民에 관한 여러 차례의 辨整·推刷·推考·整治 등의 사업이 곧 그것이었다.≪高麗史≫百官志 기사만을 보더라도 우선 人物推考都監, 火者據執田民推考都監 등의 설치가 여러 차레 있었다. 整治都監은 충목왕 3년(1347)에 설치되어 충정왕 원년(1349)까지 활동한 바 있었다. 田民辨整都監의 경우는 원종 10년(1269), 충렬왕 14년(1288)과 27년(1301), 공민왕 원년(1352), 우왕 7년(1381)과 14년(1388)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설치되었다.0006)
그러면 그러한 사업이 자주 반복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것은 실상 그 사업이 결코 일관성을 띠고 추진되지는 못하였으며, 동시에 辨整 자체가 결코 온전히 실현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같은 사전의 확대와 변정의 역사에도 일대 전기가 닥쳐오게 되었다. 우왕 14년(1388)의 위화도회군으로 이제 개혁파 사류가 결정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해 5월에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중심의 개혁파 사류는 6월에 우왕을 축출하고 나이 어린 창왕을 옹립하는 한편, 신망이 두터운 최영을 비롯한 여러 구신들을 제거하여 정권과 군권을 장악한 다음 곧바로 현안의 사전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들이 정권을 운용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국가재정의 조달, 휘하 군사의 생계문제를 포함한 軍須의 확보, 그리고 새로운 정권에 복무할 관리들의 생활보장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사전의 개혁은 가장 우선적으로 착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개혁파 사류가 창왕의 이름으로 처음 발표한 사전개혁에 관한 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B. 신우 14년 6월 창왕의 교서에 ‘①근래에 호강이 겸병하여 田法이 크게 무너졌으니 그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도평의사사와 사헌부 및 판도사 등은 논의하여 보고하라. ②料物庫 소속 360 莊·處田으로서 선대에 사원에다 시납한 것은 모두 환수하라. ③동북면·서북면에는 원래 사전이 없는데, 만약 사전이라 칭하면서 넘치게 가지고 있는 자가 있거든 도순문사가 통렬히 금단하여 다스릴 것이며 갖고 있는 文契는 모두 관에서 몰수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즉 B ①은 사전개혁에 관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라는 것인데, 이는 곧이어 이 해 7월부터 시작되는 대대적인 사전개혁의 발의로 드러나며 계속하여 사전개혁운동으로 전개되었다. ②는 供上用으로 설정된 왕실 직속의 수조지로서 선대 여러 왕들의 시납에 따라 사원의 사전으로 변질해 있는 것을 환수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전개혁의 본질은 곧 공전의 확보인데, 그것을 왕실 공전의 추쇄에서부터 우선적으로 착수하는 것은 지극히 명분있는 당연한 일이었다.「조종의 분전제도」라고 하는 구질서의 회복을 내세움으로써 현실의 사전개혁에서 야기될지도 모르는 혼란과 불안감을 진정시키는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③의 사항에 나타난 바 양계 사전의 공전으로의 확보문제도 매우 상징적 의미를 띤 것이었다고 해석된다. 그것은 우선 요동정벌이라는 군사행동을 일으킨 당해년에 현실적으로 북방에 대비할 군수의 확보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양계라고 하는 북방지역에서의 공전의 확보를 통하여 그것을 도모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조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더구나 원래 사전을 설정한 적이 없는 이 지역의 사전은 불법적 존재임이 명백하므로 그 공전으로의 추쇄는 상대적으로 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0007) 그리고 그 추쇄는 여타 지역에서의 사전개혁을 위한 하나의 선행 사례로서의 효과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위의 교서 가운데 ②항과 ③항의 내용은 발표와 동시에 곧 착수되고 실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명분이 뚜렷하고 상대적으로 용이하며 또한 상징적 효과까지를 기대할 수 있는 개혁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①항의 요청에 부응해서는 같은 해 7월에 대사헌 조준, 간관 이행, 판도판서 황순상, 그리고 전법판서 조인옥 등이 사전개혁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역설하는 많은 상소문을 제시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당시 만연하고 있는 모든 사회적 화란의 근본 원인이 곧 사전의 무제한적인 팽창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하여 그 개혁을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다. 이제 고려 말의 사전개혁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0001) | 고려 후기 사전과 농장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분분하므로, 여기서는 그 자세한 소개를 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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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 | ≪高麗史≫권 132, 列傳 45, 辛旽. |
0003)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
0004) | 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고려대출판부, 1980), 186쪽. 金泰永,≪朝鮮前期 土地制度史 硏究≫(지식산업사, 1983), 35쪽. 李景植,≪朝鮮前期 土地制度 硏究≫(일조각, 1986), 8∼10쪽. |
0005) | 이에 대하여 이 시기에 收租權이 강화되어 家産化함에 따라 ‘본래 所有地를 가리키는 語義인 祖業田으로 지칭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李景植, 위의 책, 15쪽). |
0006) | ≪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司都監各色. |
0007) | 실상 북방의 방어에 대비하는 군량의 확보와 불법적 사전의 추쇄문제는 이전부터 주목되어 온 것이었다(≪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