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Ⅰ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사회로의 전환은 단순한 왕조 교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친 커다란 진전을 가져왔다. 고려 말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北虜·南倭의 침입이 계속되는 가운데 새 사회를 지향하는 사대부정권이 수립되었다. 특히 그들은 전통적인 불교와 도교 및 淫祀 등 잡다한 토속신앙과 관습을 유교적인 의례로 개혁하는 한편 양반 중심의 엄격한 신분제도와, 명분과 인륜을 강조하는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즉 유·불 교체를 비롯하여 신분계층과 향촌구조, 가족제도와 혼·상·제례 등의 변화가 수반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생의 안정과 권농정책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의식주 생활이 크게 향상되고 인구와 농지 또한 획기적으로 증가되었다.
사회 신분구조에 있어서는 士族과 吏族의 분화에 따른 양반과 중인의 구분, 처첩 분간에 따른 적서의 차대문제와 함께 친족·가족·상속제도에도 변화가 뒤따르게 되었다. 또한 지방제도의 정비에 따라 향촌 지배세력이 종래의 향리에서 재지사족으로 교체되어 갔고, 속현 및 향·소·부곡의 直村化와 자연촌의 성장에 따라 面里制가 정착되었다.
따라서 다음에는 이러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를 보다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중요 항목들인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진휼·의료제도와 그 기구 등에 대하여 각 항목 집필자들의 논지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그 개요를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Ⅱ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인적 자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호적제도를 정비하고 정기적인 인구조사가 실시되어야 한다. 조선왕조는 고려 말의 전제개혁에 이어 국초부터 奴婢辨正事業과 함께 호구 파악에 정력을 쏟았다. 호구시책 가운데 호적법의 제정과 호구 成籍의 勵行 및 이의 실시를 돕는 호패법·인보법의 실시와 노비변정사업, 군액확보책, 流移民 방지책 등은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조선 초기 호구의 파악은 국정 운영상 매우 중대한 과제였다. 이는 전 인구수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역의 부담자를 알아내려는 목적이 앞섰으므로 항상 丁의 조사에 중점이 두어졌다. 호구의 파악은 3년마다 하는 호적의 정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호적에 기재되는 사항은 주소·본인의 직역·성명·연령·四祖·처의 성씨와 연령 및 4조·솔거자녀의 성명과 연령, 그리고 노비 및 雇工의 성명과 연령 등이었다.
법제적인 호의 등급은 그 호의 丁數·가산 또는 가옥 間架數의 다과에 따라 대·중·소의 3등급으로 나누는 것이 고려 말 이래의 통례였다. 고려 말의 計丁法에 따라 정해진 3등호제는 국초의 計丁·計田 절충법을 거쳐 계전법으로 바뀌면서 호의 등급도 大·中·小·殘·殘殘의 5등호제가 되었다. 한편 자연호의 경우는 신분과 빈부의 차이에 따라 수십 명에 이르는 대가족이 있는가 하면 불과 서너 명의 소가족도 있었는데, 일반 서민들의 경우는 호구수가 평균 4∼5명인 소가족이었다. 호적 정리와 함께 五家作統法이라는 切隣의 공동책임제와 호패라는 신분증명의 패용을 아울러 실시하게 한 것도 호구의 파악을 위한 제도였다. 국초의 호구 파악 노력은 마침내 세조 7년(1461)에 이르러 종전과는 다른 차원의 전국적인 호수조사가 실시되어 호 70만, 구 400만이라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이를 근거로 세종조에서 성종조에 이르는 기간의 전국의 실제 호구수, 즉 자연호는 대략 100만에서 150만 내외이고 인구수는 600만에서 700만 내외가 되며, 국역을 지는 남정수는 100만 내외가 되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초기 인구의 지역적 이동은 크게 흉황·전란으로 인한 유이민과 국가정책에 의한 북방이민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말 이래 왜구의 침입으로 삼남의 연해지방이 많은 피해를 입어 인구의 유출이 많았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계와 중부 내륙지방은 인구의 유입으로 충실한 편이었다. 그러나 세종조부터 왜구가 종식되고 정치·사회적인 안정과 함께 주민 안집책과 권농책 등으로 삼남지방에서 인구의 유입이 많은 대신, 강원도와 서북지방은 주민의 유망으로 점차 피폐해 갔다. 이에 조선 개국과 더불어 추진된 북방개척과 徒民入居 정책이 세종·세조·성종조에 걸쳐 활발히 추진되었다. 이러한 전국적인 인구이동 외에도 수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됨에 따라 수도권의 인구이동이 있었는가 하면, 중앙에서는 집권세력의 교체에 따른 신흥세력의 上京從仕와 실각세력의 낙향이 수반되었으며, 지방에서는 사족과 이족의 분화에 따라 종래의 읍치지역에서 향촌지역으로 인구가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인구이동의 결과 국초에는 반대로 삼남지방은 유이민의 유입과 활발한 개간으로 인해 전결수가 증가하여 여말에 100만 결 미만이었던 것이 세종조에는 160여만 결로 격증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신분제도는 고려 말·조선 초에 걸쳐 이루어진 사회·경제적 변화와 성리학적 신분관념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새 왕조의 개국과 함께 직면한 신분 재편성의 문제는 지배신분의 이원화와 양인신분의 확대로 해결의 방향을 잡게 되었다. 즉 지배층인 양반의 배타적·신분적 우위의 확보, 중인신분의 창출과 고정화, 국역을 부담할 양인층의 확대 및 노비신분의 확정을 시급히 시행하여야 했다.
조선시대의 사회신분은 학자에 따라 달리 분류될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법제적인 구분과 사회 통념상의 구분이 있다. 먼저 법제적으로는 크게 良·賤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양인은 과거 응시자격과 관료로의 진출이 허용된 자유민으로서 조세·국역 등의 의무를 지녔으며, 천인은 부자유민으로서 개인이나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賤役을 담당하였다. 양인은 직업·가문·거주지 등에 따라 양반·중인·상민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사회 통념상으로는 士族이란 지배계급이 고려시대부터 피지배층인 일반 양인(상민)과는 구분되어 있었고, 그 사족은 조선 초기에는 양반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대체로 15세기에는 양반(사족)·상민·천인의 세 계층으로, 16세기 이후에는 중인층의 형성으로 양반·중인·상민·천인의 네 계층으로 대별된다. 그런데 조선시대 신분사 연구에 있어 많은 의견이 대립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법적 제도에는 양천의 규정만 보이는 데 비해 실제적으로는 良身分에서 양반·중인·양인이 별도로 파생되어 나간 적지않은 사례를 당시의 사료나 사회관습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15세기는 사회의 신분층이 크게 개편되어 간 시기로, 양인층의 확대와 함께 지배층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었다. 양인층의 확대책으로는 노비의 변정, 승려의 환속, 身良役賤層의 설정, 新白丁의 양인화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집권사대부들은 향리·서리·기관술·서얼 등이 관료로 진출하는 길을 크게 제약하는데, 그 가운데 향리의 과거 응시자격의 제한, 원악향리의 처벌, 군현 개편에 따른 향리의 대폭적인 이동, 그리고 限品敍用制 등을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전근대사회에 있어 신분관계는 그 시대의 모든 제도·기구를 운영하는 하나의 기본적인 표준이 되었던 것이니, 즉 신분관계의 여하에 따라 官途에 나아가는 데도 한도가 있고, 납세와 군역의 의무에도 경중의 차가 있으며 형벌과 의례, 의식주와 혼인, 그리고 기타 일상생활에 있어서 그 기준을 달리했던 것이다.
고려 후기 이래 지방 향리자제들의 계속적인 관인화로 인해 지배층이 비대해졌기 때문에, 집권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이들 지배층을 축소,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때까지 실직이든 산직이든 가리지 않고 문무양반의 관직을 받은 바 있는 자신만을 사족(양반) 신분으로 인정하였다. 반면에 현직 향리층을 비롯하여 중앙관청의 서리와 기술관·군교·역리들은 하급 지배신분(중인)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양반들은 천인의 피가 섞였거나 첩에서 난 소생들을 서얼로서 과감히 자기 도태를 시켰다. 이렇게 형성된 중인층은 양반과는 현저하게 다른 신분적 지위를 감수해야 하였고, 그들의 임무는 성리학적 관념에 의하여 비하되고 권력과는 거리가 있는 실무행정·기술·업무보조 등에 국한되었다. 국가정책의 결정과 경제적 부 및 사회적 위세 등은 양반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며 의무가 되었다.
조선시대 신분의 완성시기와 종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먼저 신분의 완성시기에 관한 견해로는 15세기설·16세기설·17세기설이 있고, 그 종류에 대해서는 4종·3종·2종설 등이 있다. 이렇게 상이한 학설들이 정리되기 위해서는 신분의 개념과 각 신분에 대한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연구가 보다 더 축적되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종래의 통설인 4분설에 의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양반은 원래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부르는 명칭이었는데, 뒤에 지배계층인 사족을 의미하는 말로 변하였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지주가 대부분이었으며, 과거·음서·군공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급관직을 독점하였다. 또 양반은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그들의 특권을 보장받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양반은 이른바 士·農·工·商 가운데 士族에 해당되는 최상급의 사회신분으로서,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이었다. 또 유학을 업으로 하고 아무 제한없이 관료로 승진될 수 있는 신분으로서, 실제로 중요한 관직과 제반 특권은 모두 이들이 독점하였으며 名敎와 禮法을 준수하는 사회의 지도적 계급으로서의 정신적 의무만을 지녔던 것이다. 그들은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관료 내지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던 신분이었다. 전통사회의 신분은 법적 제도와 사회적 통념으로 결정되므로 양반의 자격 기준도 그 점에서 먼저 찾아야 하는데, 조선 초기에는 사회적 통념보다는 국가권력이 더 크게 작용하였다. 사실 조선왕조는 양반의 계급적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세워진 국가로 각종 법률과 제도로써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규정하였다.
중인은 기술관 및 향리·서리·토관·군교·역리 등 경·외의 아전직과 양반에서 격하된 서얼 등을 일컫는다. 중인에는 양반과 상민 사이의 중간 신분계층이라는 넓은 의미의 중인과, 기술관만을 지칭하는 좁은 의미의 중인이 있었다. 이 가운데 넓은 의미의 중인은 15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 하나의 독립된 신분층을 이루었다.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있는 중간신분으로서의 중·외 관청의 서리와 향리 및 기술관은 직역을 세습하고 신분내에서 혼인하였으며 관청에 근접한 곳에서 거주하였다. 그들의 성향은 기회주의적이고 이해타산적이나 모나지 않고 세련된 처세 등의 측면에서 서로 유사한 점을 많이 공유하며 양반층에서 도태된 서얼층과 함께 중인층을 형성하였다. 군교는 중앙에서 궁중의 사역을 맡은 掖隷와 각 군영 소속이 있었고 지방에는 군관이라는 직역이 있었다. 그들은 향리와 함께「吏校」라고 합칭되기도 하지만, 향리보다 그 지체가 좀 낮은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서얼은 중인과 같은 신분적 처우를 받았으므로「中庶」라고 합칭되었다. 그들은 문과에 응시하지 못하여 동반직 등용이 금지되었고 간혹 서반직에 등용되었으나 한품서용의 규제를 받았다.
이러한 중인층은 양반지배 체제 하에서 양반들로부터 멸시와 하대를 받았으나 대개 전문적인 기술이나 행정의 실무를 세습적으로 담당하였으므로 실속이 있었고 나름대로 행세할 수 있었다. 예컨대 역관이 사신을 수행하여 무역의 이득을 본다든지, 향리가 토착적 세력으로 수령을 조정하여 세도를 부린다든지 하는 따위이다. 한편 중인층은 시대적·사회적 변화에 따라 신분 상승의 기회가 왔을 때는 그 기회를 잘 포착하였다.
상민은 평민·양인이라고도 부르며,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공장·상인을 말한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출세에 법적 제한을 받지 않았지만,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관료로서의 진출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또 이들은 조세·역·공납 등의 무거운 의무를 지고 있었다. 공장은 관영이나 민영의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상인에는 시전상인과 행상인 보부상 등이 있었는데, 초기에는 국가의 통제 아래 상거래에 종사하였다. 그런데 조선사회에서는 務本·抑商 정책의 영향으로 농민은 공장이나 상인보다 우대되었다.
상민은 보통 농·공·상업에 종사하는 생산계급으로서 납세·공부·군역·요역 등을 주로 담당하는 계층이다. 특히 병역은 양인을 주체로 하며 실제 입번하는 군정과 그 비용을 지변하는 奉足(保)과의 연대로써 단위를 이룬다. 당시에는 피지배층 가운데 양인·천인의 신분상 구별이 있어 천인은 천역을, 양인은 양역을 담당하되, 양인으로서 천역을 담당하는 수도 있어 이것이 신량역천이라 하였다. 초기에 이들은 干 또는 尺으로 불리웠고 뒤에는 皀隷·羅將·日守·漕卒·水軍·烽軍·驛保 등의「七般賤役」이라 하여 신량역천 가운데서도 가장 고역으로 여겼다. 상민은 법제적으로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으며, 의복·가옥·일상거동 등에서 관직이 없는 양반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경제적·사회적 여건으로 인하여 실제 그들의 관계 진출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천인에는 노비와 함께 白丁·廣大·社堂·巫覡·娼妓·樂工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이들은 모두가 천인은 아니었으며 사회적으로 천시되었을 뿐이다. 즉 노비와 그 노비에서 파생된 창기·의녀·악공 등은 명실상부한 천인이었으나 백정·광대·사당·무격은 원래 천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의 직업이 사회적으로 천시되면서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까지 천시되어 조선 중기 이후에는 천인화된 것으로 보인다. 천인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노비였다. 노비에는 국가에 속해 있는 공노비와 개인에게 속해있는 사노비가 있었다. 이러한 공·사노비는 또한 立役奴婢와 納貢奴婢로 구분되기도 한다. 전자는 관부의 노역이나 집주인의 잡역에 종사해야 하며, 후자는 관부나 주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생활을 영위하면서 일정한 身貢을 바칠 의무가 있었다. 이들은 각각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불리기도 하였다. 특히 사노비는 주인에 의하여 세전됨으로써 재물처럼 취급되어 매매·상속·증여되기도 하였다. 부모 중 어느 한쪽만이 노비인 경우에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노비가 양인과 결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 양반들의 노비 증식책에 따라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양반사회는 노비제도를 기반으로 운영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분의 귀천과 역의 귀천이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국가기관이나 사가에 있어서나 노비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다. 국가기관의 온갖 천역에 公賤이 동원되듯이, 私賤은 주인 내외의 신분과 같은 존재로서 온갖 사환과 잡역에 종사하였고 외거노비는 주인의 전지를 경작하거나 일정한 신공을 바쳤다. 자식 없는 노비의 재산은 그 주인에게 귀속되며 노비가 개간한 토지는 그 주인의 소유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노비제도는 사회·경제적 조직에 있어서 실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계급적 질서를 유지하고 禮俗과 風敎를 진작시키는 데도 필수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의 신분은 아주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양반이 반역죄를 저질러 노비가 되거나, 몰락하여 중인이나 상민이 되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중인과 상민이나 노비가 과거나 군공 등을 통하여 양반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분간의 이동이 그리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는 신분제가 재편성되는 과정에 있었으므로 중기 이후보다는 신분이동이 어느 정도 개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Ⅲ
조선 초기는 고려적인 불교의식과 토속적인 음사 및 비종법적 가족제도가≪朱子家禮≫와≪小學≫교육을 기반으로 하여 점차 성리학적 유교사회로 바뀌어 갔는데, 이러한 변화는 17세기를 분기점으로 후기사회로 넘어가는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즉 夫妻兩邊的 방계가족의 형태, 동성결혼과 異姓收(侍)養, 男歸女家婚과 자녀균분 상속제, 부처 또는 부자의 異財, 가계상속에 있어서의「兄亡弟及」, 자식이 없는 경우 불입양 및 자녀 윤회봉사와 같은 전통적인 유제를 이어받은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주자학적 禮制와 종법적 가족제도에 입각하여 종래의 유제를 부계친족 중심의 가부장적 가족제도, 동성불혼과 이성불양, 親迎禮와 장자봉사제, 자녀 차등상속제와 같은 가족제도로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상·제례와 장법도 대체로 15세기 전반까지는 전통적인 불교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고 소수의 사대부 가정에 한해≪주자가례≫가 수용되다가 성종조 이후에 가서 점차 유교적인 상례와 제사 절차에 따르게 되었다. 특히 남귀여가혼·자녀 균분상속제·자녀 윤회봉사를 특징으로 하는 조선 초기의 가족 및 상속제도는 그것이 서로 인과관계를 가지면서 성씨, 본관 의식과 족보 편찬에도 영향을 미쳤다. 남귀여가혼은 결과적으로 딸(사위)과 그 소생(외손)을 아들 또는 친손과 동일시하면서 부처·부모·자녀·내외손을 각기 대등한 위치에서 간주하려는 쌍계적〔兩側的〕친족체계를 낳게 하였다. 그러한 혼인풍속과 가족제도는 다시 자녀 균분상속제를 낳게 하였으며, 그 균분제는 다시 부모의 제사를 균분받은 자녀들로 하여금 돌아가면서 봉사하는 관행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딸이 있으면 아들이 없다 하더라도 입양하지 않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다시 자녀와 그 내·외손들을 한 마을에 모여 살게 하는 居住相을 낳게 하였다. 한편 각자의 혈통과 재산은 부모 양쪽을 비롯한 내·외 조상으로부터 이어받게 되고 그 양변의 혈통과 재산의 유래를 소급, 추적하는 데서 世系圖·八高祖圖·族圖 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양반사회에 있어서 혈통의 유래와 승음·응시·출사 및 재산의 傳係와는 서로 불과분의 관계에 있었으며, 당시 성과 본관에 대한 의식과 그 姓貫 자료인 족보의 편찬체제와도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유교사회의 진전에 따라 종법적 가족·친족제도의 수용과 함께 譜學의 숭상과 족보 편찬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내외 친척과 종족 내부의 의례를 규제하는 것이 예학이라면, 보학은 종족의 종적인 내력과 횡적인 族派관계를 확립시켜 주는 기능을 하였다. 따라서 성과 본관, 혈통과 신분을 증빙하는 자료는 양반사회가 발달하면 할수록 관심이 고조되어 족보를 편찬하게 되었다. 이러한 족보는 그 체제상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15세기 전반 이전의 족보와 최초로 편간된≪安東權氏成化譜≫(1476)를 비롯한 조선 전기 족보 및 17세기 이후의 후기 족보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족보의 시기별 구분은 친족·가족 및 상속제도의 변화와도 대체로 흐름을 같이 하였다. 자녀의 기재를 출생순으로 한다든지, 父→子系와 父→女(사위)系를 동일한 비중으로 등재하며, 자식이 없는 경우에도 불입양·적서불분·생졸 연월일과 妻系不錄 등을 특징으로 한 전기의 족보는 17세기부터 가족·상속제도의 변화와 함께 서서히 변모해 갔다. 그것이 바로 부계친족 위주로 하되「詳內略外」와「先男後女」의 원칙을 지키며 또한 등재인의 생몰 연월일·관직·처계·묘소가 비로소 구체적으로 기재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당시 심화된 성리학적 유교윤리의 반영이었다.
조선 초기의 의식주 생활은 유교적인 합리주의와 사대부의 검약정신에 영향을 받아 보다 실용적인 방향으로 향상되어 갔다. 목면 재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종래의 마포·저포와 함께 국민 衣料의 주종으로 자리잡게 되고, 중국으로부터 각종 예복과 견직물이 유입되면서 옷감도 다양해져서 의생활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한편 고려 말 이래 새 선진농법의 적용으로 새로운 품종이 개량되고 시비법 및 재배법이 개발됨으로써 주곡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곡류·채소류·과일류가 생산되고 풍부한 어패류 등으로 식품이 다양해졌다. 궁중의 연회를 비롯하여 사대부의 봉제사·접빈객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음식과 요리가 개발되었다. 또한 온돌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공·사의 건물은 춥고 더운 계절에 맞추어 따뜻한 방과 서늘한 마루를 갖춤으로써 보다 쾌적한 주거환경을 마련할 수 있었다. 특히 세종 때부터 화재 예방책으로 초가대신 기와를 권장하자, 중외 관아·누정·창고 및 사대부·토호들의 가옥이 기와집으로 바뀌어 갔다.
조선 초기의 복식문화는 고려의 유제를 따르면서도 한편으로 자주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조선왕조는 개국 초부터 엄격한 신분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이는 복식구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왕실의 복식은 왕과 왕비·세자·세자빈·후궁·왕자·왕녀(배우자) 등의 복식이 포함되는데, 왕의 대례복·조복·상복을 비롯한 각종 예복과 상복이 있었다. 백관의 복식 가운데 관복류는 조복·제복·공복·상복으로 대별되며, 편복류는 團領·帖裏와 長衣·直領 등이 있었다. 일반 복식으로 남복은 단령·첩리·직령·액주름·장의·과두·한삼·겹고·단고·말 등이 있었으며, 여복은 노의·장삼·오·군·말군·입모가 복식의 기본구조다.
조선시대는 식생활 문화의 과학성이 높아지고 그 문화 규범이 정비되는 시기였다. 조선 초기의 주요 식품 가운데 곡류로서 벼·수수·조·피·보리·밀·콩·깨·완두·메밀 등이, 채소에는 무·가지·오이·배추·마늘·파·생강·토란 등이 있었다. 과일로는 밤·대추·감·배·복숭아·자두·귤·참외·호도·포도 등이 있었고, 이외에도 어패류와 육류 및 기타 식품이 있었다. 조선 초기의 주요 음식으로는 국수·만두·떡·한과·생선요리·수조육류요리·채소요리·발효식품·구황식품 등이 있었다.
조선 초기의 주생활은 전시대와 마찬가지로 산골짜기나 산기슭에 자리잡아 개울과 넓은 들이 내려다 보이는 곳을 더욱 선호하였다. 이 시기 지방의 보편적인 집은 농사 짓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사는 소박한 것이었다.안채와 헛간채, 측간 등을 갖추고 있었으며, 유교적인 관습에 유의하는 이들은 대문간채·중문간채 등과 사랑채도 구비하려고 애를 썼다. 산골짜기의 집은 대개 목재의 귀틀집이었다. 그것은 편이의 방안이기도 하였지만 눈이 지붕 위에 쌓여도 그 하중을 지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농가의 지붕은 대개 초가이며, 안채와 헛간·잿간·측간을 설치하였으며, 곳간이나 뒤주·외양간·돼지우리·닭장·마굿간·수렛간·일간 등이 필요에 따라 추가되었다. 도시의 집은 15세기 중엽 이래 기와집이 늘어났으며 사회의 안정과 경제능력의 향상에 힘입어 차츰 집의 구조도 바뀌어 갔다.
Ⅳ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유교적인 민본주의와 농본정책을 표방하여 여러 가지 교화사업과 농민생활의 안정책을 실시하였다. 양반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회신분 질서의 유지와 농민의 생활안정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반 지주들의 토지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이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농번기에는 농민들이 잡역에 동원되지 못하게 하고 각종재해와 질병에 걸렸을 때는 조세와 요역을 감면해 주는 등 여러 가지 진휼과 의료·구제시책을 실시하였다.
재해에는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이 있는데, 수재·한재·풍재·충재·화재·질역 등 자연적인 재해는 사람의 능력으로 막기가 어려웠다. 이로 말미암아 사망자·이재민·기민·유망자가 대량으로 발생할 경우 조정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여 진휼하였다. 그 일반대책으로는 賑貸·賑恤·施食·救療·埋葬 등의 연례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그리고 특별대책으로 양곡절약·진곡보충·노역중단·구황식물의 비축 등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대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기구로는 구황청(賑恤廳으로 개칭)·상평창·의창·사창·혜민서·활인서·진제장 등이 설치·운영되었다.
조선 초기의 의료제도는 고려시대의 것을 대폭 확충하여, 3의사는 물론 제생원과 동서활인원의 기능을 정비·강화하고 의정부·6조·종친부·충훈부·도총부 등 각 사에도 의원을 배치하였으며, 경성 5부와 성균관에도 月令醫를 파견하였다. 또 전옥서에는 獄醫를, 삼군에는 軍醫를, 수군영에는 海道醫員을 각각 배정하였고, 각 계수관마다 의원을 설치하여 지방민의 치료를 담당하게 하였다. 의학교육의 강화, 의녀제도의 창설, 향약의 개발과 보급, 의서의 편찬 및 전문의의 양성 등의 의료시책을 시행하였고, 의료기구로 중앙에는 내의원·전의감·혜민국(이상 3의사)·제생원·활인원을 두고 지방의 의원·의학원·의국 등과 함께 국민의 질병 치료를 담당하게 하였다.
<李樹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