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1. 인구동향
인적·물적 자원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는 집권국가로서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전제조건의 하나였다. 따라서 고려 말 이래 정치기강의 해이와 사회 경제적 혼란에 편승하여 늘어만 가는 私田과 줄어가는 公民을 국가의 직접적인 통치 하에 두기 위하여 조선 건국 초의 역대 군주들은 田·民제도의 재정비에 온갖 정력을 다 쏟았다. 이와 같은 노력은 田制·稅制·兵制의 개혁과 표리관계를 갖고 있으며 또 토지와 함께 각종 力役과 貢賦 부과의 기준이 되는 戶口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이미 고려 말에 단행한 전제개혁은 개국 초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인적 자원의 확보책인 인구문제는 조선 초기의 역대 군주에서 부과된 중요한 과제였다. 인구문제는 국가의 물질적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서 이것은 국가의 호구파악 능력과 관련하여 그 경제력과 통치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인구문제와 관련한 호구시책 가운데 호적관계법의 제정과 戶口成籍의 勵行, 號牌法·隣保法의 실시, 노비변정사업, 군액확보책, 流移民 방지책 등은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호적의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그것은 단지 국내의 전 인구수를 알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군역 등 각종 역역의 부담자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인구의 조사보다도「男丁」의 조사에 항상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戶口」의 이름으로 전국적인 규모의 보고가 있었던 태종 4년과 6년도 및≪世宗實錄地理志≫소재의 호구통계는 모두 그러한 목적에서 작성되었던 것이다.
호구 내지 호구변동에 관한 문제는 사회경제사 연구의 기본과제의 하나이기도 하였지만, 그 첫째 조건은 정확하고도 구체적인 호구통계 자료에 바탕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초기의 것은 후기처럼 정기적으로 조사 成籍한 호구통계나 구체적인 호구장적 같은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인구 구성이나 성장률 측정과 같은 인구의 본질적인 문제의 구명은 기대하기 어려웠다.001)
따라서 호구문제가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002) 호구에 대한 자료는≪朝鮮王朝實錄≫의 호구관계 자료와≪세종실록지리지≫, 문집 등에 산견되고 있으나 이것은 당시의 실제 호구수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편호방식과 인구동향 및 인구성장과 같은 문제를 밝히는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관계자료의 면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001) | 지금까지 이에 대한 연구로서는 李光麟·有井智德·金錫亨·金載珍·韓永愚·韓榮國 등의 논문이 있다. 이들 가운데 호구문제를 집중적으로 취급한 것은 김재진·한영국에 한하고 나머지는 모두 호구문제와 관련이 있는 특수부문을 개별적으로 다룬 데 불과하다. 당시 호구자료에 대하여 비교적 구체적으로 분석 검토한 김석형·김재진의 연구가 주목되나 이도 당대의 기본사료인 실록 등 문헌상의 실증적인 연구가 부족한 것 같으며 주로 태종 4년, 6년도의 호구통계와≪세종실록지리지≫의 호구통계 등 몇몇 자료에다 후기의 것을 원용하여 관계자료의 충분한 기반 없이 숫자적 조작을 구사해서 결론을 도출하고 있는 실정이며, 그들의 견해도 경청할 것이 있으나 대부분 추정에 그친 것이 유감이다. 李光麟, <號牌考>(≪白樂濬博士還甲記念國學論叢≫, 1955). 有井智德, <李朝初期の戶籍法について>(≪朝鮮學報≫39·40, 1966). 金錫亨, <李朝初期 國役編成의 基柢>(≪震檀學報≫14, 1941). 金載珍,≪韓國의 戶口와 經濟發展≫(博英社, 1967). 李樹健, <朝鮮初期 戶口硏究>(≪論文集≫5, 嶺南大, 1971). 韓永愚, <朝鮮初期 戶口總數에 대하여>(≪인구와 생활환경≫, 서울大, 1977). 韓永國, <朝鮮王朝 戶籍의 基礎的 硏究>≪韓國史學≫6, 1985). ―――, <朝鮮初期 戶口統計에서의 戶와 口>(≪東洋學≫19, 檀國大, 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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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 주 1)의 韓永愚·韓榮國 등에 의하여 호구통계와 인구동향 및 편호방식에 대한 각자 나름의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