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양반의 신분적 지위
조선시대의 사회신분은 크게 양신분과 천신분으로 대별되어 있었다.179) 양신분은 국가의 관리가 될 수 있는 권리와 국가에 조제와 국역을 부담하는 의무를 지닌 자유민이었는데 비하여 천신분은 타인, 또는 국가기관에 예속 되거나, 예속되지 않더라도 인격적인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부자유민 이었다. 이것은 혈통에 의하여 구분되었으며 범죄자를 처벌의 차원에서 천 신분에 편입하기도 하였다. 삼국통일 이후에 정복전쟁이 없어져서 노비의 생성요인 중의 하나인 전쟁포로가 없어지고 다만 범죄노비·채무노비만이 전해 왔으나 고려시대의 양반귀족들은 노비의 확대재생산을 위하여 奴婢從母法·一賤則賤의 법제를 만들었다.180) 노비제는 실로 양반귀족들의 사회·경제적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시행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원이 고려의 노비제를 없애려하자 양반귀족들이 노비없이는 양반의 지위와 권익이 보장될 수 없다고 하여 크게 반발함으로써 중지되었다. 良賤制에 의해서 광범한 귀속적 신분인 노비를 설정해 둠으로써 국가기관 또는 양신분에 봉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양신분 안에서는 관직·재부 등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하였다.그리하여 이들 가운데는 사회적인 불평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양반·중인·양인 등의 구분이 그것이었다. 양천 불명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身良役賤이라는 층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양신분 내의 2차적인 신분 분화는 성취적인 면이 작용하고 이것이 혈통으로서 세전·고착되었다. 조선관료제에 있어서 혈통과 재능이 관직을 얻는 두 가지 길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양신분 내에서는 혈통의 요소인 음서와 재능의 요소인 과거 취재가 동시에 작용하여 관직사회에서의 우열을 정하였다. 여기에는 귀속적인 측면과 성취적인 측면이 동시에 고려되게 마련이었다. 양·천의 구분은 법제적으로 확연한 구분이 있었지만 양신분 내의 신분의 재분화에서는 법제적으로 불평등을 규정하기도 하고 사회적인 통념으로서 불평등을 구현하기도 하였다. 향리나 서얼의 과거응시를 일정하게 제한하면서도 양반의 범주를 정할 때는 4조 안에 현관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양신분 중에서도 오랫 동안의 관직·문벌·토지소유·노비소유의 경쟁에 서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는 특권적인 지배신분층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 한 특권적 지배신분층은 그들이 차지한 각종 특권을 유지·강화하기 위하여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통하여 법제적으로 피지배신분을 더욱 속박하 였다.
고려·조선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지배신분의 지위를 차지한 것은 양반이었다. 양반은 국가의 문·무관직을 차지한 관료군을 의미하며 이것이 특혜로서 세전되기도 하여 그 가족·친족을 가리키는 신분개념으로도 쓰였다. 그렇다고 폐쇄적인 신라의 골품제사회에서처럼 혈통만이 중시되는 것이 아니라 재능도 중시되어 양반신분에는 신분이동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처럼 정복왕조가 들어선 적이 없는 우리 역사에서는 지배층의 변동이 심하지 않았다. 후삼국 이래 顯族이었던 三韓世族이 조선시대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 그 예이다. 양반은 그들이 차지한 세습적인 권력을 이 용하여 모든 법제를 그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고 군대와 경찰·하급관속들을 두어 평민과 노비를 제압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공정한 경쟁인 것 같지만 이미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가 되어서는 양반의 제특권은 쉽게 무너뜨릴 수 없었다. 앞에서 조선 초기 양반의 여러 가지 특권을 들었지만 당시의 양반은 이미 세족으로서 世官·世祿을 받아 이미 지배층으로서의 확고한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물론 양반이 아닌 경우에도 진출이 막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진출로를 개척하기에는 많은 난관이 실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반은 조선 초기에 이르러 서울과 지방의 아전이나 기술관·양반서얼들을 하급 지배신 분층인 中人으로 격하시켰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에 이르러 지배신분은 상 급 지배신분층인 양반과 하급 지배신분층인 중인으로 양분되게 되었다. 이에 조선 초기의 사회신분은 양반·중인·양인·천인으로 대별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네 신분층 중에서도 양반의 지위가 월등히 높았다. 법제적으로는 양신분과 천신분의 구분이 보다 기본적인 구분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 적으로는 양반과 비양반의 구분이 더 중요한 구분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양 반은 私權의 기반으로서 사전(사유지, 또는 개인수조지)·사민(사노비)을 지배 하고, 사전·사민에 대한 지배관계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양반국가를 세워 그들 자신이 국가기관의 구성원이 되었으며 국가의 공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공전(국유지, 또는 국가수조지)·공민(양인·공노비)을 두었다. 그러나 사권과 공권의 관계는 반드시 균형을 유지하기 어려워서 때로는 양반의 사권이 국가의 공권을 압도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국가의 공권이 양반의 사권을 제압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권이 공권을 압도하면 국가가 쇠망하고 사권과 공권이 균형을 유지하면 국가가 부강해졌다. 14세기, 19세기는 전자에 속하고 10세기, 15세기는 후자에 속한다.
양반은 사권의 기반으로서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양반이 아닌 사람들도 노비를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는 노비가 노비를 소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노비주의 대부분은 양반이었다. 노비는 양반의 사회적 권위와 경제적 여유를 제공해 주는 주요한 생활근거였다. 노비의 봉사가 있으므로 해서 양반은 생산노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고 독서와 修己治人에만 종사하여 조선사회의 지배층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181) 그러므로 양반은 어떻게 해서 든지 많은 노비를 확보하려 하였다. 노비는 토지와 함께 양반에게 가장 주요한 재산이었다. 그들은 되도록 많은 노비를 확보하기 위하여 奴婢世傳法·賤則賤의 노비신분법을 마련하였다. 이것은 중국에도 없는 고려·조선시대의 신분법이었다.
양반은 노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법제적으로 이들을 천인화하 고 양반과 노비와의 관계를 하늘과 땅, 위와 아래의 지배·복종관계로 묶어 놓았다. 따라서 노비가 양반상전에게 대항하거나 양반여자를 간통하였을 때 는 극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노비가 상전의 말을 듣지 않을 때 에는 刑殺을 제외한 私刑을 가해도 되었으며, 양반이 잘못을 하였을 경우 매를 대신 맞기도 하였다. 또한 노비에게는 종모법이 실시되었다. 가부장적인 가족 구성을 원칙으로 하는 조선사회에 있어서 가계는 반드시 부계를 따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노비에게만 유독 모계를 따르게 한 것은 노비를 가축과 같은 재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비가 형벌에서부터 나왔다 하여 ≪경국대전≫에 노비는 刑典에 기록하고 있다.
大家世族은 노비를 소유해야만 집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대가세 족이 버티고 있는 이상 양반국가는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양성 지는 원이 고려를 직할령으로 편입시키려 했을 때 權溥·李齊賢과 같은 대 가세족이 있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고 李施愛의 난 때 함길도가 쉽게 적의 손에 들어간 것은 그 곳에 世臣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예를 들어 노비소유를 정당화하고 있다. 양반과 노비와의 관계를 국왕과 관료와의 관계와 같은 주종관계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즉 主奴關係를 군신관계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하여 조선시대 양반의 사권과 국가의 공권과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양반과 양인은 門地의 높고 낮음으로 구분되었다. 같은 양신분에 속하기 때문에 그 구분도 명확하지는 않았다. 문지는 가문의 지체를 의미하며, 가 문의 지체는 가문의 혈통과 관직과의 관계를 통하여 규정된다. 양반은 고려 시대부터 지주요 노비주로서 과거시험이나 吏職을 통하여 양반직을 차지해 온 부류이며, 양인은 한미한 농민으로서 오랫 동안 하류에 머물러 있던 부류들이었다. 양반은 음직·과거 등을 통하여 계속 관직을 차지하였고 그들끼리 폐쇄적으로 통혼함으로써 지배신분층을 구성하게 되었다. 더구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 지배층이 양분화하여 양반과 중인이 갈리게 되자 양반과 양인의 신분차는 더욱 현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 초기까지 이족이나 사족으로 올라 가지 못한 일반평민들은 양인신분으로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양인은 良民·常人·常民·平民으로 불리기도 하였다.182) 그러나 때로는 양인이 양신분 전체를 의미하는 광의의 양인으로 쓰일 때도 있었고 平常人을 가리키는 협의의 양인으로 쓰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양·천으로 표기될 때가 많았다. 그러므로 편의상 전자를 양신분, 후자를 양인으로 구분하여 쓰고자 한다.
그러면 양반과 양인은 무엇으로 구분하는가. 관습적으로는 4조 안에 현 관(9품 이상의 문·무반직)이 있는가가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양반이 되는 데 는 유교 교양과 관직이 문제되었으나 16세기 이후에는 道學이 더 첨가되었다.183) 관직이나 도학이 있는 조상이 많은 것이 가문의 문지를 높이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16세기 이후에는 양반들이 族譜·文集·碑銘·書院·祠廟·樓亭 등을 만드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조선 초기에 이르러 향리·서리·기술관·서얼·토관·장교 등은 중인층으로 격하되었다고 하였다. 양반은 이들 중인들에게 복잡한 행정실무와 대민 업무를 일임하고 그들은 시문을 즐기고 수기치인의 방도를 궁구하는 데에 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양반은 중인을 일반 백성들의 불만을 막아내는 완충벽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중인들은 양반정권에 기생하면서 양반들로부터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 때문에 양자간에 마찰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았고 그들의 행정업무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도 과거나 입공을 통하여 양반으로 상승할 수도 있었고 양반 중에도 중인의 직종에 오랫 동안 종사하면 중인으르 격하되기도 하였다. 양반이 2대 이상 향리를 지내면 향리로 떨어지는 것이 그 예이다.184)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초기의 사회신분은 크게 양신분과 천신 분으로 나누어지고 양신분 중에 양반·중인·양인이 다시 분화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의 사회신분은 양반·중인·양인 천인으로 4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중인층은 15세기에 성립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 가서야 독립된 신분층으로 굳어져 갔다. 양반은 고려 초기부터 양인과 분화되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에 이르러 상급 지배신분층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였고, 중인층은 조선 초기부터 지배신분의 양분화과정에서 생겨나기 시작하여 조선 후 기에 독립된 신분층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네 신분층 간에 신분이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양반 이 반역죄를 지면 노비가 될 수도 있고, 가문이 몰락하여 양인과 마찬가지로 될 수도 있었으며 오랜 동안 아전으로 종사하면 중인으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양인이나 중인이 과거나 입공을 통하여 양반이 될 수도 있었고, 극히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노비가 공신이 되어 양반으로 상승할 수도 있었다. 즉 신분 간에 카스트(Caste)적인 장벽은 가로 놓여 있지 않았다. 이것이 양천제를 바탕으로 하는 개방적인 사회체제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신분간의 이동이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회변동과 역사발전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양반층에 편입되어 갔다. 그리하여 양반층의 특권이 희석되는 반면에 양반층내의 大家·鄕族·殘班 등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즉 조선 후기로 가면 양·천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접근하고 양반내의 구분은 더욱 복잡하게 되어 간 것이다.
<李成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