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양반 사유지에의 특전
양반은 본원적으로 지주였고 그러한 지주적 지위를 발판으로 관직을 획득하였으며 그들의 관료적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더욱 많은 사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고려왕조는 왕실·귀족·사원의 토지겸병과 압량위천을 통한 사유지의 확 대로 조세수입이 줄어들어 결국 국가가 망하고 말았다. 이에 고려 말부터 여러 차례에 걸친 노비변정 사업과 전제개혁으로 불법적으로 점탈된 토지가 많이 국가로 환수되고 노비가 된 양인들이 많이 還良되었다. 그리하여 자영농의 수가 어느 정도 늘어나게 되었고 따라서 양반 사유지는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특히 태조 원년(1392) 8월에는 사헌부의 요청에 따라 王氏 종친이나 양부(宰樞) 이상의 노비소유를 20구 이하로, 양부 이하는 10구 이하로 제한하였으며 나머지 노비는 모두 국가에 소속시켰다. 고려의 왕씨종친이나 巨室 양반은 노비를 1,000여 구 이상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새 왕조가 탄생하면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고 노비를 몰수당하게 된 것이다. 이들 불평세력이 많은 노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하였기 때문이다. 노비가 없으면 광대한 농장을 경영할 수 없게 되는 효과도 있었다. 한편 과전법에서 竝作半收도 금지시켰다. 단 鰥寡孤獨이나 자식·노비를 거느리지 않은 사람으로서 3∼4결 이하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만은 병작반수를 예외적으로 할 수 있었다.174) 그러나 병작반수를 금하는 것은 크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만약 이를 철저히 금한다면 토지없는 농민은 경작할 땅이 없고 지주가 스스로 경작할 수 없는 땅은 묵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 초기에는 江南農法이 도입되어 농업기술이 발달되고 농업생산이 증대될 수 있었다.175)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잉여생산이 가능하고 토지없는 농민이 경작을 원한다면 병작반수가 행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병작반수는 오히려 조선 초기에 있어서 조차도 성행하고 있었다. 농업 기술의 발달과 병작반수의 성행은 조선 초기의 새로운 농장발달의 자극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양반들의 토지겸병과 압량위천이 다시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농장발달을 억제하려는 여러 가지 금령으로 고려 말 귀족의 농장은 줄어들었으나 조선왕조 신귀족의 농장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농장을 확대시키는 방법은 고려 말 양반들이 쓰던 방법과 유사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농장이 사패에 의하여 확대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비하여 조선 초기의 농장은 買占에 의하여 확대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시대부터 토지매매는 원칙적으로 자유였다.176) 그러나 과전법이 실시되면서 토지매매는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농민생활을 안정시키고 세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였다. 국가의 수취·흉년·기근·장리·관혼상제 때문에 궁핍해진 농민들은 토지를 팔아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요인들에 의하여 농민들의 토지 매매는 거의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도 토지매매의 금령을 일부 완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에서는 우선 서울의 택지와 菜田의 매매를 공인하고, 세종 6년(1424) 3월부터는 외방 전지에 대해서도 限年賣買를 허가하게 되었다. 이 때의 토지매매는 한년매매가 특징이었다. 이를 還退라 하였다. 한년매매의 기간은 세종 6년 이후에는 5년, 성종 12년(1481) 경에는 다시 15일로 단축되었다. 15일 기한제는 ≪경국대전≫에도 그대로 법문화되었다. 한년매매의 기간이 점점 단축되어 간 것은 토지의 영구한 매매가 일반화되어 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가난한 농민들이 짧은 기간 안에 빌려간 빚을 갚고 토지를 찾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토지를 팔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도 양반들이었고 그들의 다급한 사정을 이용하여 싼 값으로 그 토지를 사들이는 것도 양반들이었다. 그리하여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 양반지주들은 가난한 농민의 토지를 사들일 뿐 아니라 토지로부터 유리된 농민들까지도 노비로 만들어 차지하였다.
조선 초기 양반의 농장은 개간에 의하여 확대되기도 하였다. 국가에서는 개간을 적극 장려하였다. 왜구가 소탕되어 해안지방에는 특히 개간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국가는 황무지 개간에 부농층의 資力뿐 아니라 종친·양반 관료들의 자력과 물력을 동원하고자 하였다. 종친·양반관료들은 개간에 필요한 풍부한 노비의 노동력과 식량·종자·농기구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조 5년(1460) 12월의 闢田興業조건에 의하면 양반관료들에게 황무지를 의무적으로 개간하도록 배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賞職을 주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국가가 양반관료들에게 이중적인 혜택을 주는 것이었다. 개간한 땅을 차지하고 게다가 상직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조선 초기에도 양반의 농장은 공·사전의 점탈을 통하여 확대되기도 하였 다. 특히 연해지방 수령의 도움을 받아 많은 간척지를 개간하여 착복하는 방 법도 있었다. 즉 태종 14년(1414) 5월에 좌정승 하륜이 通津·高陽浦의 간척지 200石落을 농장으로 삼았던 것이 그 예이다. 또 영의정 黃喜는 交河屯田을, 富平府使 李孝禮는 東坡驛田을, 좌찬성 黃守身은 牙山屯田 24곳을 착복한 적도 있었다.177)
조선 초기 양반들의 농장확대의 또 다른 한 방법으로 長利가 있었다. 장리는 미곡을 빈민에게 빌려주고 연 50%의 高利를 받아 내는 재산증식 방법이었다. 장리는 存本取息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를 기간 내에 갚지 않으면 이자에 이자가 붙어 결국 토지나 가산을 빼앗기게 되어 있었다. 장리로 치부 한 양반 중에는 鄭麟祉·洪允成·尹師路·尹弼商 등이 유명하였다. 양반장리 이외에 內需司長利·寺院長利도 성행하였다. 특히 세종 30년(1448) 12월에 전국 각지에 깔려 있던 장리의 잡곡만도 137,776석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왕실재정인 내수사장리의 확대는 국가경제의 안정을 위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세종 26년에는 내수사장리를 일시 혁파했다가 이듬해 9월에 복구하였으며,178) 성종 1년(1470) 9월에는 세조 12년 이전의 걷히지 않은 장리를 덜어주고 그보다 2년 뒤인 성종 3년 정월에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내수사장리 중 237개소만 남기고 325개소를 혁파하였다. 그러나 성종 13년 11월에는 왕의 자손이 많아 경비가 많이 필요하다고 하여 내수사장리는 다시 부활되었다가 중종 11년(1516) 이후에는 신규대출이 정지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초기의 양반관료들은 토지의 매점·개 간·탈점·장리 등의 방법을 통하여 15세기 후반기에 이르면 대농장을 소 유하게 되었다. 세종조의 趙末生·孝寧大君·李順蒙, 세조조의 윤사로·朴 從愚·尹士均·정인지·황수신, 성종조의 宋益孫·永膺大君·윤필상 등은 이 러한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윤사로·박종우·윤사균·정인지는 세조조에 4富로 알려질 정도로 많은 토지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양반농장은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에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은 토지가 비옥한 하3도에 많았다.
그러나 양반농장이라고 모두 규모가 큰 것은 아니었다. 권력형 농장을 제 외하고는 일부의 토지는 자기의 노비를 시켜 경작하게 하고 나머지는 병작 을 주는 소규모의 농장도 얼마든지 있었다. 이러한 농장은 고려 때부터 전해 온 것도 있고 조선 초기에 새로 생긴 것도 있겠지만 대체로 자기의 선영 근 처나 은거지에 별장 형태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양반농장을 別 業·別墅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