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양인의 용례와 범위
양인과 천인은 각기 인민의 등급을 대조적으로 구분하는「良」과「賤」이 사람을 뜻하는「人」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용어로서 조선 초기에는 개개인의 신분을 표현하는 법제적 규범이었다.「民」은「人」과 통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良人·賤人을 良民·賤民으로는 표기하지 않았다. 우선 천민의 경우에는 조선 초기 사료에 그 용례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양민은 자주 나타나는 용어이나 통상 양인과는 용법이 다르며 지칭 대상도 일치되지 않는다. 법령에는 통상 양인이란 용어를 사용하였고 대상자의 신원을 명기할 때 반드시「양인 ○○○」라 표기한 것은 양인만이 법제적 규범이었기 때문이다.
양인과 천인은 본래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구성원을 포괄하는 법제적 규범이었으므로 여자도 양인·천인으로 표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별에 따 라 다소 용례상의 차이를 보인다. 양인 중 남자를 가리킬 때는 간혹 군역과 관련하여 良丁, 혼인과 관련하여 良夫 등의 용어가 쓰이기도 하지만 보통 양인으로 표기한 반면 여자의 경우에는 양인 대신 양녀라 지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천인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조선 초기의 사료에서 천인 또는 그 약칭으로서의「천」이 양인·양과 대조되어 나타날 때는 예외없이 노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천·천인이 단독으로 나타날 때에도 엄격한 법제적 문맥에서는 거의 틀림없이 노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255) 반면에 양·양인은 모든 비노비자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자주 논란이 되었던 양·천 사이의 혼인문제에서「양」과「천」은 그렇게 사용되었다.
조선 초기의 양인은 이제까지 흔히 오해되어 온 바와 같이 평민과 같은 피지배층에 속하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었다. 조선 초기의 포상규정이나 老人職 수여규정에서 각기 그 대상자를 양인·천인으로 양분하고 있었던 것도 양인·천인이 모든 인민을 포괄할 수 있었던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잠시 뒤에 대상자의 표시 방식을 元有職者·無職者(또는 白身)·천인으로 바꾸게 된 것은 양인 안에 官人과 관직을 갖지 못한 庶人이 다 같이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良家」에 속하는 자로서 서인과 함께 양반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보인 경우라든지 사족부녀를「양녀」라 지칭한 경우 등도 나타난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양인은 다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구성은 대가문의 후예로부터 역리·보충군에 이르는 복잡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良이라 칭하는 자의 등급은 하나가 아닙니다. 비록 衣冠閥閱의 후예가 아니더라도 上下·內外의 구별이 있는 자가 있고 비록 상하·내외의 구별이 없어도 대대로 평민이 되는 자가 있으며, 몸은 천인이 아니나 천인과 다름이 없는 자가 있어서 驛吏·補充軍과 같은 자에 이르러도 이를 통틀어 양이라 합니다(≪世宗實錄≫권 64, 세종 16년 4월 계해).
양인이 비노비자를 범칭하는 개념으로 정착된 조선 초기에도 양인이 반드시 비노비자 전부를 포괄적으로 지칭할 때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양인 이 문무관이나 공상인과 나란히 병기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양인이 문무관이나 공상인과 대칭적인 집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표기상의 편의 때문이었다. 양인 중에서 문무관이나 공상인처럼 특 수 취급을 받아야 할 자를 명기하고 나머지 자들은 양인으로 일괄하여 표기 한 데에 불과한 것이었다.
양인은 대상자의 신원을 밝힐 그 이상의 적절한 수단을 발견하기가 어렵거나 노비인가 여부 이외에는 구체적인 인적 상황을 명시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양인 중에서도 위정자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관인 집안의 사람일 경우에는 선대의 관직을 밝히며 그 밖의 양인은「향리 ○○○」,「수군 ○○○」처럼 신역을 명기함으로써 양인이라는 사실 이외에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 대체로 양인 중에서도 정해진 신역도 없고 특이한 생업에 종사하고 있지도 않은 자의 경우에만「양인 ○○○」라 고 표기하게 된다. 양인 남자는 대체로 직책이나 신역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양인 남자가「양인 ○○○」라 표기되는 경우는 드문 반면 여자의 경우에는「○○○의 女」,「○○○의 妻」와 같이 아버지나 남편과 함께 표기되거나「양녀 ○○○」라 기재되어 나타나게 된다.
255) | 흔히 조선시대의 천인(또는 천민)으로 지목되어 왔던 廣大·巫覡·寺堂·娼妓·白丁 등은 천인 내에서 노비와 대립되는 신분집단이 아니었다. 이들은 工商人처럼 일종의 직업집단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양·천과 대립되는 제 3의 신분도 아니었고 천인 내에서 노비와 대립되는 독립된 신분집단도 아니었다. 그 중에는 양인도 있고 노비도 있는, 말하자면 신분적으로 양·천 어느 쪽으로 해소될 집단이었다. 다만 백정은 才人·禾尺을 세종 5년(1424)에 정부가 평민과의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개칭한 이름이며 양인임을 공인한 부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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