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양인 규범의 확립과정
가. 고대·고려시대
양천 신분제의 기본 골격은 모든 인민을 양·천이라는 두 집단으로 구분하고 양자의 법제적 지위를 대칭적으로 설정하여 각각 상이한 권리·의무를 부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이념적 배경은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인민은 본래 하늘을 대신하여 만민을 다스리는 군주의 보편 적 臣民이라는 유교적 관념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관념에 따르면 모든 인민 은 원초적으로 군주의 赤子로서 동일한 위치에 놓이게 되며 관인은 어디까지나 인민 중에서 군주에게 발탁된 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민 중에 는 선민의 자격을 인정받기 어려운 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신민으로서의 자 격 유무를 판정하는 일차적인 기준은 범죄 여부에 있었다. 예컨대 노비는 중범죄를 저지른 자로서 신민의 자격이 박탈된 자로 관념된다. 실제에 있어서는 노비가 모두 범죄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통상 노비 중 의 비범죄자의 존재는 무시되고 노비는 일단 범죄자나 그 후예로 간주되며 그것으로써 그들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된다. 그리하여 신민의 자격을 상실 한 자는 선량한 인민과 구별되어 천인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이나 체제는 중앙집권적인 군주권이 확립된 이후에야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군주권이 확립된 후에도 사회는 여전히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며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배층이 평민과 똑같은 호칭이나 권리·의무를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마련이다. 따라서 양천제가 확립되기까지에는 오랜 시일이 소요되며 시기에 따라 그 구체적 내용은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양천제는 본래 중국에서 출현한 신분체제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6세기 후반의 자료에「양인」의 용례가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부터 중국 양천제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양인이 천인이 아닌 자 전체를 포괄하는 규범으로 설정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왕이 귀족세력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신라 골품제사회에서 성골·진골과 4∼6두품의 귀족을, 더 나아가서는 평민까지 동일한 신분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신라에서의 양·천은 단순히 평민과 노비를 대조하는 정도의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고려 초기에 이르면 성종대의 崔承老가 “우리 조정의 양천의 법은 그 유래가 오래입니다”라고256) 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양·천이라는 법제적 규범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평민도 벼슬할 수 있는 권리(이하 仕宦權)를 가진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다.257) 나말려초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골품제사회가 붕괴되자 관직을 독점하던 세습귀족은 소멸된 반면 이제까지 관계에서 소외되어 있던 평민은 명목상으로나마 사환권이 인정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이제 국왕이 과거의 귀족 대표자의 지위에서 벗어나 보편적 신민을 통솔하는 초월적인 지위로 부상된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혈통적으로 제한된 소수자만이 누릴 수 있었던 관인의 지위도 원리적으로는 경쟁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지위로 변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세습귀족과 평민 사이의 경계선이 허물어진 것을 뜻하며 비노비자 사이의 신분적 간격이 크게 좁혀진 것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 양·천 2분법적 체계가 형성될 중요한 단서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양천제가 정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모든 인민을 양·천 두 집단으로 대별하는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양·천의 용례를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노비는「천」에 해당되며 평민(일반 군현민)은「양」에 해당되는 자라는 사실 정도이다. 아직까지는 양인이 문벌에서 평민에 이르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범칭하였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증거를 찾기가 어렵다.
설사 고려시대의 양인이 천인이 아닌 자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하여도 고려시대에는 양인 일반에 대한 보편적인 권리·의무 체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고 보인다. 잘 알려진 대로 鄕吏·京軍과 평민층 사이에, 그리고 평민과「雜尺」層 사이에 각각 권리상(사환권상)의 차등이 있었고 의무상으로도 丁戶와 白丁이 뚜렷이 대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