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말 선초
고려시대에 양천제가 확립되지 못하였던 것은 골품제사회의 붕괴와 함께 세습귀족 체제는 무너졌으나 중앙에는 문벌이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고 외방에는 나말 이래의 지방세력이 온존하여 이들을 피지배층인 평민과 동등한 위치에 놓을 수 없었던 데서 연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서 계층구조에 상당한 변모를 보이게 되었다. 우선 평민층보다 상위에 있던 향리나 경군과 같은 자의 지위가 내려가고 있었던 것을 들 수 있다.258) 다음으로는 평민층보다 하위에 있던 부류들의 경우에는 고려 후기에 들어오게 되면 향·소·부곡이 해체되어 일반 군현화되면서 그 지위가 개선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노비 아닌 자 사이의 등질화가 괄목할 만큼 진행되자 평민층과 향리·경군층 사이에 존재하던 신분적 경계선이나 평민층과 잡척층을 구분하던 경계선이 모두 흐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후기에도 여전히 문벌은 잔존하였으나 이미 사회 내부에는 새로운 사회체제를 건설하려는 사대부세력이 자라고 있었다. 이들은 기존의 문벌체 제를 타파하기 위해서 문벌을 제어할 수 있는 강력한 군주권을 확립하려 하였고 공개경쟁에 의한 능력주의 원칙을 내세우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군신관계의 절대성이 강조되면서 보편적 신민을 통솔하는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군주의 지위는 이념적으로 더욱 공고화되게 되며 능력주의 원칙이 강 조되면서 신분상 하자없는 모든 인민은 군주의 신민으로서 균등한 권리·의무를 가져야 할 당위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고려 후기 이래로 진행된 노비 아닌 자의 등질화를 바탕으로 하여 노비 아닌 자를 신분상 균등한 위치에 놓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첫째, 노비가 아닌 자로서 신분적 차별을 받으면서 국가의 특별관리 대상 이 되고 있었던 특수한 부류의 상당수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일반 양인화되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우선 이들은 국가에 의해 명확히 양인으로 지칭되게 된 점이 주목된다. 태종 말년에 고려 이래의 애매한 신분적 위치에 처해 있던 稱干稱尺者를 양인으로 공인한 것은 노비 아닌 특수부류를 양인으로 인정하는 방침이 제도적으로 확립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세종대에 재인·화척을 “본래 양인이다”라 한 것도 이미 비노비자=양인이라는 등식이 명확히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노비 아닌 자 중의 특수부류를 양인으로 명시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히 호칭상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양인이라는 호칭에 걸맞는 지위를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새로이 양인으로 편입되었거나 양인으로 공인된 여자에 대하여 그 신역을 면제한 조치가 그것이다. 그리고 세종대부터는 특수한 신분적 배경을 가진 이러한 여자들을 파악하기 위하여 부과하였던 등록의 의무조차 폐기하여 버렸다.
태종·세종대에 대대적으로 신역체계를 재편성하면서 세습역을 대폭 감 축하여 나간 데서도 양인을 신분적으로 균등화하려는 노력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와 아울러 주목해야 할 점은 驛吏·津尺·鹽干처럼 여전히 천시 되는 신역을 지며 사환권의 제약을 받아야 했던 자들의 경우라도 고려시대 와 달리 그러한 신역이나 사환상의 제약이 외손 쪽으로는 전수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259) 이는 신분적인 제한이 후손에게 세습되는 범위가 반으로 대폭 줄어든 것을 뜻하는 것이다.
둘째로, 이 시기에 양인의 권리가 보편화하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사 회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개방적으로 변모하면서 명목상으로만 인정되던 평민의 사환권이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권리(이하 赴擧權)가 이 시기에 이르러 그 제도적인 뒷받침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능력주의 원칙에 따른 공개경쟁 체제가 크게 강화되고 있었다. 과거의 비중이 높아지고 음서의 비중이 낮아진 것,260) 어떤 형태로든 시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환할 수 없게 된 것,261) 관리의 임용에서의 가문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었던 것262)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에 교육의 문호가 대폭 확장된 것도 주목할 만한 것이다. 유학의 경우 지방의 모든 군현에 빠짐없이 향교가 설치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 며263) 유학 이외의 분야에 있어서도 중앙의 여러 기관에 역학·의학을 비롯 한 여러 학교가 나뉘어 설치되어 있었다. 2만 명에 달하는 관비 교육생이 있 었다는 것, 정부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교육기관의 확장에 힘썼던 것, 모든 국립학교가 평민에게까지 개방되어 있었던 것264) 등은 평민의 사환 가능성을 높이는 조치로써 주목된다.
조선 초기에 평민층에게 군역부담에 대한 반대급부로 정3품까지의 산계 를 수여한 것도 고려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으로서 평민과 관직 의 거리가 그만큼 좁혀지고 있었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여말 선초에는 의무면에서도 중요한 변화들이 있었다. 공민왕대에는 국역체계를 과거의「職役」체계에서「身役」체계로 대체해 가고 있었다.265) 이 시기에 세 사람의 장정을 묶어 한 사람의 군인을 차출하는 3丁1戶 편제 원칙이 수립된 것은 田丁과 國役을 결합시킨 직역체계의 와해를 기정 사실로 하여 이에 대치할 보편적 의무체계의 시행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퇴직관인에 대한 군역부과가 시도되었다는 것은266) 신역 부과의 무차별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모라 할 수 있다.
공민왕대에 간헐적으로 시행되던 퇴직관인에 대한 군역부과는 위화도회군 이후 강화되었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그대로 지속되었다.267) 한편 왕족에 대 한 군역부과는 세조대에 이르러서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4세대 이내의 종친 을 비롯한 왕의 근친들을 제외한 宗姓袒免以上親을 비롯한 친척들은 族親衛 에 소속시키고 이보다 더 관계가 먼 친척들은 일반 군역에 충속시켰다. 왕 족에 대한 군역부과가 이처럼 건국 후 상당한 시일이 흐른 후에야 개시된 것은 4세대가 경과하기 전까지는 왕의 근친으로서 대우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세조 이전까지는 왕족의 군역이 별로 문제되지 않았던 데서 연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양인이라는 규범은 이처럼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여말 선초에 이르러 뚜렷이 정착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양인에 속하는 사람들의 신분 호칭으로 다른 동의어를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양인」으로만 기재하고 있었던 것도 이 시기에 들어와서「양인」이라는 신분 규범이 명확히 정립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258) | 이러한 추세는 사회사적으로는 대단히 발전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평민 위에 군림하던 특권층의 소멸은 평민 지위의 상대적인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
259) | 劉承源≪朝鮮初期 身分制硏究≫(乙酉文化社, 1987), 126∼131쪽 참조. |
260) | 韓永愚, <朝鮮初期의 上級胥吏「成衆官」>(≪東亞文化≫10, 1971). 金龍善, <朝鮮 前期의 蔭敍制度>(≪아시아문화≫6, 1990). |
261) | 무과가 신설된 것과 각종 取才 시험이 마련되어 有蔭子孫의 경우에도 蔭子弟 취재를 거쳐야 하였던 것 등이 그것이다. |
262) | 고려시대에는「八祖戶口」를 사용하다가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 친족의 기재범위가 대폭 축소된「四祖戶口」를 사용하게 된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
263) | 李成茂, <朝鮮初期의 鄕校>(≪漢坡李相玉博士回甲紀念論文集≫, 1970) |
264) | 李範稷, <朝鮮前期의 校生身分>(≪韓國史論≫3, 서울大, 1976)에서는 조선 전기의 향교에 평민들이 실제로 입학하고 있었음이 밝혀져 있다. |
265) | 고려시대의「직역」에서 조선시대의「신역」으로 국역에 대한 호칭이 변화한 것도 보편적인 의무체계의 성립과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직역이란 어디까지나 토지의 지급을 매개로 부여된 의무이며 특정한 부류에게 부과되는 의무인 반면에 신역은「有身則有役」이라는 표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든 개인에게 무차별적으로 부과되는 것임을 선명히 보여주는 용어이어서 그 성격상의 차이가 뚜렷하다. |
266) | 閔賢九, <高麗後期의 軍制>(≪高麗軍制史≫, 陸軍本部, 1983). |
267) | 韓永愚, <麗末鮮初 閑良과 그 地位>(≪韓國史硏究≫4, 19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