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의무상의 특성
신민의 자격을 보유한 양인과 신민의 자격을 상실한 천인은 그 의무에서 도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양인의 경우에는 공민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형식으로 남자만이 입역 대상이 된다. 그러나 천인의 경우에는 범죄에 대한 징벌이라는 형식으로 신역을 부과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자라고 하여 신역이 면제될 수 없었다. 따라서 노비는 남녀 모두가 입역하여야 하였던 것이다.274) 또한 양인의 신역은 일차적으로 군역을 의미하는 것인데 비하여, 천인은 군역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태종대에 사원을 혁파하여 얻게 된 노비를 軍器監의 火㷁軍과 司宰監 水軍에 충속시켰다가 “賤口를 군에 충속시키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유로 그 명칭을 각기「助役奴」,「轉運奴」로 바 꾼 것은 그 좋은 예이다.275) 노비는 “軍士·助丁은 모두 양민을 쓴다”는 의정부의 계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276) 실제로 입역하는 正軍은 물론 정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게 되어 있는 奉足으로도 설정하지 않았다.
양인이 일차적으로 군역 부담자로 간주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제1의적 의 무가 국가의 수호이기 때문이며 양인이 국가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는 것 은 그들이 보유하는 공민권-보다 구체적으로는 사환권-의 대가라는 형식 을 띠고 있었다. 노비가 군역에서 철저히 배제된 것은 범죄로 인하여 공민 권이 상실된 자로서 국가를 수호할 자격이 없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노비는 공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만큼 공민으로서의 의무도 부여될 수 없었던 것이다.
양·천 사이의 혼인은 고려시대 이래 금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천첩을 거느리는 풍조로 말미암아 양부와 천녀의 관계는 애당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와 양녀가 혼인하면 그 소생을 자기의 노비로 할 수 있기 때문에 奴主는 오히려 이를 권장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천부와 양녀의 혼인의 경우에도 노주의 이해를 무시할 수 없는 정부는 일시적인 단속과 처벌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양·천 사이에 태어난 자식의 신분귀속 문제만은 엄격히 다루어 규 정대로 철저히 시행하였다. 태종대에는 아버지가 양인이면 어머니가 천인이 라도 그 소생을 양인으로 하는「從父爲良」 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세종대 에 이르면 다시 이를 폐지하여 관리나 과거 급제자 등의 자식만을 예외적으로 양인이 되게 하였으니 바로 이들이 서얼의 주축을 이루는 천첩자손이었다. 이리하여 조선 초기에도 여전히 고려 이래의「一賤則賤」 원칙, 즉 부모의 어느 한 쪽이라도 천인이면 그 소생을 천인이 되게 하는 원칙이 관철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권리·의무상의 뚜렷한 차이를 가진 양·천이 혈통에 의해 구분되고 있었으므로 양자가 둘로 구분된 대립적인 기본 신분임은 의심할 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