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양인 내부의 권리·의무상의 차등관계
양인 내에서도 법제적 차등은 설치되어 있었다. 관인과 서인의 차등이 대 표적이다. 다만 이러한 차등은 원리적으로 보았을 때 후천적으로 취득한 지위의 결과, 즉 경쟁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므로 신분적인 차등과 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양인 내에서도 혈통에 따라 권리·의무상의 차등이 주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어떤 개인의 범죄에 대하여 그 범죄와 직접 관련 이 없는 사람들까지 처벌하는 연좌제가 곧잘 시행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반역죄로서 조선 초기에도 반역으로 인하여 사건과 무관한 친족이 사형을 받거나 노비로 전락되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 반역죄가 아닌 범죄의 경우에도 연좌제는 곧잘 실시되어 그 자손은 양인의 신분을 유지한다 하여도 사환권이 박탈되는 징벌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경우 사안의 성격이나 당시의 상황에 따라 연좌의 범위와 처벌의 내용이 결정되기 마련이며 후일 사면을 받아 복권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뇌물을 받거나 국가의 자산을 횡령한 贓吏 및 失行婦女나 再嫁女의 경우에는 연좌의 범위와 사환상의 제한의 내용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었다. 즉 장리 자손의 경우에는 2대에 걸쳐 서 의정부·대간을 비롯한 주요 문반직의 서용이 금지되었으며 실행부녀 및 재가녀 자손의 경우에는 3대까지는 문무반직이 일체 허락되지 않으며 3대에 이르면 요직을 제외하고 임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277) 한편 과거 응시의 경우에는 장리 자손은 아들 1대, 재가녀·실행부녀의 자손은 아들과 손자 2대에 한하여 그 자격이 인정되지 않았다.278)
이처럼 특정한 개인의 행위에 대한 징벌을 후손에까지 확장하여 연좌집단 을 생성시키고 있었던 반면 특정 개인에 대한 시혜를 일정한 범위의 친족에 게 확장하여 특권적인 집단을 생성시키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음자 손이었다. 즉 공신 및 2품 이상의 아들·손자·사위·동생·조카나 實職으로서 3품직을 역임한 자의 아들과 손자, 일찍이 이조·병조·도총부·사헌부·사간원·홍문관·부장·선전관과 같은 요직을 역임한 자의 아들은 과거보다 쉬운 시험인 음자제 취재에 응시하거나 錄事를 거쳐 관리로 진출할 수 있는 특전이 부여되어 있었다.279) 국왕의 4세손의 범위에 해당되는 종친의 경우에는 종친부의 관직을 받아 녹봉과 군역면제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시혜집단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와 동시에 종친에게는 직책을 맡기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親盡」 즉 4세대가 지나기까지는 다른 관직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과거에도 응시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280) 반드시 우대 자라고만 말하기 어렵다. 4세대가 지나면 사환상의 제한이 풀리지만 종친부직도 얻을 수 없고 다른 양인과 마찬가지로 경쟁을 통하여 사환하여야 하고 군역부담도 져야 하였던 것이다.
장리 및 재가녀의 자손이나 유음자손 및 종친과 같은 집단은 그 밖의 양인에 비하여 특정한 귀속적 지위를 지닌 집단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독립된 신분집단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첫째, 이들 성원의 귀속적 지위는 일정 대 수로 한정되어 있어 미리부터 집단의 영속적인 재생산을 막고 있었다는 점, 다시 말하면 지위의 세습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특전 이나 차대를 발생시킨 자와 혈통에 따라 그것을 물려받는 자의 지위가 일치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유음자손은 입사상의 특혜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시험을 통과하여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시험 통과 후에도 선대와 동일한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보호장치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아 다시 그 자손에게 문음의 혜택을 내릴 수 있는가 여부는 오로지 당사자의 성취에 달려 있었다. 또 장리나 재가녀 자손과 같은 차대자의 경우도 2∼3대가 경과하면 그 사환상의 제한이 풀리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서얼·세습적 천역자·향리는 모두 하나의 독립된 신분집단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서얼은 문반이나 무반의 正職에 진출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승진 상한선까지 설치되어 있었고 문과, 생원·진사시, 무과 등 모든 과거의 응시자격이 박탈되어 있었다. 서얼에 대한 차대는 시기에 따라 다소 변동되었으나281) 차대규정을 입안할 때 장리나 재가 녀의 자손처럼 대수의 경과에 따라 제한을 해제해 나가려는 분명한 의사를 갖고 있지도 않았고 한번 서얼이 되면 비록 흠없는 양인과 계속 혼인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서얼로 머물면서 그 지위를 그대로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고려 이래 사회적으로 천시되는 신역을 세습적으로 져야 했던 부류들(이하 세습적 천역자) 중에는 驛吏·津尺처럼 고려 이래로 형벌과 관련하여 역이 부과된 자도 있고 鹽干처럼 형벌과 무관한 자도 있었다. 이러한 자는 사환권 자체가 인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향리의 경우가 특이하다. 향리 역시 일반 양인처럼 어떠한 관 로나 입사로를 선택할 수 있었고 승진에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향리에게는 평민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환권상의 제약이 있었다. 그것은 과거 중 잡과의 경우에 3丁 1子, 즉 3명 이상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만으로 응시가 제한되었던 것과 무과에 응시할 때 먼저 武經七書의 講시험에서 通·略(通)·粗(通)·不通으로 구분된 등급 중 낙제가 아닌 粗 이상의 성적을 받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282) 향리는 과거에 급제하거나 관리의 진출에 성공하지 않는 한 자자손손 향리로 복무하면서 이러한 제한을 받아야 하였다는 점에서 신분집단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 있어서 서얼·세습적 천역자·향리를 제외한 그 밖의 양인들 속에서는 더 이상의 신분집단을 가려내기가 불가능하다. 그 밖의 양인 사이의 법제적 지위는 한결같지 않으나 그러한 지위상의 차등은 원리적으로 볼 때 후천적인 성취나 경쟁에 기초를 둔 형식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신분적으로 동일한 집단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양인 내부의 독립된 신분집단이 우대자가 아닌 차대자 속에서만 나타난 것은 가급적 군주의 교화 대상에서 소외되는 자를 축소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비가 아닌 자들은 일단 양인으로 하여 군주의 신민으로 포 섭해 두고 2차적으로 그 밖의 완전한 신민과 구분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 다. 따라서 아무런 흠이 없는 양인의 경우에는 저절로 동일한 권리·의무를 갖기 마련인 것이다. 신분제사회에서는 귀족같은 소수의 상위신분의 범위나 특권은 명확히 규정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조선 초기에는 평민과 상류층이 법제적으로 동일한 권리·의무체계에 포섭되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결국 조선 초기의 신분제는 노비를 천인으로 하고 노비가 아닌 자를 일괄적으로 양인으로 간주하는 양천 2분법적 체계와 모든 양인이 신분 적으로 균등한 위치에 놓이도록 편제하는 방식을 구조적 특성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