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기타의 특수 부류
양인 가운데에는 사·농·공·상이라는 전통적인 생업 분류로서는 도저히 포괄하기 어려운 생업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이 중에는 승려처럼 법적으 로 인정된 직업을 가진 경우도 있고 遊女처럼 불법적인 매춘업에 종사하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합법화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불법적인 것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성격을 지닌 巫覡같은 자도 있었다. 특이한 생업을 영위하는 자에 대하여 정부는 대체로 그것이 법적으로 허용되는 직업인 경우에는 공상인처럼 녹적하고 과세하되 신역은 부과하지 않는 정책을 취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사원을 감축하고 사원 소유의 노비를 속공하는 등 대대적인 억불책을 시행하였으나 불교의 근절을 꾀한 것은 아니었다. 국왕이나 왕실이 불교행사를 벌이는 경우가 잦았으며 승직까지 마련되어 있었다.321) 정부 가 승려가 되는 것을 억제하려 한 것은 억불숭유책 때문만이 아니라 피역의 수단으로 승려가 되는 길을 봉쇄하려 한 때문이다. 정부가 度牒制를 실시하고 승려가 되는 조건을 엄격히 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승려에게는 그 직업에 대한 과세는 하지 않았지만 도첩을 발급하는 과정에서 丁錢을 부과하였다. 정전이란 면역의 대가로 “그들이 져야할 역에 해당되는 금액을 일 시에 받은 것”이었다.322) 출가한 승려에게는 양인 출신이라도 사환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통상적인 양인의 권리와 의무가 모두 인 정되지 않았던 셈이다.
조선 초기에는 매춘업이 일체 인정되지 않았다. 관인과의 관계로 자주 물의의 대상이 되었던 妓란 으례 公婢 출신의 기예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들 의 임무는 가무나 기악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지방의 관기는 京妓와 달리 종종 소속 관아를 방문하는 관인에게 몸을 제공하고 있었으나 매춘이라기보 다는 일종의 신역으로서 하는 행위이므로 공창제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하여 야 할 것이다. 성리학을 숭상한 당시 사회에서 공창제가 실시될 수는 없었 을 것이다.323) 따라서 조선 초기에 매춘에 종사하는 여자들이란 모두가 불법 적인 사창이었다. 사창 중에는 한 곳에 정주하면서 음성적으로 매춘에 종사하는 여자도 있었지만324)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면서 매춘에 종사하는 자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주로 정부의 단속의 대상이 되었던 것 으로 보이며 조선 초기 자료에 사창들이 보통「遊女」로 불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에는 매춘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공상인처럼 이들을 등록하여 과세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또 양·천이라는 신분상의 차이는 오로지 처벌할 때에만 작용하였다. 유녀는 양인의 경우에는 적발되면 쇠잔한 고을의 관비로 정속되었고 천인의 경우에는 체형을 받은 후 본주에게 환급되었던 것이다.325)
巫覡은 여자무당을 가리키는「무」와 남자 무당을 가리키는「격」이 합쳐 진 말이다. 무당의 절대다수는 여무였지만 남무도 없지 않았다. 무격에는 양인과 노비가 모두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활동을 하기가 쉬운 양인이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초기의 정부는 祀典 정비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유교적 제사 이외의 신앙행위를 소위 淫祀라 하여 이를 억제하려 하였는데 무격신앙은 그 주요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일거에 사회의 습속을 바꾸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정부 스스로가 國巫를 두고 있었고 각종 제사에 무녀를 동원하는가 하면 무녀가 지닌 의료의 기능을 활용하여 환자를 치료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는 정부가 무업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무격의 근절은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326)
당시에는 정부로부터 공인받지 못한 무격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무격은 흔히 妖巫라 불리웠다.327) 현재로서는 당시의 무격의 공인 기준을 잘 알 수 없으나 과거부터 巫籍에 올라 있던 자의 업을 계승한 자는 정부가 인가하여 줄 수 있었지만 새로이 출현한 자에 대해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요무로 취급하여 금압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정부는 요무에 대해서는 이를 타처로 축출하여 자연히 소멸되게 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특히 서울에 거주하는 요무에 대해서는 자주 금령을 내리고 성 밖으로 축출하는 일을 되풀이 하였다.
무적에 등록된 무격에 대해서는 생업을 공인하는 대신 무세를 받았다. 강원도·함길도의 경우에는 巫家에 출입하는 민호에 호당 1필씩 神稅布라는 명목의 세를 받아 무녀와 정부가 3:1로 배분하기도 하였다. 서울의 活人院 이나 지방의 군현에서 救療에 종사한 무격에게는 실적에 따라 포상도 하고 무세를 감면하게 하고 있었다.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지 못한 양인 출신의 남무에게는 군역이 부과될 수 있었다. 성종대의 충청도 보은의 正兵 金永山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그가 당번이 되어 서울로 올라와서 무업을 벌이자 부녀자들이 몰려드는가 하면 군졸들을 멋대로 부려 물의를 빚었다. 이 때에 그를 수군에 집어 넣어 서울 에 오지 못하게 하자는 의견도 제출되었으나 당번이 되어 올라오면 성문 밖에서 역사하여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328) 이 를 통하여 보면 무업에 종사한다 하여 신역을 면제받게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가를 받은 무격이라 하더라도 그 자손들은 신역 부과 대상자로서 국가에 차출되었다. 宗廟·圓丘·社稷·文廟 등 국가적인 중요 제향에서 아악을 연주하는 기악인인 아악공인은 천인을 배제하고 양인 으로 층당하고 있었는데 정부가 이러한 아악공인으로 복무할 대상자를 차출 할 때 무적의 자손이 종종 그 대상자로 선정되고 있었다.
끝으로 양인 가운데 그가 처한 처지로 인하여 국가로부터 특수한 취급을 받았던 雇工과 婢夫·奴妻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고공은 잘 알 려진 대로 부모가 사망하거나 아이를 버리는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남의 집에서 양육된 자나 생활이 어려워 남의 집에 더부살이하게 된 자이다. 비부는 용어 자체로 본다면 단순히 여종의 지아비를 가리키는 것일 뿐이지만 보통 남의 집 여종과 혼인하여 처의 주인집에 기거하는 양인을 말한다. 노처도 비부처럼 남의 집 사내 종과 혼인하여 남편의 주인집에 기거하는 양녀를 가리킨다.
조선 초기의 정부는 고공·비부·노처에게 奴·主 사이의 의리를 확대 적용하여 가부장적 질서를 수립하려 하였다. 이들이 가장의 비행을 고발하거나 가장에 항거하는 경우에는 국가로부터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329) 그러나 이들과 가장과의 관계는 노·주의 관계와 달리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다른 한편 정부는 항상 이들의 신분이 양인임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는 양·천의 판별을 엄격히 함으로써 이들이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경우에 따라 신역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자활하기 어려운 사정을 감안하여 보통 신역을 부과하지 않으나 “고공이라는 자는 노비가 아니면서도 빈궁하여 붙어 사는 사람이다. 실은 양민이니 법으로는 마땅히 군역에 녹적되어야 할 자이다”라 한 것처럼330) 신분이 양인인 만큼 원칙적으로 군역부과 대상자였고, 실제로 군역이 부과된 자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331) 그리고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이들도 명목상으로는 사환권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劉承源>
321) | 韓㳓劤, <麗未鮮初의 佛敎政策>(≪論文集≫6, 서울大, 1957). ―――, <世宗朝에 있어서의 對佛敎施策>(≪震檀學報≫25·26·27, 1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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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 李成茂, <丁錢>(≪譯註 經國大典-註釋篇-≫,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6), 826쪽. |
323) | 세종 9년, 제주에서 매춘행위자를 관비로 사역시키는 습속이 문제가 되었을 때 그들을「遊女」로 등록시키는 것은 도리어 음란한 풍조를 권장하게 된다 하여 이를 금지시킨 사례 (≪世宗實錄≫ 권 36, 세종 9년 6월 정묘)는 公娼制가 인정 될 수 없는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 주는 것이다. |
324) | 본주가 자신의 비에게 매춘을 시키고 돈을 받았던 사례가 이에 해당될 것으로 보인다(≪成宗實錄≫권 21, 성종 3년 8월 무인). |
325) | ≪成宗實錄≫권 20, 성종 3년 7월 을사. |
326) | 韓㳓劤, <朝鮮王朝初期에 있어서의 儒敎理念의 實踐과 信仰·宗敎-祀祭문제를 中心으로->(≪韓國史論≫3, 서울大 國史學科, 1976) |
327) | ≪世宗實錄≫권 101, 세종 25년 8일 정미조에는 “不付巫籍 號爲要巫”라 하여 무적에 오르지 않은 무당을 要巫라 하고 있지만 그 밖에 자료에는 항상 妖巫라 표기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여기서의 要巫는 妖巫를 잘못 기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
328) | ≪成宗實錄≫권 243, 성종 21년 8월 갑신. |
329) | ≪經國大典≫권 5, 刑典 告尊長. |
330) | ≪世祖實錄≫권 46, 세조 14년 6월 병오. |
331) | ≪成宗實錄≫권 13, 성종 2년 11월 경술·권 195, 성종 17년 9월 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