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국과 억불
실제로 개국 벽두부터 朝臣들은 승려들의 제거를 건의했다. 즉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 4년(1392)에 새 나라를 세운 李成桂는 그 해 7월 17일에 壽昌宮에서 등극하였는데, 바로 그 사흘 뒤인 20일에 司憲府에서는 승려의 제거를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모두 10조로 된 사헌부 上書의 제7조 일부와 제9조에서 그들의 주장을 드러내었다.558)
7조에서는 부처를 섬기고 귀신을 섬기는데 쓰인 비용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긴요하지도 않은 佛神 섬기는 비용들을 모두 고쳐서 폐단을 없애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또 제9조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승려 도태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니, 아예 ‘汰僧尼’를 주제로 삼아 그 머리에 내세우고 있다. 즉 불교란 오랑캐의 한 법일 뿐이므로, 그 무리들을 모아 學行을 자세히 고찰하여 학문이 익숙하고 道行을 닦는 이는 그 뜻을 이루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머리를 기르게 하여 각기 그 생업에 종사케 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宦官과 僧尼를 내치고 도태시키는 일을 개국 초부터 시행할 수는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 뒤 태조 2년(1393) 정월에 大司憲 南在가 불교의 폐단을 극력 진언하였으며,559) 7년에도 조신들은 불교가 治國에 해롭다고 하였다. 또 寺社의 補修와 像塔 조성의 폐단을 지적하였다.560) 그러나 태조는 교단을 억제하거나 승려를 제거한 일은 없었고, 다만 당시 승려들 사이에 행해지던 나쁜 풍습의 폐단을 고치고자 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주었다.561)
태조를 이은 정종도 숭불의 왕이었으므로 부왕의 信佛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하면서 그 양상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