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서원판본
유학의 교육기관에는 옛부터 官學과 私學이 있었으며, 그 중 사학을 私塾·學堂·書院이라 일컫고 서원에서 간행한 책을 서원판본이라 일컬었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중종 36년(1541) 풍기군수 周世鵬이 고려시대 安珦의 옛 집터에 祠宇를 짓고 봄과 가을로 제사지내며 白雲洞書院이라 이름 붙인 것에서 비롯하였다.307) 이 서원이 명종 5년(1550) 李滉의 요청에 따라 紹修書院으로 사액되자308) 중앙관서에서 책을 찍을 때 1부씩 반사받았다.309) 이러한 사례는 서원을 세워 사액받으려는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명종 9년에는 永川의 臨皐書院,310) 이듬해에는 海州의 首陽書院311) 그리고 21년에는 咸陽의 藍溪書院이 사액을 받기에 이르렀다.312) 선조 때에도 사액 신청이 계속되어 임진왜란 전까지는 13개의 서원이 사액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사액받은 서원들은 御書閣을 세워 반사받은 서적은 물론 지방관서가 찍은 서적을 기증받아 간직하며 면학에 이용하였다.
한편 서원에서는 필요한 서적을 스스로 판각하여 서로 주고받아 장서를 늘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간행은 서원의 경제사정이 어려워 별로 활기를 띠지 못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淸凉書院이 명종 21년에≪近思錄集解≫를,313) 선조 원년(1568)에≪古史通略≫을314) 간행하였고, 星州의 川谷書院이 선조 7년에서 다음해에 걸쳐≪薛文淸公讀書錄要語≫와≪朱子書節要≫를 간행하였다.315) 또 舒川의 鳴谷書院이 선조 14년에≪標題句解孔子家語≫를 간행하였다.316)
이렇듯 서원은 경제적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여 서적 간행이 부진하였다. 그리고 판각의 기법도 아주 조잡한 편이어서 인쇄된 간본을 보면 깨끗하지 못하여 책의 품위가 아주 떨어지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