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세종대에 창제된 향악곡
향악곡의 창제는 기보법의 창안이나 아악부흥처럼 세종대에 이루어진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였다. 향악에 대한 세종의 음악관523)이 “우리 나라의 음악이 비록 다 잘 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중국음악에 비해서 부끄러울 것이 없다”라는 말에 드러나 있는데, 향악곡의 창제는 그러한 맥락의 결실이었다. 세종 때 만들어진 향악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鳳來儀와 용비어천가이고, 다른 하나는 定大業과 保太平이다.
≪세종실록≫권 140∼145에 전하는 봉래의는 前引子·進口號·與民樂·致和平·醉豊亨·後引子·退口號 등 일곱곡으로 구성된 방대한 악곡으로서, 정재연주 때처럼 관현반주에 맞추어 춤과 노래로 공연되는 종합공연예술의 일종이었다. 전인자는 전주곡에 해당하는 기악곡이고, 후인자는 후주곡의 기악곡이며, 진구호와 퇴구호는 정재를 추는 여기들이 관현반주 없이 부르는 일종의 노래였다. 여민락은≪용비어천가≫의 한문가사를 관현반주에 맞추어 부른 노래였고, 치화평과 취풍형은 용비어천가의 국한문가사를 관현반주에 맞추어 부른 노래였다.≪용비어천가≫는 조선왕조의 건국에 관한 사직의 내용을 읊은 125장의 서사시로, 세종 27년(1445)에 완성되었다.524) 1∼2장은 노래를 지은 연원을 담았고, 3∼8장은 태조 이성계의 조상에 대한 내용이며, 9∼89장은 태조의 무공과 문공을 찬양한 것이고, 90∼109장은 태종에 관한 치적을 읊었으며, 110∼125장은 후대의 왕들에게 경계할 일을 열거하였다.525)≪용비어천가≫의 가사는 순 한문으로 지은 것과 국한문으로 지은 두 가지였는데, 한문시는 여민락의 가사로 사용되었고, 국한문시는 치화평과 취풍형의 가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본래 회례의식에서 춤을 추는 文舞의 반주음악으로 창제된 정대업과 보태평은 세종 29년에 악보로 완성되었는데, 역대 조종의 공덕과 건국의 어려움을 담은 내용의 노래였다.526) 정대업과 보태평을 만든 이유는 수보록·몽금척·근천정·수명명 등의 기존 악가들이 태조 한 사람의 공덕만을 찬양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회례연에서 연주되었던 정대업과 보태평은 세조 때 약간 개작되어 종묘제례악으로 연주된 이후 현재까지 국립국악원에서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