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분청사기의 특징
분청사기는 器形과 粉粧施文의 결과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기형은 대부분 고려 말기 청자기형이 바탕이 되고 그 위에 풍만하고 율동적인 변형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동시대에 제작된 백자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梅甁의 경우 고려 말기에 비해 구연부가 외반되고 어깨의 곡선으로부터 시작하여 굽에 이르기까지 S자형의 심한 굴곡을 보이며, 대접은 구연이 외반된 것이 훨씬 더 커졌으며 분장문이 있는 경우 동체의 선이 비스듬히 거의 곧게 뻗어 올라가며 굽위의 동하부를 한번 수평으로 깍아내는 형태를 하고 있다. 扁甁의 경우 둥근 몸체의 양면을 두들겨서 편평하게 하며 처음부터 납작하게 만든 백자편병(분청사기에도 약간의 예는 있음)에 비하여 풍만한 느낌을 준다. 胎缸(태항아리)도 같은 15세기의 것 중에서 백자태항(대체로 후반기 것)은 훌쭉하게 높은데 비해 분청사기는 풍만하고 비례가 낮은 것이 보통이다.
분청사기의 문양은 蓮花·蓮瓣·牡丹·牡丹葉·草花·柳·魚·龍·波濤·忍冬·鳥·菊花·菊瓣·唐草 등이 큰 주류이며 그외에 蝶·梅花·雨點·如意頭·卍字·雷文 등이 있다. 또한 이들 문양들은 서로 조합되거나 단순화되며 자유롭게 변형하면서 다양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대부분은 고려시대 상감청자에 등장하였던 것이지만 고려 말기에 이르면서 一般器皿에 문양을 시문할 만한 여유가 없었음인지 이러한 문양들이 거의 잠적하였다가 조선시대에 되살아나서 새롭고 다양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 또는 그 밖의 어떤 고유한 신앙과 사상체계의 순박한 발현이며 일부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대담하게 소화한 경우도 있다. 분청사기는 조선적인 유교의 사회기반 위에서 성장하였지만 고려 이래의 불교와 여러 가지 다른 요소가 자유분방하게 조화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청사기는 施文하는 방법과 도구에 따라 다르며 施粉하는 방법에 따라 각 지방마다 독특한 특징를 나타내고 있다. 인화문의 경우 문양이 치밀하고 분장한 후에 표면을 잘 깎아내어 윤곽이 분명히 나타나며 담청색의 유약과 회색을 띠는 경질태토가 잘 어울려 신선미가 있는 것은 주로 영남지방에서 제작되며, 같은 인화문이지만 개체의 문양이 크고 印花文 자체가 소략하게 시문되거나 그 위에 얇게 분장하고 표면을 잘 긁어내지 않아서 표면이 백색으로 보이는 경우는 치밀함보다는 소략한 듯 대범하고 여유가 있으며 분명함보다는 자유분방함이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호남지방의 인화문이다.
영남지방에는 長興庫 등 다양한 官司銘과 함께 地方銘을 새겼으나 호남에는 오직 內贍寺와 光州의 옛이름인 茂珍內贍이 새겨진 외에 다른 지방명을 새긴 예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관사명도 인화문으로 찍어서 마치 문양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또 영남지방의 경우 귀얄문은 있지만 彫花文이나 剝地文과 같이 다양하고 대담하며 자유분방한 특징을 보이는 문양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데 비해 호남지방에는 박지·조화문 분청사기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 아마도 영남지방에서 대의명분과 명리를 내세우는 性理學이 크게 발전하고 있으며 불교에서도 敎宗勢가 강하였고, 호남에서는 전통적으로 禪宗이 깊이 뿌리를 내려 자유분방하며 활달한 것이 발전할 수 있지 않았나 한다.
분청사기의 시문기법이 중국의 磁州窯와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으나 분명히 양자를 비교해서 증명하기는 어렵다. 아직 北宋代 이후 자주요에 관한 연구가 미흡하고 자료가 불충분하여 분명히 알 수 없으나 분청사기의 인화·상감·귀얄·분장 등 기법과는 전혀 관련을 찾아볼 수 없으며 상호 문양이 유사해 보이는 박지·조화문과는 어떤 관련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만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