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분청사기의 발전과정
분청사기의 발생과 발전과정은 고려 말기의 상감청자와 조선초의 분청사기를 비교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연대를 알 수 있는 고려말의 청자 중에는<靑磁象嵌‘正陵’銘대접>과<靑磁象嵌‘寶源庫’銘梅甁>·<靑磁象嵌‘丁亥’銘접시, 대접>·<靑磁象嵌‘良醞’銘扁甁>·<靑磁象嵌‘司膳’銘접시>·<靑磁象嵌‘乙酉司醞署’銘梅甁>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14세기 중엽으로부터 14세기말에 이르는 것이나, 아직까지 분청사기의 면모를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일부 소략한 印花施文만이 분청사기와 공통점이다.
초기 분청사기 중에서 연대를 알 수 있는 것 중에는 ‘恭安府(1402∼1420년)’·‘敬承府(1402∼1418년)’ 등 조선초에 잠시 설치되었다가 폐지된 관청의 이름이 새겨진 대접과 접시 등이 있다. 이들을 비교해 보면 인화문이라는 공통점은 있으나 유약·태토 등이 밝아지고 인화문이 훨씬 조밀하여진 것을 알 수 있어서 초기 분청사기의 양상을 살필 수 있다.
상감문의 경우 貞昭公主墓 출토의<粉靑沙器象嵌草花文胎壺>(1412∼1424)와 墓誌로 추정되는<‘正統五年’銘象嵌蓮魚文大盤>(1440)이 있으며, 박지문과 鐵畵文은 세종 12년(1430)이 下限이라고 추정되는 高峯和尙舍利塔 출토의<粉靑剝地鐵彩蓮魚文骨壺>가 있고,<粉靑 ‘成化十四年’銘귀얄문항>(1478)·<粉靑‘成化二十三年’銘鐵畵墓誌片>(1487) 등이 있어서 인화문과 상감문이 조선 초기부터 같이 발전하였으며 곧 이어 박지문이 발전하고 그 뒤에 귀얄·철화문 등이 차례로 발전하여 대체로 15세기 중기에는 모든 시문기법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분청사기는 귀얄과 분장이 많아지면서 문양보다는 백토분장 위주로 되다가 점차 태토와 유약이 白磁化되어 갔다. 경기도 楊州郡 別內面 靑鶴里窯址에는 유약과 태토가 분청사기와 흡사하나 백자에 더 가깝고 문양은 분청사기 인화문과 똑같은 파편이 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山田萬吉郞이 소개한 전라남도 咸平郡 大東面 鄕校里에서 발견된<‘萬曆十五年’銘墓誌>(1587)와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청학리요지의 자료는 각각 분청사기의 특징이 조금 남아 있으나 이미 백자화된 것이다. 태토도 거의 백자에 가깝고 인화문과 銘文은 있으나 백토시분은 하지 않은 상태로 기형과 문양만이 분청사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분청사기가 백자화되는 단계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이것이 마지막 계기가 되어 분청사기는 완전히 백자에 흡수되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