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청자
朝鮮靑磁는 바로 고려청자로부터 점점 변형하면서 발전된 것으로, 초기에는 고려청자에서 바로 계승되는 양식으로 태토빚음눈과 인화시문을 주로 하였다. 접시·대접 등 小形器皿을 주로 생산하는 가마에서 분청사기상감문도 있어서 서로 분명히 구분하기 어려운 복잡한 양상을 이루고 있지만, 이러한 초기적 양상은 세종 때가 되면 청자만을 생산하던 가마가 거의 사라지고 분청사기와 백자에 흡수되었으며 오히려 백자가마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청자를 생산하게 되었다.
조선과 고려시대와의 확연한 차이는 전국적으로 제작지가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고려청자요지는 대체로 서해안지방과 남해안 중에서도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있으며 그외 지방에는 극히 드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경기·충청·전라·경상도 등 한반도 남부 방방곡곡에서 거의 균형있게 발전하며, 황해·강원·평안·함경도까지도 고려 때보다는 훨씬 많은 가마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전국 방방곡곡의 자기소·도기소가 324개소에 달하고 있으며, 이는 고려시대보다 도자기의 수요가 격증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초기부터 백자가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화시문과 태토빚음눈을 주로 한 조그마한 기명을 생산하는 청자가마가 일시나마 전국에 확산되었다. 그 중에서 고려청자와 거의 흡사한 청자가마도 상당수 있었다고 생각되며 이러한 가마들은 분청사기와 백자가마에 흡수되면서 세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청자의 진면목은 백자가마에서 생산된 청자이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 계통의 청자를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과도기적 청자는<靑磁象嵌柳蓮文‘德泉庫’銘梅甁>에서 그 초기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다. ‘덕천고’는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나 태종 3년(1403)에 ‘內贍寺’로 개칭되었으므로, 이 병의 제작시기는 고려말이나 조선 건국초로 볼 수 있다. 형태나 문양 등으로 보아 고려말보다는 조선 건국초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즉 구연이 외반되고 어깨부터 굽에 이르기까지 매병의 곡선이 ‘S’자형으로 굴곡져 있으며 하부의 芭蕉文은 조선에 들어와 비로소 문양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문양이 시문되며 문양구성도 고려말의 구성보다는 짜임새가 있다. 이보다는 조금 발전되었으나 고려청자상감의 여운이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沙籠介’·‘籠介’, 또는<‘崔元’銘靑磁象嵌梅甁>이 있고,<‘德泉’銘梅甁>보다 유태가 훨씬 발전한 양질의 조선청자로는<‘宣德十年’銘靑磁象嵌墓誌>가 있다. 이는 珠聯形과 長方形의 2종류가 있으며, 전자는 안팎에 흑상감으로 후자는 안팎에 흑·백상감으로 誌文을 나타내었는데,<‘덕천’명매병>보다 유태가 훨씬 세련되었으며 장방형 묘지의 주련은 상감으로 연속된 卍字文을, 주련형 묘지의 양 측면에는 양각의 15세기에 전형적인 연속 卍자문을 나타내고 있다. 전주지방에서 번조되었다고 생각되는 이 묘지는 유태와 주련 문양, 특히 주련의 형태 등이 상당한 세련을 보여 조선청자가 세종 때에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 밖에 세종 때 것으로<‘선덕10년’명묘지>와 거의 같은 시기이나 조금 뒤늦게 제작된 3개의 묘지가 있다. 하나는 ‘全羅道觀察使曺沆之墓’라고 전후에 똑같이 백상감으로 지문을 나타낸 장방형 묘지이며, 다음은 ‘正統六年’銘이 있는 黑象嵌墓誌이며, 세번째는 ‘景泰元年’銘이 있는 靑磁象嵌墓誌이다.
‘덕천’명 등도 분청사기 상감문과 흡사한 면이 있지만 유태가 청자의 특징을 보다 강하게 지니고 있다. 첫째와 둘째 것에는 아무 문양이 없고 지문만을 상감으로 나타내었으나 셋째 것의 측면에는 15세기의 특징있는 卍자문을 역시 백상감으로 나타내었다. 유태는 첫째와 둘째 것은 태토가 靑灰色이며 유약도 청색이 짙은데, 셋째 것은 유태가 양자보다 밝으나<‘선덕10년’명묘지>만큼 세련되지는 않았고,<‘덕천’명매병>보다는 발전하였으며 字體나 문양이 조선적인 활달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의 편년자료로 청자상감이 세종 때에 조선적으로 변모·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그 이후의 편년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편년자료 이외에 일반 청자기명 중에도 양식적으로 15세기 후반경까지 시대가 내려갈 만한 것을 볼 수 없었으므로 고려청자와 직결되는 조선청자는 15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청자들은 기형이 거의 대부분 고려청자에서 조금씩 변형된 것이며 문양도 연화문·버들문 등 청자말기의 문양에서 변모하였으며 분청사기상감문과 공통점이 있다.
둘째로 백자가마에서 생산되는 청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자태토와 같은 회색태토 위에 청자유를 시유한 전형적 청자이고, 다른 하나는 백자태토 위에 청자유를 시유한 異格靑磁로 白胎靑釉磁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유약에 기포가 많아서 유색은 짙은 편이나 밝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고 기형과 문양은 청자나 분청사기보다 판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대체의 흐름만을 경기도 광주 중앙관요에서 생산된 청자를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세종 때부터 백자가마에서 번조한 청자는 일반청자와 백태청자의 두 종류가 있으며 문양은 음각·압출양각·반양각·상감수법으로 운문·국판문·조문·당초문 등을 나타내었다. 문양소재는 고려적인 것도 약간 섞여 있으나 원말명초 중국자기의 문양과 흡사한 것이 있고 기형도 초기백자와 같은 것이 대부분이다. 유태는 일반청자보다도 훨씬 밝아졌으며 특히 백태청자는 백자태토 위에 고운 청자유가 시문되어 신선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道馬峙가마에서는 백자·청화백자·청자·청자상감·분청사기 등 다양한 사기가 발견되었으며, 청화백자는 명나라 초기의 것과 같은 것도 발견되었으나, 일단 명나라 초기 청화의 번안단계를 지나 희화적인 구성이 조선적으로 변모한 청화백자라고 생각한다. 청화백자의 시험파편도 두 개 발견되어 세조 때에 土靑으로 청화백자를 번조하려던≪조선왕조실록≫의 기사736)와 일치하는 시기의 가마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청자도 역시 일반청자와 백태청자의 두 종류가 있으며 백태청자 중에는 표면에 白磁釉를 내면에는 靑磁釉를 시유한 예도 있다.
문양은 역시 음각·반양각·투각이 있으나 수는 극히 적다. 상감도 수는 극히 적으나 문양은 당초문·매국화·연판문이 있고 인화시문이 많으며 상감이 시문된 기형은 고려 때부터 있던 향로형식이었다.
이상이 15세기 중엽 무렵까지 조선청자의 양상이었으며 이러한 양상은 대체로 15세기 후반 무렵까지 지속되나 점차 분청사기와 상감청자에서 문양이 사라진 상태였다. 16세기 무렵으로 생각되는 가마는 백자기명 밑에 유약을 긁어내어 ‘左’·‘右’의 음각명문이 있는 파편을 반출하는 가마가 있다. 이들 가마에서는 素文의 백태청자만이 발견되나 태토는 반드시 순백의 양질태토에 한하지 않고 중품이나 하품 백자태토에 청자유를 시유한 것이 많다.
17세기에 들어서면 굽 밑에 역시 유약을 긁어내어 음각으로 ‘좌’·‘우’명과 함께 干支와 숫자를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굽밑의 음각명은 17세기 후반 1670년 무렵까지 지속되며 이들 가마에서는 모두 청자를 반출한다. 또 청자를 반출하는 가마로 지금까지 조사된 것은 1650년대까지이므로 대체로 17세기 중엽까지는 청자가 계속 번조된 것이 틀림없다. 문헌상으로는 “司饔院沙器는 大殿은 백자를 사용하고 東宮은 청자를 사용하며 內資·內贍·禮賓寺의 소용은 舊例에 의하여 靑紅阿里畵를 사용하라”737)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때까지 청자가 궁중에서 사용되었던 것 같다. 17세기 중엽까지 백자가마에서 번조된 청자는 역시 백태청자로 17세기에 들어서 일반백자의 질이 하락되어가던 것과 마찬가지로 15세기나 16세기 청자 중 양질의 청자에는 미치지 못하는 조질의 청자가 생산되었으며, 특히 중엽의 것은 유약에 황색이나 암록 또는 갈색을 머금은 것이 많으며 기형은 완전히 백자와 같고 문양은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