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분청사기의 종류
가) 분청사기 인화문
印花文은 灰色胎土에 도장같이 만든 施文道具로 크고 작은 문양판을 찍는 것으로, 큰 문양은 개별적으로, 작은 문양은 집단으로, 기면 전체에 조밀하게 시문하고 그 위에 백토를 분장하면서 메꾸어 넣은 후 긁어내어 결국 상감과 같은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인화문 분청사기에는 官司銘과 燔造地方의 이름이 표시된 것이 상당량 있다. 요컨대 태종 17년(1417)에 호조에서는 長興庫와 司饔房에서 시행하는 貢納砂器와 木器에 관한 폐단의 시정을 上啓하고 이어 장흥고·공안부의 砂·木器에 차후부터는 ‘長興庫’ 세자를 새기고 기타 각 司에 봉납하는 사·목기에도 장흥고의 예와 같이 각기 司號를 새겨서 조작 상납할 것을 상계하였고, 왕의 윤허를 받아 시행케 되었다.735) 이로써 태종 17년 이후에 상납된 사기에는 각 관사의 이름이 기명에 새겨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발견된 관사명은 恭安府·敬承府·仁壽府·德寧府·사선서·長興庫·內贍寺·內資寺·禮賓寺 등이 있으며, 지방명으로는 慶州·慶山·密陽·金山·茂長·永川·星州·梁山·彦陽·禮安·蔚山·蔚珍·晋州·昌原·陜川·三嘉·鎭海·淸道·咸安·軍威·高靈·宜寧·善山·金海·昆南·義興·海州·三陟·光(光州) 등이 있다.
조선초(태조∼세조)에 존폐했었던 관사인 공안·경승·덕녕·인수부의 銘文이 들어 있는 器皿과<‘正統三年’銘胎誌>(1438)와 함께 출토된<粉靑沙器‘長興庫’銘印花文대접>등에서 인화문 분청사기의 발생·세련 과정을 대접류를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말 청자상감은 태토·유약이 거칠고 기형과 굽이 둔탁하고 문양은 내외기면 중 대체로 한 면에만 소략하게 몇 개의 커다란 인화시문을 하거나 몇 가닥의 線象嵌이 있을 뿐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종대까지는 이러한 상감청자에서 釉胎가 조금 밝아지고 대접의 경우 구연이 외반된 기형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제일보를 내딛었으나 크게 변모되지 않았다. 태종대까지는 분청사기의 면모를 많이 드러내어 유태가 훨씬 밝아지고 시문이 보다 조밀해졌으나 일정한 곳에만 여러 가지 문양대가 한꺼번에 설정되어서 여백이 많다. 또한 외면에는 아주 소략한 시문만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卍字文이나 如意頭·蓮瓣文이 등장하며 인화문은 개체의 크고 작은 菊花瓣이 주가 되어 연판문·여의두문·蝶文 등이 있다.
우선<‘敬承府’銘접시>는 태종 18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나 문양면으로는 거의 완성된 분청사기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예이다. 세종 원년(1419)에서 19년 사이에 존재하였던 ‘昆南郡’이라는 銘이 있는<‘昆南郡長興庫’銘접시>는<‘경승부’명접시>보다 조금 뒤의 작품이나 세련도는 이 접시와 거의 같다.<‘정통3년’명태지>와 함께 출토된<‘長興庫’銘대접>에서 보면 태종대보다 훨씬 발전하였다. 주문양인 국화판은 조금 작아졌으나 작은 것에 섞여 큰 화판이 있고 개체 하나하나가 인화시문되면서도 아직 여백이 남아 있다. 세종말이나 문종·단종 때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彦陽仁壽府’銘대접>과, 세조 2년(1456) 무렵에 만들어진<‘德寧府’銘대접>을 보면 세종·단종 때까지 인화문의 완성을 보았으며 세조대에 전면이 인화문으로 꽉 채워지고 표면의 백토분장이 훨씬 많아져서 문양이 가장 세련된 상태였다고 생각된다. 이 때에 여의두문은 사라지고 卍자문도 작아지며 주문양인 국화판이 개체가 아닌 무리진 문양으로 되었다. 즉 아주 작아진 국화판 하나하나를 길게 묶어서 한꺼번에 3∼4개에서 10개, 15개의 국화판 시문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국화판이 원권형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따라서 국화판 자체도 여백이 없으며 기면 내외 각 문양대 사이의 여백은 거의 없고 질서정연한 문양대가 따로따로 설정되었다.
문양구성은 내면 구연에 당초문대, 넓은 측사면에 주문양인 群集菊花瓣文帶, 내저주연에 연판문대가 설정되고 내저에는 주위에 나비문과 그 안에 국화판문이 있다. 외면에는 구연에 당초문대, 넓은 측사면에는 주문양인 集團菊花瓣文帶, 제일 밑인 굽 위 주변에는 연판문대가 설정되는 것이 통례이며 굽에도 국화판이나 卍자문이 인화시문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상태는 세조 3년에서 10년 사이에 제작된 ‘三嘉仁壽府’·‘軍威仁壽府’銘대접에서 살필 수 있다. 세조 때 가장 세련된 인화문의 상태는 대접류 외에도<‘天順六年’銘胎誌>와 함께 발견된<粉靑沙器印花文胎缸>이나 성종 8년(1477) 이전에 번조되었다고 생각되는 光州 無等山의 忠孝洞窯址에서 발견되는 세련된 한 무리의 분청사기 인화문 기명들에 의해서도 이러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청자에 가까운 자료로, 태종 4년(1404)에 사망한 崔雲海公墓 출토의<靑磁象嵌印花文鍾子>가 있다. 誌石이 없어 안장한 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문양이나 인화시문이 세련된 상태여서 지방과 가마에 따라 어떤 것은 급속도로 세련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된다.
인화문은 지방에 따라 혹은 가마에 따라 시대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경기도에서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대체로 세조·성종 이후 인화시문과 귀얄시문이 병용·병행되었다. 또는 인화시문과 상감·박지·조화시문이 병용되면서 또 다른 면에서의 세련을 보이다가 점차 귀얄시문이 많아지며 시분하지 않고 인화시문만 된 것이 그 말기적인 상태라고 생각된다. 16세기에 이르면 인화시문 방법도 달라져서 인화도 아주 얕게 하여 개체의 형태가 분명하지 않다. 국화판은 거의 圓圈으로 바뀌고 낮게 인화시문한 후에 귀얄로 시분하고 시분을 긁어내지 않은 채 그대로 두어 인화와 귀얄문이 동시에 병용된다. 인화시문된 문양도 세조·성종 때의 구성과 종류에서 변질되어 각 문양대 간의 분명한 구획이 없어지고 당초·연판·국화판·접문 등이 그 형태를 고수하려 하지 않고 그것이 波狀의 雨點으로, 승렴문으로 혹은 渦文으로 흡수되어 귀얄시문과 대체로 병용된다.
각 지방의 특색은 전체가 획일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경상도의 인화문에서는 시문이 조밀하고 기면이 매끄러우며 인화에 백토감입이 분명하여 어떤 규범과 질서를 추구하는 듯한 느낌이 있다. 이러한 인화문의 예는 ‘金山長興庫’·‘金山長興庫執用’ 등 명문이 있는 추풍령 남쪽 金泉에서 발견되는 것과 軍威·慶州·彦陽 등지에서 발견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호남지방에도 인화문 요지는 많이 있으나 광주 무등산요 중에서 15세기 중엽이라고 추정되는 영남식의 매끈하고 정연한 인화문이 있는 외에는 거의 인화시문이 조밀하지 않고 인화시문된 개체가 집단화되거나 약간 커다란 개체의 문양형태가 서로 어울려 춤을 추듯 자유분방하게 어우러지는 경우가 많다.
충청도와 경기지방은 영·호남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영남지방의 인화문과 흡사하나 영남과 같이 조밀하고 정치한 세련미는 모자란다. 인화문 분청가마는 영·호남, 충청·경기가 비슷하다고 생각되는데 관사명과 함께 지방명을 새겨 넣은 것 중 거의 전부가 경상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영남 이외에 호남·호서에서도 관사명이 있는 요지는 많이 발견된다. 특히 호남에서는 ‘內贍’銘이 많고 ‘禮賓’銘도 발견되고 있으며 충청도 계룡산에서는 인화와 귀얄이 병용된 器面에 鐵砂로 ‘禮賓’·‘內資寺’ 등의 문자를 쓴 것은 있지만 지방명을 쓴 예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분명한 지방명이나 관사명 이외에 지방명의 약칭이거나 관사명의 약칭 또는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명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河河·段皿(殷皿)·公·黃·羅·鳴·寶·司·山·禮戒·長·直指·禾·壬申(干支)·供字·供·李 등이 있고, 그 밖에 광주 무등산 충효동요지에서는 성종 8년(1477) 무렵에 제작된 거친 분청사기에 상감으로 光·光公·光別·光二·光上·公이라는 명문이 나타나므로, 이것은 지방관요의 일종으로 보인다. 그 밖에 나타나는 문자는, 仁·丁四·丁四一·丁三公·別丁三·丁閏二(1477년)·山別·金·奉·山未·月·田·禾才·中·貴一·鄭·萬·朴主·李井·龍小分·冀山·毛·豆·內孝·李萬·春·金·成金·朴·金一·羅·朴夫·申奉·朴文·得夫·金山·閑生·金水·朴德只·金禾中·金生·李生·崔·徐·德生·閑生·永水 등이 있다.
나) 분청사기 상감문
象嵌文은 고려말 청자상감과 직결되는 것이며 조선청자상감과 시원을 같이 하므로 조선초에는 물론이고 시대가 약간 내려와도 구분이 애매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기형과 태토·유약·문양 등에서 분청사기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상감문은 인화문과 병용되는 경우가 많다. 인화문대접이나 접시의 경우 구연의 당초문대는 모두 상감기법이고 관사명도 刀刻하여 상감으로 나타내는 예가 많으며 기타 甁·壺·獐本·扁甁에도 인화문과 혼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성립과 발전과정은 인화문과 거의 같은 시대로 잡을 수 있다.
한 예로<‘恭安’銘대접>은 내면에 흑백상감으로 蓮唐草文을 나타내고 외면에는 卍字文帶를 거칠게 나타내고 있으며 문양은 기면에 비해 고려청자상감보다는 많아졌으나 고려말에는 느낄 수 없는 활력이 있다. 이보다 앞서서 제작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으로<靑磁象嵌‘義成庫’銘梅甁>이 있으며, 고려 말의 매병의 형태에서 형태와 유태가 변모해서 분청사기의 특질을 잘 나타내고 있다.
관사명을 새기는 규정은 태종 17년(1417)에 상납하는 器皿에 刻銘케 하기 이전인 12세기 전반에도 있었다. ‘尙藥局’銘을 새긴 靑磁盒이나 ‘燒錢色’·‘巡馬’ 등 관사명 등이 많이 남아 있으며 12세기 말기에도 ‘宴禮色’·‘乙酉司醞署’·‘良醞’·‘司膳’ 등의 관사명을 새긴 예가 남아 있다. 특히 ‘司醞署’·‘양온’ 등은 매병의 肩胴部에 있는 명문으로 앞의<청자상감‘의성고’명매병>과 새겨진 위치가 같아서 태종 17년 이전에도 甁類의 견동부에는 관사명을 각명하는 예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貞昭公主墓 출토의<粉靑沙器四耳缸>은 하한이 세종 6년(1424)이며 분청사기의 면모를 이미 완전하게 지닌 상태이다. 구연 바로 밑인 어깨에 卍자문대가 있고 굽다리 위인 하부에 연판문대가 있으며 넓은 몸체 전면을 상감과 인화문을 곁들인 초화문을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문양으로 채웠다. 회색태토에 담청색의 유약이 시유되고 광택이 있으나 이미 거의 전형적인 분청사기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이 항아리보다 약간 시대가 뒤지는<‘正統五年’銘象嵌蓮魚文大盤>은 내면 주연으로부터 넓은 면에 흑색상감으로 誌文을 상감하고 내저에 연어문을 상감하였고 연화문은 모란과도 닮았는데 線象嵌이 아닌 面象嵌法으로 나타내었다. 태토에는 철분이 많고 유약은 청색이 좀 짙은 靑磁釉와 흡사한 상태이나 문양과 상감기법 등에 조선시대적인 분청사기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광주시 충효동요지에서도 인화문 외에 상당히 세련된 상감문이 출토되었다. 상감문은 주로 祭器에 있는데 표면에 뇌문과 파상문 같은 문양을 상감한 것 등이 있으며 유태와 문양 등이 극히 세련된 상태여서 15세기 중엽에는 상감문이 더욱 세련된 상태였음을 보여 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이상 몇 가지 예의 상감분청을 통하여 이미 조선 초기에 어느 정도 면모를 갖춘 상감문이 있었고,<‘정통5년’명상감연어문대반>을 통하여 이미 세종 20년 무렵에는 선상감 이외에 면상감이 상당히 세련을 보이고 있으며 금곡리가마 출토품에서 보는 것과 같이 15세기 중엽에 더욱 세련된 모습을 나타내었음을 알 수 있다. 인화문이나 상감문의 경우 분청사기의 세련은 문양으로 인하여 가능한 표면이 거의 백색으로 화장되었으면서 유태가 정선되고 기면에 개체의 문양과 각 문양대 간의 구성이 세련되고 높은 조화를 이루었을 때가 그 정점에 이른 때이다.
상감문도 인화문과 마찬가지로 15세기 중엽을 정점으로 하여 점차 인화문이나 귀얄문 등과 병용되는 경우가 늘어나서 문양으로서의 특색보다는 분장효과로서의 문양으로 변하여 가고 있었다. 앞서 말한 세종 20년 무렵의 면상감 예는 15세기 중엽경이라고 추정되는 기명에 그 수효가 많으며 문양이 선에서 면으로 바뀐 것도 백색으로 이행되는 추이에 의해서 발생한 문양이라 생각된다.
단종 2년(1454)에 죽은 溫寧君의 묘에서 항아리 2개와 접시 2개가<塗銀靑銅匙箸>와 같이 발견되었다. 항아리나 접시의 태토가 조금 거칠지만 분청사기라기보다 백자태토에 가깝고 渦圈文·雨點文·蓮瓣·波狀文을 일부에 아주 얇게 시문하고 그 위에 아주 흐리고 얇은 백토분장을 하여 상세히 살피지 않고는 백자인지 분청사기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접시의 형태로 보아 고려말에서 변형된 모습이 아직 남아 있지만, 15세기 중엽 분청사기의 특질을 발휘하여 세련된 시기에 더욱이 王家에서 이러한 종류를 부장품으로 넣은 것으로 보아 서울 근교(北漢山 기슭)의 어떤 가마에서 번조된 지방적 특색을 지닌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 분청사기 박지·조화·귀얄·분장문
剝地文이나 彫花文은 귀얄로 시분하는 것이 기본이 되기 때문에 박지·조화문과 귀얄문과의 성립·발전의 선후를 따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초기에는, 귀얄시문은 문양을 나타내기 위한 배경으로 더 많이 이용되었으며 점차로 귀얄시문만을 한 예도 늘어나서 粉粧文과 함께 표면이 백색으로 이행되어 가는 끝 마무리를 하였다고 생각된다.
귀얄문이나 분장문이 발생 당시부터 완벽하게 백토화장에만 충실하지 않았던 것은 처음에는 대세가 청자에서 백자로 서서히 이행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종다양한 문양이 생겨난 것은 조선 전기 문화가 주관을 지니고 주변문화를 과감하고 다양하게 흡수하여 실용적이면서 활력에 넘치고 융통성있게 새로운 창조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지와 조화문 분청 중에 연대가 분명한 자료는 극히 드물지만 松廣寺의 高峯和尙浮屠에서 발견되었던<粉靑剝地鐵畵舍利壺>가 있다. 고봉화상은 세종 10년(1428)에 입적해서 동왕 11년에 부도가 세워졌다고 하므로 이 사리항아리의 하한은 세종 12년이 될 것이다. 이 항아리는 舍利塔, 즉 浮屠 보수시에 잠깐 꺼냈다가 사진만 찍고 다시 納塔하였으므로 지금 사진만 남아 있어 확실한 상태를 알 수 없으나 대단히 세련된 박지기법의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백토분장, 즉 백색으로 표현된 문양과 문양 간의 間地인 여백은 흑색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문양과 간지의 대조를 더욱 선명히 하기 위하여 거기에 鐵彩를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주문양의 능숙한 선과 호방하고 대담한 표현은 물론이며 주문양의 상하인 어깨부분과 저부에 연판문을 배치하는 등 문양대의 구성 또한 원숙한 단계에 이르고 있어서 이미 세종 12년 훨씬 이전에 박지문은 상당히 세련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광주 무등산 충효동요지에서는 박지문·조화문 분청사기의 여러 가지 다양한 문양파편이 발견되었다. 유태가 정선되었으며 모란문·연화문 등이 다양하고 자유분방하게 변형되어 기면을 장식하고 있다. 이 외에 분명한 편년자료는 아니지만 15세기 중엽 무렵이라고 생각되는 박지문·조화문 중에서 자유분방하고 활달·대담하면서 문양으로 세련되고 유태가 정선된 기명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박지문·조화문은 세종 초기에 이미 상당히 세련되어 있었으며 15세기 중엽에 이를수록 문양이 더욱 활달·분방한 자유로운 변형을 이룩하고 유태도 대단히 精緻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 이후에는 특별한 발전이나 세련이 있었다기보다는 유태가 더욱 정치하여졌으며 문양이 자유로운 변형을 하여 마치 현대의 추상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었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에 이르면 점차 문양이 단조로워지고 결국 귀얄분청의 수효가 늘어나고 분장이 성행하면서 표면이 백자와 같이 되어 갔으며 태토가 백자태토로 이행이 되면 구태여 백토분장이 필요없게 되었을 것이다.
박지·조화·귀얄·분장문도 지방적인 특색이 있으며 또 지방에 따라 그 가마의 수효에도 약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귀얄분청사기는 전라·경상·충청·경기도에 모두 분포되어 있으나, 분장문과 박지·조화문은 주로 전라도와 충청도에 있으며 특히 전라도에 더욱 많이 편중되어 있다. 그 질과 문양의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세련은 다른 곳에서는 호남지방의 분청에 미치지 못한다.
경기지방에서 발견되는 귀얄분청은 저질의 회흑 또는 갈색태토에 얕게 음각이나 인화로 시문하고 또 위에 시분하고는 다시 긁어내지 않은 상태의 것이 대부분이다. 서울 근교 우이동에서 牛耳嶺을 넘어 五峯 밑에 있는 분청사기가마에서 출토되는 기형은 고려말과 아주 흡사한 접시·종지·대접 등 소품들이며, 태토는 회색이고 농도가 얕은 백토물에 담가서 시분하는 소위 분장문으로 그 위에 담청색의 유약을 시유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고려말의 타락한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옮겨지는 과정에는 여러 지방에서 거의 공통적인 방법이 채택되었으나 일부에서 특이한 방법이 초기에 일정 기간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라) 분청사기 철화문
鐵畵文은 회흑색의 저질 태토 위에 반드시 귀얄로 백토분장을 하고 그 위에 철화로 자유분방한 문양을 빠른 운필로 나타내고 얇게 시유하였으며 대체로 산화와 중성염번조로 표면에 담황이나 담갈색을 머금은 예가 많다. 이러한 분청사기 철화문은 충청남도 公州郡 反浦面 鶴峯里·花山里 등 鷄龍山麓 東鶴寺 계곡에서 번조되어 ‘鷄龍山粉靑’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였다.
물론 이 일대의 가마에서는 철화문분청사기 외에도 인화문·상감문·귀얄문 등과 또 이러한 기법을 병용한 것 등 여러 가지의 분청사기가 번조되었으며 백자도 번조되었다. 단지 철화문만은 다른 곳에서 번조한 예가 없었기 때문에 특히 이러한 명칭이 붙게된 것이다.
계룡산요지에서는 인화문과 상감문 등도 있어서 15세기 전반부터 開窯하였다고 생각되지만 철화문은 대체로 15세기 후반에 세련되어 16세기까지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철화문의 경우는 일반 기명에 편년자료가 될만한 것이 없고 학봉리요지 조사 때에 출토된 것과 그 외에 몇 개의 鐵畵誌石片이 있을 뿐이다. 철화지석에는 ‘成化二十三年’(성종 18;1487)·‘弘治三年’(성종 21;1490)·‘嘉靖十五年’(중종 31;1536)銘 파편이 있어, 적어도 여기에 표시된 연대 이후의 것이 틀림없으며 이와 유사한 것으로 역시 성종 이후라고 생각되는 ‘天子之’銘·‘宜寧郡’銘 墓誌 등이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보다 앞서는 편년자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철화문은 인화·상감문보다는 조금 늦게 세련되어 16세기까지 계속 번조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문이 있는 편년자료는 아니지만 기형의 변화에서 연대의 차이를 생각 할 수 있다. 분청사기는 청자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따른 조선적인 변형은 있으나 고려청자의 기형과 흡사한 것이 많으며 동시대 조선백자와는 기형이 다르다. 특히 매병은 고려청자에서 이어진 것이며 분청사기에는 많으나 조선백자에는 매병의 형태가 없다. 매병은 분청사기에서도 상감문에 가장 많고 박지·상감·인화 병용에도 그 예가 약간씩 있으나 철화문과 귀얄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편병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편평하게 만든 것과 둥근 형태를 만들고 내면을 두드려 약간 편평하게 만든 두 가지의 경우가 있는데, 후자의 형태를 지닌 편병의 예를 백자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분청사기에서는 박지·조화문류에 가장 많고 상감·인화문에도 그 예가 있으나 철화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매병이나 이런 편병 종류는 15세기에 성행하고 16세기에 들어서면 점차 그 형태가 사라진다. 甁(玉壺春甁의 형태)은 백자나 분청사기에도 공통적 형태로 모든 분청사기에 다 있는 형태이다. 그러나 인화문·상감문의 경우에는 병의 아래 부위가 풍만하여 무게중심이 아래에 있으나 철화문의 경우에는 가운데의 동체가 풍만한 경우가 많아서 인화나 상감문병보다는 무게중심이 약간 위로 올라가고 있다. 백자의 경우에는 15∼16세기의 병이 아래 부위가 풍만하며 16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17세기에 들어서면 점차 동체가 풍만해져서 무게중심이 위로 올라간다. 이러한 병의 형태에서 철화문과 17세기 백자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형태의 문제는 아니지만 자유분방한 분청사기 철화문과 17세기 백자 철화문과는 문양의 소재는 다르지만 자유분방한 표현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항들은 철화문이 다른 분청사기류보다 조금 늦게 세련되어 그 세련이 16세기 무렵까지 지속되었던 한 요인으로 생각된다. 계룡산에서 번조되는 분청사기 철화문이 인근의 燕岐郡에서도 발견되어 거기에 가마가 있었으리라는 설이 있으나 아직 분명치 않으며 막연히 호남지방에도 그러한 가마가 있다고 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또 계룡산 철화와 다른 분청사기 철화문이 있다. 계룡산 철화문은 陶質로 그 질이 조잡하고 철분이 많이 섞인 회흑색·흑갈색 태토 위에 반드시 귀얄로 시분하였으며 시분할 때 기명의 하부는 그대로 남겨 놓은 경우가 많다. 태토가 계룡산 철화문보다는 질이 조잡하지 않아서 색이 회색이며 시분은 귀얄시문이 아닌 백토물에 담그는 소위 덤벙, 또는 담금분장문(粉引)이며 철화의 발색도 그렇게 진하지 않고 철화의 소재도 비교적 간결한 초화문으로 筆線도 가늘어서 계룡산 철화문과는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분장문이 전라남도에 가장 많고 전라북도에도 있는데 충청남도에는 定山에 요지가 있을 뿐 그 이외의 곳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므로, 이 가마는 전라도 지방이라고 생각되며 甁·碗의 기형으로 봐서 16∼17세기에 걸치는 시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735) | ≪太宗實錄≫권 33, 태종 17년 4월 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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