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왕희지체의 전통
東晋時代 왕희지의 書法은 唐·宋 이후 혁신적 서가들이 다수 출현하는 속에서도 이상적 서법으로 끊임없이 존숭되었다. 더욱이 원나라 문예계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조맹부가 晋·唐으로의 복귀를 주창함에 따라 王法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우리 나라에서도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이래 지속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송설체와 함께 서풍의 형성에 중요한 바탕을 이루었다.
세종이 국가문서의 書寫를 담당하는 承文院 관원들의 글씨가 바르지 않다고 하여 晋字를 따르도록 하였다거나, 문종이≪歷代帝王名賢集古帖≫·≪王羲之眞行草三體≫·≪趙子昻眞草千字≫등 안평대군이 진상한 판본을 校書館에 模印하도록 하였다거나, 세조가 왕희지와 조맹부의 서첩을 대군과 대신들에게 보이면서 法帖을 널리 배포할 것을 논의했다거나, 성종이 친필의<蘭亭記>를 大內에서 刻印하였으며 왕희지의≪十七帖≫을 모인하게 하였다는 등의 기록은835) 송설체가 유행하였던 시기에도 왕희지체에 대한 관심이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초기 체제정비의 일환으로 현실적으로는 고려나 명의 제도를 참고하면서 그 근원이 되는 고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연구하였던 점과 상통할 것이다. 더욱이 송설체를 따른 서가에 대해 鍾繇·왕희지를 따랐다거나 왕희지·조맹부를 겸하였다고 평한 기록들은, 고전적 서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나타낸 사례이다. 이후 16세기에 들어가 古法으로 복귀하려는 분위기가 성숙되면서 왕희지체는 그 이상적 목표가 되었으며 점차 서예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835) | ≪世宗實錄≫권 68, 세종 17년 4월 기유. ≪文宗實錄≫권 4, 문종 즉위년 11월 경술. ≪世祖實錄≫권 8, 세조 3년 7월 정묘. ≪成宗實錄≫권 161, 성종 14년 12월 임신. ≪國朝人物考≫中, 韓亨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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