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Ⅰ. 임진왜란4. 왜란중의 사회상2) 송유진·이몽학 등의 난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1. 왜란 전의 정세
          • 1) 교린정책과 왜변
          • 2) 일본의 국내정세
          • 3) 조선의 국내정세와 군사준비 실태
        • 2. 왜란의 발발과 경과
          • 1) 왜란의 발발
          • 2) 의병의 봉기
          • 3) 수군의 승첩
            • (1) 임란 전의 해방체제와 전라좌수군
            • (2) 초기 해전의 승첩과 전과
            • (3) 조선 수군의 승리 요인
          • 4) 명군의 참전과 전세의 변화
            • (1) 참전의 배경
            • (2) 제1차 평양성전투와 그 영향
          • 5) 조·명군의 반격과 전국의 추이
            • (1) 조선 관·의병의 활약
            • (2) 명군의 평양승첩과 전후의 행동
        • 3.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 1) 강화회담의 진행과 결렬
            • (1) 평양수복 전 조·명과 일본의 교섭
            • (2) 평양수복 후 명과 일본의 교섭
          • 3) 정유재란의 발발
            • (1) 조선의 일본재침에 대한 대비
            • (2) 일본의 재침
          • 3) 조·명군의 활약
            • (1) 조·명군의 활동상
            • (2) 조선 수군의 활약
            • (3) 조·명군의 추격전
          • 4) 일본군의 패퇴
            • (1) 조·명연합군의 반격전
            • (2) 조·명연합군의 4로 총공격
            • (3) 일본군의 패퇴
          • 5) 일본의 통교요청과 기유약조
            • (1) 일본의 통교요청
            • (2) 기유약조
        • 4. 왜란중의 사회상
          • 1) 군량미 조달과 농민의 실상
            • (1) 난초의 양식실태
            • (2) 명군 내원 이후의 군량조달
            • (3) 민중의 실상
          • 2) 송유진·이몽학 등의 난
            • (1) 송유진의 난
            • (2) 이몽학의 난
            • (3) 기타 민간반란
            • (4) 반란의 성격
          • 3) 항왜와 부왜·부로
            • (1) 항왜
            • (2) 부왜·부로
        • 5. 왜군 격퇴의 전략·전술
          • 1) 육전
            • (1) 관군의 군령·군사지휘권
            • (2) 전란초의 방어체제
            • (3) 관방설치와 청야책
            • (4) 의병의 지휘권과 전략·전술
            • (5) 훈련도감의 신설과 신병법
          • 2) 해전
            • (1) 해전의 전개
            • (2) 수군의 전승요인
      • Ⅱ. 정묘·병자호란
        • 1. 호란 전의 정세
          • 1) 후금의 흥기와 조선의 대응
          • 2) 숭명정책과 중립 양단외교
        • 2. 정묘호란
          • 1) 후금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 2) 강화 성립
          • 3) 의병의 활약
        • 3. 병자호란
          • 1) 재침 전의 조·만관계
            • (1) 정묘화약에 대한 양국의 시각
            • (2) 모문룡과 동강진문제
            • (3) 범월쇄환의 시비
            • (4) 개시와 양국간의 마찰
            • (5) 후금의 압력과 조선의 태도
          • 2) 청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 3) 남한산성 수어와 화전양론
          • 4) 의병의 봉기
            • (1) 호남의병
            • (2) 다른 지역의 의병
          • 5) 강화 실함과 남한산성
            • (1) 강화 실함
            • (2) 인조의 남한출성
          • 6) 전후처리와 조·청관계
            • (1) 전후처리문제
            • (2) 반청의식의 고조
            • (3) 피로인 쇄환문제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이몽학의 난

 임진왜란 이후 흉년이 계속되다가 선조 28년(1595) 풍년으로 아사상태에 있던 민중을 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의 수혜는 지배계층의 수탈의 소지를 제공하였다. 당시 중앙정부는 강화를 둘러싸고 남인·북인·서인의 3파전이 치열하였으며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하여 각처에서 산성을 수축하는 등 민중의 부담이 가중하여 민중의 원망과 괴로움은 현실여건과 타협할 수 없는 사회모순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불안한 기회를 이용하여 반란을 획책한 것이 李夢鶴이었다.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킬 즈음에 민중의 동태를 趙慶男은 “이 때에 인민들은 난리를 겪어 곤핍한데도 백방으로 침탈을 당하여 한번 속여서 미혹시키는 말을 듣고 따르는 자가 몰려와서 며칠이 채 안되서 1만여 명에 이르렀다”181)고 기록하고 있다. 운집한 군중들은 당연히 중앙정부를 전복하려는 반란세력에 호응하게 되었다. 농민들은 마음이 끌려 그들이 지나가면 논밭에서 김을 매다 호미를 들고 환성을 올렸다고 하며, 행상들은 몸둥이를 들고 즐겨 날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182)

 이몽학은 반란을 일으키기 얼마 전부터 募粟官 韓絢 등과 함께 鴻山에 있는 無量寺에서 모의를 하고 조련을 실시하였으며‘同甲契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친목회를 가장한 반란세력 규합에 열중하였다. 한현은 先鋒將 權仁龍·金時約 등과 함께 어사 李時發 휘하에 있으면서 호서지방의 조련을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민심이 떠나 있고 방비가 없음을 알아채고 이몽학과 함께 때를 틈타 모사할 것을 꾀했다. 이 때 한현은 부친의 상을 당하여 洪州로 내려가면서 먼저 이몽학에게 거병하도록 하고 자기는 內浦로부터 상응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실은 이몽학의 거사에 대한 성패만을 관망했다. 이몽학은 金慶昌·李龜·張後載·승려 凌雲·私奴 彭從 등과 함께 홍산 雙防築에 주둔하였으며 僧俗軍이 1천여 명에 가까웠다.

 선조 28년(1595) 7월 6일 이몽학 일당은 야음을 틈타 홍산현을 습격하여 현감 尹英賢을 사로잡고 곧 이어 林川郡을 습격하여 군수 朴振國을 납치하였다. 윤영현과 박진국은 반란세력에 투항하여 한편이 되었고 이몽학은 이들을 큰 손님으로 접대하는 한편으로 인신을 넘겨 받아 이를 활용하여 무기를 빼내고 두 고을 사람들을 협박하고 가담케 하여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다음날 이몽학 일당은 定山縣을 함락하였고 현감 鄭大卿은 겨우 몸만 빠져 탈출하였다. 8일에는 靑陽縣을 함락하니 현감 尹承緖가 도주하였고, 9일에 大興郡을 함락하자 군수 李質粹는 산중으로 숨어들어 적정을 중앙에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고을이 연달아 무너지고 수령들이 모두 패하여 반적에게 降附하거나 도주하니 관원과 백성들은 반적에게 복종하여 그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扶餘현감 許守謙은 반군이 경내에 침범하기도 전에 겁에 질려 수하인이 무기를 반적의 진영으로 운반하는 것을 보고도 감히 처단하지 못하고 반군이 이르자 문서를 보여주었다. 瑞山군수 李忠吉은 아우 세 명을 逆黨에게 몰래 부역케 하여 왕래하며 도와주었다고 하니 이러한 형세를 간파한 이몽학은 대흥을 함락한 같은 날에 홍주를 침범하였다.

 홍주목사 洪可臣은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본 고을 官屬인 李希·申壽 두 사람이 거짓으로 적에 투항하고 홍주성이 견고하니 곧바로 공세를 취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공격을 늦추게 하였다. 그리 고 성안의 허실을 조사하여 보고하겠다고 속이고 다시 성안에 들어가서 적정을 목사에게 알려주었다. 반란군들은 늦게까지 이희·신수의 회보가 오지 않자 그제서야 그들의 흉계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 동안 홍가신은 수성의 완비를 기하게 되었고, 본 고을에 사는 무장 朴名賢·林得義도 성안으로 들어오는 등 많은 무사들이 모여들었다. 체찰사종사관 辛景行은 내포에 이르러 변이 있음을 듣고 이웃 고을 수령들에게 전령하여 구원을 요청하였고, 충청 수사 崔湖 또한 군사를 이끌고 당도하여 홍주성의 수비태세는 완전히 갖추어 졌다.

 박명현은 무사들을 내보내어 반란군의 선봉대를 습격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반란군은 물러가지 않고 홍주성 2, 3리까지 이르러 각 진에 1천여 명씩 5진으로 편성하여 성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저녁이 되자 반란군의 장수 몇 명이 말을 타고 성 아래로 와서 “天運이 이와 같거늘 어찌하여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서 호응하지 않는가”라고 외치기도 하였다. 밤이 되어 성중에서 화포와 火箭을 반군을 향해 퍼붓자 동문 밖 민가가 불에 타서 화광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 때를 기하여 충청병사 李時言은 온양에서 곧바로 홍주로 향하여 禮山 無限山城에 이르렀고, 어사 이시발은 維鳩에 포진하고 중군 李侃은 청양에 포진하여 군세를 크게 떨치면서 홍주로 향하려고 하였다. 이에 이몽학은 홍주성을 함락시킬 수 없음을 알고 “한현이 오게 되면 목사를 참수하여 그 머리를 기에 매달아 놓겠다”고 외치면서 11일 새벽에 무리를 이끌고 德山을 향하여 달아났으며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박명현은 이 틈을 타서 성안에 있는 병졸을 이끌고 청양까지 추격했고, 최호 등 모든 장수들이 군졸을 이끌고 적진 아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全州判官牙兵 尹誡는 때를 엿보다가 부하 군졸을 이끌고 밤중에 적 속에 뛰어들어 총통을 연발하면서 도원수와 전라감사 및 忠勇將 金德齡 등의 병마가 이 곳에 이르렀으므로 날이 밝으면 사살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반란군의 두목을 참수하여 그 머리를 가지고 오는 자는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외쳤다. 그리하여 반란군중은 이몽학이 홍주성에서 퇴각할 때 김덕령·洪季男이 중앙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도성으로 곧바로 향하고 있다고 흰소리한 말을 믿지 않게 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반란두목을 살해하기 위해 앞을 다투어 이몽학의 군막으로 난입하였다. 이들 중 김경창·林億命·太斤 등 3인이 먼저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 헌납하였으며 난민들은 일시에 흩어졌다.

 이 때 한현은 반란군 수천 명을 이끌고 홍주에 주둔했으나 이시언과 홍가신 등의 진군으로 반민들이 패주함에 따라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앞서 피살된 이몽학은 머리와 수족이 잘려 서울로 압송되어 철물전 길가에서 梟示되었다가, 3일이 지난 다음 사방을 돌아가면서 효시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추국을 받고 승복한 뒤 처형된 자가 33명이나 되었으며, 외방에서 처형된 자가 1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모두에게 緣坐律을 적용하려 하였으나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 때문에 외방자에 한해서는 정황을 확실히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제외시켰다. 연좌율에 적용되어 희생된 경우는 한현의 아들 毅然이 교수형을 받았으며 이몽학과 한현의 친인척들이 각처로 유배되었고 이몽학의 홍산가옥이 破家瀦宅당했고 홍산현도 혁파되었다.

 이리하여 반란주도자의 처리는 일단락되었으나 반란주모자의 搜見文書나 심문과정에서 의병장들의 이름이 오르내려 조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즉 이몽학을 복주할 때 그의 문서 속에 김·최·홍씨 성이 발견되었고, 한현은 결박당한 뒤 도원수가 묻는 말에 김덕령·崔聃齡·흥계남이 공모했고 또 郭再祐·高彦伯은 모두 나의 심복이라고 대답했다.183) 이로 인하여 이들은 각기 서울로 붙잡혀 와서 곤혹을 치렀으나 대부분 “왕이 다 죄를 묻지 않겠다”하여 풀려났다. 그러나 김덕령과 최담령은 끝내 석방되지 못하고 옥에 갇혀 추국을 받았다. 김덕령은 옥에 갇힌 지 20여 일간 6차의 국문을 받다가 승복하지 않고 마침내 杖殺당했다. 얼마 후 최담령도 수차 국문을 당하고 불복하다가 옥사했다. 김덕령에 대해서는 후대에 신원되어 모든 죄상이 벗겨지고 陞階하여 追諡까지 받았으나 지나친 반민의 색출은 민가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추국이 끝난 다음 이몽학 토평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포상이 있었다. 이몽학을 참수한 임억명·김경창은 嘉善에 特陞되고 후에 김경창은 임억명보다 공이 낮다 하여 通政으로 강등했다. 태근에게는 특별히 6품 실직을 제수하였고 반란군이 홍주성을 침입했을 때 적의 침입을 지연시킨 이희·신수에게도 6품실직을 주었다.

 한편 朝臣 가운데 공을 세운 이시언과 최호를 가선에, 이시발·홍가신을 각각 등정으로 승계했다. 박명현에게는 포상을 내리지 않다가 廷臣들의 연이은 간청으로 후에 가선을 승계했다. 또한 추국을 담당한 관원에게도 가자와 상품이 사급되었다. 그 후 이몽학난 토평에 따른 封功문제는 수차에 걸쳐서 논의되다가 선조 37년(1604)에 3공신(扈聖·宣武·淸難) 祿封결정에 따른 교서가 반포되어 이몽학난의 토평공신인 淸難功臣 1등에 홍가신, 2등에 박명현·최호, 3등에 신경행·임득의 등이 결정되어 이에 따른 승계와 은전이 내렸고,184) 다음해에 청난원종공신을 녹봉했는데 은전을 받은 사람은 臨海君 이하 수천 명에 달했다.185)

181) 趙慶男,≪亂中雜錄≫권 2, 갑오 7월.
182) 위와 같음.
183) 趙慶男,≪亂中雜錄≫권 2, 병신 7월.
184)≪宣祖實錄≫권 180, 선조 37년 10월 을해.
185) 藤井誠一,<李夢鶴の亂について>(≪靑丘學叢≫22, 1935), 159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