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Ⅰ. 임진왜란1. 왜란 전의 정세
    • 01권 한국사의 전개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08권 삼국의 문화
    • 09권 통일신라
    • 10권 발해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1. 왜란 전의 정세
          • 1) 교린정책과 왜변
          • 2) 일본의 국내정세
          • 3) 조선의 국내정세와 군사준비 실태
        • 2. 왜란의 발발과 경과
          • 1) 왜란의 발발
          • 2) 의병의 봉기
          • 3) 수군의 승첩
            • (1) 임란 전의 해방체제와 전라좌수군
            • (2) 초기 해전의 승첩과 전과
            • (3) 조선 수군의 승리 요인
          • 4) 명군의 참전과 전세의 변화
            • (1) 참전의 배경
            • (2) 제1차 평양성전투와 그 영향
          • 5) 조·명군의 반격과 전국의 추이
            • (1) 조선 관·의병의 활약
            • (2) 명군의 평양승첩과 전후의 행동
        • 3.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 1) 강화회담의 진행과 결렬
            • (1) 평양수복 전 조·명과 일본의 교섭
              • 가. 조선과 일본의 접촉
              • 나. 명과 일본의 교섭
            • (2) 평양수복 후 명과 일본의 교섭
              • 가. 명과 일본의 교섭추이
              • 나. 조선의 대응과 경략부와의 갈등
              • 다. 명 경략부의 조선설득
              • 라. 조선의 근수사 지연과 회담결렬
          • 3) 정유재란의 발발
            • (1) 조선의 일본재침에 대한 대비
            • (2) 일본의 재침
          • 3) 조·명군의 활약
            • (1) 조·명군의 활동상
            • (2) 조선 수군의 활약
            • (3) 조·명군의 추격전
          • 4) 일본군의 패퇴
            • (1) 조·명연합군의 반격전
            • (2) 조·명연합군의 4로 총공격
            • (3) 일본군의 패퇴
          • 5) 일본의 통교요청과 기유약조
            • (1) 일본의 통교요청
            • (2) 기유약조
        • 4. 왜란중의 사회상
          • 1) 군량미 조달과 농민의 실상
            • (1) 난초의 양식실태
            • (2) 명군 내원 이후의 군량조달
              • 가. 명나라 군량의 운반
              • 나. 군량미의 국내조달
              • 다. 군량의 부족과 전투력의 저하
            • (3) 민중의 실상
          • 2) 송유진·이몽학 등의 난
            • (1) 송유진의 난
            • (2) 이몽학의 난
            • (3) 기타 민간반란
              • 가. 옥과·순창의 반란사건
              • 나. 두 왕자 납치사건
              • 다. 김희·강대수·고파 등의 반란사건
            • (4) 반란의 성격
          • 3) 항왜와 부왜·부로
            • (1) 항왜
              • 가. 왜군의 투항동기
              • 나. 항왜의 유치와 분치
            • (2) 부왜·부로
              • 가. 부왜의 실태
              • 나. 부로의 납왜와 실상
        • 5. 왜군 격퇴의 전략·전술
          • 1) 육전
            • (1) 관군의 군령·군사지휘권
            • (2) 전란초의 방어체제
            • (3) 관방설치와 청야책
            • (4) 의병의 지휘권과 전략·전술
            • (5) 훈련도감의 신설과 신병법
              • 가. 조련 및 화약·무기의 제조
              • 나. 신병법의 수용
          • 2) 해전
            • (1) 해전의 전개
              • 가. 1차 침입기의 해전
              • 나. 강화회담기의 해전
              • 다. 2차 침입기의 해전
            • (2) 수군의 전승요인
      • Ⅱ. 정묘·병자호란
        • 1. 호란 전의 정세
          • 1) 후금의 흥기와 조선의 대응
          • 2) 숭명정책과 중립 양단외교
        • 2. 정묘호란
          • 1) 후금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 2) 강화 성립
          • 3) 의병의 활약
        • 3. 병자호란
          • 1) 재침 전의 조·만관계
            • (1) 정묘화약에 대한 양국의 시각
            • (2) 모문룡과 동강진문제
            • (3) 범월쇄환의 시비
            • (4) 개시와 양국간의 마찰
            • (5) 후금의 압력과 조선의 태도
          • 2) 청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 3) 남한산성 수어와 화전양론
          • 4) 의병의 봉기
            • (1) 호남의병
            • (2) 다른 지역의 의병
          • 5) 강화 실함과 남한산성
            • (1) 강화 실함
            • (2) 인조의 남한출성
          • 6) 전후처리와 조·청관계
            • (1) 전후처리문제
            • (2) 반청의식의 고조
            • (3) 피로인 쇄환문제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42권 대한제국
    • 43권 국권회복운동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46권 신문화운동 Ⅱ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Ⅰ. 임진왜란

1. 왜란 전의 정세

1) 교린정책과 왜변

 조선왕조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은 事大와 交隣이었다. 사대정책은 명과의 관계였고, 교린정책은 왜·여진·유구와의 관계였다. 이 중 일본과의 교린정책은 조선왕조가 주로 倭寇를 막기 위한 회유와 견제를 기본으로 하는 羈縻정책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은 경계는 하였지만 일본이 적극적으로 교섭하여 오지 않는 한 외교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는 소극적인 외교를 하였다. 즉 조선은 일본의 침략이나 외교적 요청이 없는 한 그들의 국내정세를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알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외교정책의 기본방침은 조선초 태종대에 熊川 개항과 세종 때 三浦 개항 이래 三浦倭亂 후 임진왜란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양국의 외교관계는 주로 對馬島主 宗氏를 중계로 하여 전개되어 조선이 종씨에게 歲遣米를 하사하고 무역에 특혜를 인정하였고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를 교린이라 하여도 上國으로서 자처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왜구의 약탈은 고려말 조선초에 이르러 점차 진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왜구의 위협은 상존하였고 조선 초기 이후에도 간헐적인 왜구의 침공이 있었다. 왜구의 소굴은 농산물의 소출이 거의 없는 척박한 땅으로 이루어진 대마도였으나 이외에 五島열도·구주지방 등지에도 왜구의 근거지가 있었다. 이러한 왜구에 대하여 태종은 상왕이 된 후 강경책과 온건책을 함께 구사하여 세종 원년(1419) 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케 하여 왜구의 근거지를 소탕하게 하는 한편 乃而浦·富山浦·鹽浦 등 3포를 열고 倭館을 두며 1년에 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하고 圖書(통행증) 소지자만의 왕래, 체류일수의 제한 등을 내용으로 한 癸亥約條(세종 25년;1443)를 체결하여 대마도주의 제한적인 무역을 허락하는 회유책을 폈다. 이로써 대마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왜구의 세력을 어느 정도 제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강·온 양면정책은 중종 5년(1510) 4월에 이르러 3포에 거주하는 왜인들이 일으킨 삼포왜란으로 인해 파탄에 접어들게 되었다. 왜인들은 釜山僉使 李友曾을 죽이고 薺浦를 점령하여 첨사 金世鈞을 납치하였으며, 웅천성을 포위하여 성 밑의 인가를 분탕하는 등 3포의 군민을 도륙하고 가옥을 분탕하였다. 대마도주가 부산포·제포·巨濟 등지에 분견한 병선은 수백 척으로 왜세는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곧 관군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조선조정은 삼포를 폐쇄하고 왜인과의 교통을 단절하였다. 대마도는 이로 인해 물자의 곤란을 받게 되자 일본정부를 통하여 국교 재개를 요청하였다. 일본의 室町(足利)幕府에서는 日本國王使 弸中을 2차에 걸쳐 조선에 파견하여 강화를 시도하였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찬·부의 양론이 있었으나 야인으로 인한 북방의 긴장고조, 왜구의 재발 가능성과 약재 수입들의 필요에 따른 실리적인 강화론이 우세하여 중종 7년 8월에 이르러 壬申約條를 맺게 되었다. 조선은 강화의 전제조건으로 삼포왜란의 주모자를 처단하여 수급을 보내고, 조선측의 포로를 송환하며, 盛親이 직접 와서 사죄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이 중 첫째 조건은 약조를 체결한 후에 이루어졌고, 셋째 조건인 성친의 親來陳謝는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둘째 조건이 해결되어 임신약조가 체결되었다. 이를 살펴보면 세견선을 종전의 50척에서 25척으로, 歲賜米豆를 2백 석에서 1백 석으로 각각 반감하고, 特送船制를 폐지하며, 삼포 중에 단지 제포만을 개항한다는 것이었다.

 이 임신약조는 왜인에 대하여 삼포왜란 전보다 더 많은 제약과 구속을 가한 것으로 왜란에 대한 징계와 제한의 성격을 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식량과 생필품의 부족으로 인한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었고, 중종 36년 제포에서 대마도 왜인과 관병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기에 이르자 이것을 문제로 삼아 제포에 거류하는 대마도 왜인 전부를 방출하고 왜관을 부산포로 옮겼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일본정부에서는 거듭 사신을 보내 복구를 요청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는데 그 내용을≪朝鮮王朝實錄≫을 토대로 하여 도표화하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일 시 왜 선 규 모 침 입 장 소
중종 17년 6월 丙戌 12척 전라도 新達梁
6월 乙丑 10∼15척 전라도 草島·甫吉島·楸子島
18년 5월 癸巳 1척 전라도 草島
5월 丙申 1척 황해도 豊川
20년 9월 戊寅 4척 전라도 世尊巖
36년 6월 壬午 1척 경상도 薺浦 근처
39년 4월 乙酉 20여 척 경상도 蛇梁鎭
명종 7년 5월 辛亥 1척 제주도 旌義縣 川尾浦
8년 6월 丁亥 1척 제주도, 전라도 珍島
9년 6월 丁丑

2척

1척
제주도

전라도 甫吉島
10년 5월 己酉 70여 척 전라도 達梁浦
11년 6월 戊子 1척 경상도 蔚山
6월 辛丑 5척 제주도 濟州·旌義·大靜
7월 甲子

1척

1척
전라좌도 三島

전라우도 靑藤島
7월 辛未 12척 제주도
7월 癸酉 1척 전라도 甫吉島·作只島
12년 6월 壬寅 2척 청홍도 泰安
7월 乙卯

2척

2척
전라도 舒川

    辛山浦
7월 戊午 1척 전라도 草島
14년 5월 丁酉 1척 청홍도 藍浦
6월 丙午 다수 전라도 仇助島·三島·安馬島, 제주도 등지

<표 1>중종·명종대 倭船의 출몰 상황

 왜구의 침입 중 크게 문제시된 것은 중종 17·18년(1522·1523)의 침입, 蛇 梁倭變(중종 39), 乙卯倭變(명종 10;1555)등을 들 수 있다. 10년 내지 20년의 간격을 두고 대거 침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간에 일본은 중국 등지로부터 화약과 병기의 제조기술을 습득하고, 견고한 선박을 건조함으로써 점차 강성 해져 갔던 것이다. 이에 대해 사량왜변 후 조선은 일본국왕사 이외의 왜인의 입국을 거절하는 강경책을 썼다.

 명종 10년에 발생한 을묘왜변은 삼포왜란보다 피해가 심각하였다. 5월에 서 6월 사이에 왜선 70여 척이 전라도 해남 達梁浦에 침입하여 전라병사 元 績과 장흥부사 韓薀을 살해하고 영암까지 침입하는 등 연해를 횡행하며 약탈과 살륙을 자행하였다. 이 왜변으로 놀란 조정에서는 왜구의 침략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지만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찾지 못했다. 다만 당시 영의정 沈連源이 왜구의 군사력을 평가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조선기술을 배워 왜선이 견고해지고 銃筒을 쓰는 법도 지극히 정교하여 왜세가 삼포왜란 때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성해져서 조선의 병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고 지적하여 왜구의 강성함만을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001) 그러므로 삼포왜란 때처럼 왜선을 제압하지 못하고 회유책을 사용하여 동년 10월 대마도주에게 세견선 5척을 증가시켜 주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그러나 완전한 수습은 이루어지지 않아 그 후에도 당분간 왜침은 계속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날로 강성해져 가는 일본에 대한 대비책으로 새로운 전선의 건조를 시도하여 임진왜란 중에 큰 활약을 한 板屋船이 등장하게 되었고 대형의 총통과 승자총통 등 화기의 개발에도 주력하였다.002) 그러나 일본 내부에서 실정막부가 붕괴되고 각지의 봉건영주가 할거하는 전국시대에 돌입하게 되자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일본을 통일할 때까지 약 30년간 일본과의 정식외교는 일체 단절되었고 武備에는 소홀해졌으며 일본의 국내사정을 모르는 채 소강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001)≪明宗實錄≫권 18, 명종 10년 5월 기유.
002) 金在瑾,≪朝鮮王朝軍船硏究≫(一潮閣, 1977), 67∼73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