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항왜의 유치와 분치
가) 항왜의 유치
난중에 항왜 誘致를 둘러싼 朝野의 격론이 일게 된 것은 왜란이 일어난 다음해부터였다. 그 이전은 왜군이 승세를 타고 대부분의 조선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던 만큼 왜군이 투항해 오는 일이 없었고 조선정부도 급박한 나머지 항왜 유치를 위해 政論을 일으킬 만한 여유도 갖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명나라 군대가 온 후 조·명군의 유리한 작전 수행은 적을 남쪽으로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화의의 진행으로 싸움이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피아간에 상대 진영의 내왕이 쉽게 되자 왜군들 가운데 이 틈을 이용하여 항왜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조선정부도 이에 따른 대책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왜군이 처음 투항해 온 곳은 조선진영이 아니고 명군진영이었다. 그것은 명군이 적진과 인접하고 있었던 관계도 있었겠으나 그것보다는 조선은 아직 항왜 수용을 위한 아무 대책이 없었고 적의 투항 자체를 불신하여 투항자를 무조건 살해하겠다는 것이 정론이었고, 반대로 명군진영에서는 항왜를 받아들여 후대하겠다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선조 26년(1593) 5월 明提督 李如松 군영 앞에는 몇백 명에 달하는 왜병이 투항해 왔는데, 조선진영에는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았던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항왜가 명군진영에 투항할 즈음 조선은 그들의 유치를 위한 대책을 세우기는 고사하고 항왜를 모두 살해할 것을 조야가 결의하여 이를 명측에 강경히 요구했다. 조선의 이러한 방침은 결국 명측의 항왜 유치를 둘러싼 두 나라의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199) 명나라에서는 관원을 보내 禮部咨文을 전달하고 降附者를 살해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조선은 계속 반대하는 입장으로 버티었다.
조선이 명나라의 항왜 유치를 반대한 이유는 항왜를 중국으로 이송할 경우 평양 서쪽의 조선지리와 중국의 關外의 일을 알게 되어 후환이 생길 것을 두려워한 데 있었다. 조선이 일본을 가리켜‘萬世必報之讎’니‘不共戴天之讎’니 하는 침략자에 대한 원한관계에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해 8월 이여송이 주력부대를 이끌고 요동으로 철수하고 다음해 봄에 吳惟 忠·駱尙志의 군대가 철수하고 또 8월 劉綎의 잔류병까지 철수하자 사실상 휴전상태가 되면서 조선정부는 항왜 유치를 꾀하게 되었다. 명나라의 항왜 유치에 대해 누구보다도 반대했던 선조가, 항왜 살해의 무익함을 강조하고 투항자에게 給糧은 물론 除職까지 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항왜를 많이 꾀어내는 자에게 논상하려고 한 것은,200) 방침을 바꿔 항왜를 역이용하자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며 선조 27년 이후 조선정부의 항왜 유치가 활발해져 항왜가 공을 세우기 전에 司勇·司正 등의 武職告身帖이 급여되었으며, 특수한 경우 당상 또는 가선의 교지까지 내려 왜군의 투항을 권장하였다.201)
조선정부가 항왜를 유치한다는 전언이 적진에 알려지자 많은 왜군들이 투항해왔으며, 이를 모두 수용하기 어려웠던 조선정부는 항왜 유치의 필연성을 인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항왜들 중에는 투항 후 자기들이 투항 전에 듣던 것과 처우가 다르다는 것을 내세워 행패를 부리는 자도 있어서 항왜 유치를 절제하게 되었다. 이 해 6월 이후부터 진실로 투항을 하겠다는 항왜를 제외하고 널리 유치할 필요가 없다는 항왜 유치 수정안이 나오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문신과 무신들간에는 항왜 유치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이 활발히 제기되었다. 경상우병사 金應瑞 등 남방 諸陣에 있던 무장들은 항왜 유치의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적극성을 보였으며 왕도 그들의 의견을 따랐는데 문신들은 항왜 유 치 자체를 반대하다가 왕의 강요에 못이겨 부득이 따르는 입장이었다. 문신들이 반대입장을 표명한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항왜가 자기 나라를 저버리고 내부한 것은 반드시 속이고 못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므로 언제 배반할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202) 이와 같이 찬반양론이 거론되면서 항왜 유치에 대해 통일을 기할 수 없었으며 많은 차질을 가져오게 되었다.
항왜 유치의 제한은 결국 종래 인원수 확보에서 질적인 면으로 치중하게 되어 기술이 있거나 유능한 항왜는 파격적인 무거운 상을 내리게 하였다. 그렇다고 기술이 없는 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다음해인 선조 28년(1595)에 특기가 없는 왜군이라도 진심으로 투항해 오는 자는 수용하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즈음 왜군은 떼를 지어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 적진에 밀파된 자에게 “적이 투항해 오는 데 50일 이상이 집단을 지어 한꺼번에 행동하면 처치하기 어렵게 되므로 투항이 누설될 우려도 있고 조선인민이 놀라 당혹할 염려도 있으니 날자를 정하여 10명을 전후해서 투항해 오면 곧 諸陣 이나 內邑에 分置하겠다고 투항자에게 말을 전하도록 하라”203)고 한 것을 보면 투항자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난중에 수용한 항왜의 수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당시 조선정부가 그것을 비밀로 부쳤기 때문이다. 그러나≪宣祖實錄≫이나≪宣祖修正實錄≫에 항왜의 성명이 밝혀진 자만도 40여 명이나 되고 항왜 이동과정에서 파악된 인원만도 거의 1,000명을 헤아릴 수 있으며,204) 왜란이 끝난 지 30여 년이 지난 인조 2년(1624) 李适의 난 때 地方赴防降倭로서 반란에 동원된 자가 130명이나 되었다는 것을 보면,205) 임진왜란 중에 유치한 항왜의 수는 몇 배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조선정부가 항왜를 유치하계 된 것은 “蠻夷로 하여금 蠻夷를 치게 한다”는 군사적 목적에서 後金 방어에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일간에 화의 진행이 실패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항왜의 유치는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 하였다.
나) 항왜의 분치
선조 27년(1594) 이전에 투항한 항왜는 경상도 내지인 豊基·榮州·安東·義城 등지에 읍당 7∼8명에서 15∼16명씩 배치하여 각 고을에서 접대케 하였다. 어려운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一日三食’을 제공하는 등 후대하였지만, 그들은 불만을 토하면서 서로 살생까지 일삼아서 그들이 진정으로 투항한 자들인지 의심케 하였고, 敵變이 재차 돌발할 경우‘내외에서 서로 호응하는 근심’을 염려하여 나누어 수용할 것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경도·강원도·충청도·황해도 등지 연변의 고을이나 도서지방에 옮겨 경작지를 나누어주어 식량을 해결토록 하고 출입을 막아 서로 호응하는 갑작스러운 변란을 막게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206)
그런데 항왜를 옮기는 것이 경상도 내지에 분치된 항왜 전반에 걸쳐서 단 행된 것은 아니었다. 남쪽에 설진한 장수들과 상의하여 쓸만한 항왜는 그대로 아군진영에 두고 그 밖의 항왜들만 우선 서울로 옮겨 각지로 분산 수용하였다. 이들 중 銃劒 주조의 기술을 가진 자나 검술에 능숙한 자 또는 熖硝煮取法을 해득한 자는 군직을 제수하여 서울에 유치하고 기술이 없는 자들만 내지 또는 평안·함경도 양계지방으로 옮겼다. 그러나 평안·함경도로 옮겨지는 항왜중에는 노골적으로 불평을 토로하는 자들이 있어 사정·사용 등의 하급 무직의 고신첩을 주어 무마작업을 꾀했으나 별로 효과를 얻지 못했다.
양계로 이송된 항왜 중에는 도망하는 자가 발생하였으며 또한 행패가 심하였다. 선조 27년 11월에 함경도에 분치된 항왜만도 100명을 넘어서게 되자 더 이상의 이송을 꺼리게 되었고 그 후 항왜들은 閑山島 舟師所在處로 이송하여 格軍으로 편입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이미 이해 9월부터 실시되고 있었지만, 이는 양계로 이치된 항왜의 폐단이 많아서 郡邑이 상처를 받고 피해가 컸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항왜를 이곳으로 이치한 내면에는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이 컸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단지 항왜의 분산으로 인한 작당의 위험성을 방지하는데 그쳤다.
그렇다고 항왜들 중에 조선을 위해 공헌한 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쪽 진영에 분치된 항왜들은 조선관군 못지 않게 적을 공격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 특히 정유재란 때 활약이 많았다. 재란이 발발한 그 해 8월 관군과 왜군의 접전이 있었을 때 항왜들은 자신의 상처를 돌보지 않고 선두에서 힘써 싸워 많은 적을 참수했다. 동년 9월 경상우병사 김응서 진중에 투항하여 김해부사 白士霖의 진영으로 이송된 沙白丘鳥는 위기에 처한 백사림을 구출하였다. 10월 達美縣에서의 싸움에서는 충청병사 李時言 휘하에 수용된 항왜들이 적진에 돌입하여 난사하였고 山祿古라는 항왜는 조선진영 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적군을 생포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11월에는 雲峰·山陰·三嘉 등지에서 적의 大軍과 격전이 있을 때도 항왜들이 활약했다.207) 항왜들이 전공을 세운 것은 경상우병사 金應端의 힘이 컸다.‘養虎貽患’이니‘養虎到處’라는 의심과 질타를 받으면서도 성심껏 항왜를 활용한 것이 효력을 나타낸 것이었다. 항왜들 중에는 전공으로 降倭僉知·降倭同知 등의 높은 품계를 받은 자도 상당수에 달했다.208)
또한 항왜들 중에 기술을 가진 자를 서울에 유치하면서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총검 등 무기제조와, 화약제조·검술교습에 종사시켰으며, 선전관 李榮白은 항왜들로 조직된 投順軍을 지휘하여 송유진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이용하기도 하였다.209)
난이 끝난 후 모든 항왜들은 본국으로 쇄환되지 않고 일정지역에서 분배된 전토를 경작하여 赴防의 의무를 지고 있었는데, 거주지역은 중부 이북으로 주로 양계지방이었다. 또한 남쪽에 분치되었던 항왜들도 난후 이 지역으로 옮겨 본국과의 연락을 못하고 서북변경 방어에 대비해야 하였다.
199) | 李章熙,<壬亂時 投降倭兵에 대하여>(≪韓國史硏究>6, 1971), 3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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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 ≪宣祖實錄≫권 50, 선조 27년 4월 을축. |
201) | ≪宣祖實錄≫권 54, 선조 27년 8월 신유. |
202) | ≪宣祖實錄≫권 82, 선조 29년 11월 기유. |
203) | ≪宣祖實錄≫권 54, 선조 27년 8월 신유. |
204) | 李章熙, 앞의 글(1971), 41쪽. |
205) | 李肯翊.≪燃藜室記述≫권 24, 故事本末 李适之變. |
206) | ≪宣祖實錄≫권 52, 선조 27년 6월 계해. |
207) | ≪宣祖實錄≫권 92, 선조 30년 9월 을미·권 93, 선조 30년 10월 기미 및 권 94, 선조 30년 11월 기유. |
208) | ≪宣祖實錄≫권 93, 선조 30년 10월 임신 및 권 94, 선조 30년 11월 기유. |
209) | 李章熙, 앞의 글(1971), 4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