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신병법의 수용
조선 관군의 조련문제는 훈련도감의 설치가 구체화되기 이전에 이미 명나라 장수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즉 南將 駱尙志는 조선 관군의 힘이 약한데 왜군이 아직도 조선 경내에 있으니 이 때 조선군을 훈련시키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유성룡에게 말하면서 명나라 군사가 회군하기 전에 기예를 배워 익히게 되면 수년 안에 정예를 만들어 왜군을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유성룡은 이러한 낙상지의 말을 행재소에 알리는 한편 禁軍 韓士立으로 하여금 장정 70여 명을 불러모으게 하여 낙상지에게 교련을 담당해 줄 것을 청했다. 이에 낙상지는 휘하의 張六三 등을 교사로 삼아 棍棒·籐牌·狼筅·長槍·鐺鈀·雙手刀 등의 기술을 익히게 했다.249)
그런데 新兵法에 의한 조련이 시행된 것은 훈련도감의 설치가 구체화된 선조 26년(1593) 10월 이후의 일이었다. 선조는 도감을 설치할 것을 명하고 윤두수에게 그 일을 맡겼다가 곧 유성룡으로 교체시켰다. 유성룡은 거석을 들고 담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를 도감에 들어오게 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천 명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며 이에 把摠·哨官을 두어 그들을 영솔하도록 하였다.250) 이들 도감군은 유성룡의 건의에 의해 기민구제·정병양성을 주안으로 하여 월 9말의 급료를 지급받는 동시에 戚繼光의≪紀效新書≫에 입각한 浙江兵法에 따라 편제되었다.
선조는 명나라 提督 李如松으로부터 왜군을 방어하는 데는≪기효신서≫에 의한 신병법을 활용하는 것이 상책이란 말을 듣고 은밀히 이여송의 휘하로부터 그 병서를 구입하여 유성룡에게 보였고 유성룡은 종사관 李時發 등에게 주어 토론하며 강론하고 해설케 하면서 유생 韓嶠를 낭관으로 삼아 의문나는 점은 명나라 장수에게 묻게 하고 三手鍊技의 방법을 가르치게 하였다.251)
≪기효신서≫의 근본정신은 “治衆如治寡”에 입각하고 分數束伍에 중점을 두어 종래 “多聚軍卒 則可以禦賊”이라 믿었던 대부대 편제에서 벗어나 부분연습의 소부대 단위로의 편제이다. 훈련도감은 그 대장을 都監堂上이라 하였고, 그 밑에 직접 군사지휘를 담당하는 中軍·千摠이 있었으며 그 밑에 司(把摠)-哨(哨官)-旗(旗摠)-隊(隊長)-伍로 연결되어 있있다. 그러나 뒤에 기구가 확대 개편됨에 따라 의정이 겸하는 部提調 1員, 병조판서와 호조판서가 겸하는 提調를 중심으로 대장(종2품)·중군 1명(정3품), 별장 1명(정3품), 천총 2명(정3품), 局別將 3명(종3품), 파총 6명(종4품), 종사관 4명(종6품), 초관 34명 (종9품)으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있었다.252)
도감군은 束伍法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속오군은 양반·공사천을 가리지 않고 능력이 있는 장정을 망라했으며 지방군사체제인 진관제에다 속오법을 절충한 것이었다. 즉 진관단위의 營·司인 진관체제의 타탕 위에 哨·旗·隊의 속오법을 절충하여 종래 진관체제나 제승방략의 모순을 극복하고 왜군을 퇴치하는데 진력투구하자는 것이었다.253)
그런데 임란 때 招討使로서 延安大捷의 공을 세운 李廷馣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재차 초토사가 되어 또 연안성을 지키면서 남정 1천 4백 명을 뽑아 척계광의≪기효신서≫守哨法에 의거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것을 보면254) 신병법이 이미 널리 보급되었던 것 같다.
훈련도감은 처음에는 법적인 뒷받침을 받은 군영이 아닌 權設衙門으로 설치되었다. 그리고 도감군은 처음부터 砲·殺·射의 三手法으로 편제된 것이 아니었다.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鳥銃훈련이 가장 시급했기 때문에 먼저 砲手가 설치되었고 그뒤 의용대를 殺手로 편입하고 다시 수문장 등 활을 잘 쏘는 사람을 射手로 편입시켜 三手兵으로서의 편제를 갖추게 되었다. 三手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포수였으며, 삼수병의 체제를 완비한 것은 대체로 선조 27년(1594) 이후의 일로 생각된다.
도감군에게는 월 9두의 급료 외에 試才·鍊才 등에 의한 論賞 및 衣資, 赴防者에 대한 妻料 등이 지급되었다. 육조에서는 둔전을 널리 열어 그 수입으로 재원을 마련하였으나255) 항구적인 재정대책이 없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李章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