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궁방전의 실태
그러면 궁방전의 면적을 알아보자. 17세기초인 인조초만 하더라도 궁방의 면세결은 모두 수백 결 정도였다고 한다.0887) 그 뒤 차츰 늘어나서 불과 20년정도 뒤인 효종초에는 한 궁가에 200∼500결 정도까지 늘어났다.0888) 그러다가 현종초에 이르면 한 궁가의 면세결만 하더라도 1,400결을 넘어서고 있었다.0889)
궁방은 지역적으로도 전국 각지에 걸쳐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경기·황해도가 많았다. 특히 황해도는 교통과 운반이 편리하고 토지가 비옥한데다가 蘆田·海澤地가 많아서 일찍부터 궁방에서 장토를 설치하여 궁방전이 집중되어 있었다. 17세기 중엽 황해도 平山 陰村房에서 내수사는 70리에 달하는 토지를 절수하였다.0890) 또한 이 당시 황해도에 각 궁방과 아문의 둔전 수가 130개라고 하고 장토를 설치한 곳이 92곳이나 된다고 하였으며, 특히 信川과 같이 작은 읍에도 궁방의 둔이 12곳이나 되었다고 한다.0891)
또한 궁방전은 거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강원도 淮陽에 설치된 金貴人房의 둔전은 길이와 너비가 40리라고 하였다.0892) 일개 궁방으로서 그 규모가 매우 클뿐더러 이러한 궁방전의 형태로 인하여 근처의 민전이 침탈당하기 쉬웠다.
궁방전의 전체 규모를 18세기 기록을 통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0893)
먼저 정조 즉위년(1776)부터 19세기초까지 호조에 파악된 궁방전 면세결수는 약 33,444결에서 37,500결에 이르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전국 총 토지면적의 약 2.5%정도였으며, 국가에서 세를 받아들이는 토지에 비해서는 약 4∼5%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면세결수였으며 출세결수까지 포함한 자료는 정조 11년(1787)에 작성된≪內需司及各宮房田畓摠結與奴婢摠口都案≫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無土免稅 21,603결 56부 9속, 有土免稅 8,249결 98부 4속, 그리고 出稅田畓 6,352결 83부 8속 등 모두 36,206결 39부 1속이었다. 그런데 이 자료에는 빠진 궁방이 있어서 이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度支志≫를 통하여 살펴보면 약 3,963결 정도였으므로 이를 합하면 모두 40,735결 정도였다.
이 가운데 용동궁·어의궁·명례궁·수진궁 등 4궁과 私親宮의 합이 22,515결로 절반이 넘었다. 그런데≪속대전≫에 의하면 大王私親宮 500결(재위기간은 1천 결), 4궁은 각 1천 결로 나와있는데(<호전>제전조)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이는≪속대전≫에 구궁·신궁을 물론하고 王牌가 있어서 특별히 사여하는 것은 정액에 관계없다는 조목을 적용한 것이다.
여기서 궁방 가운데 無土의 비중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토에도 절수지에서 전화한 민결면세지와 실결을 민결면세지로 획급한 것 등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전자는 무주지라는 명목으로 절수하였으나 민전임을 인정하여 민결면세지로 바뀐 형태였다. 가령 앞의 자료에서 和寧翁主房이 가진 전남 順天의 무토면세는 모두 71결 79부 9속인데, 이는 다른 자료를 보면 절수한 땅임을 알 수 있다.0894) 따라서 무토 가운데 상당수가 처음에는 절수를 한 토지였다.
또한 유토는 대체로 매득지와 절수지로 이루어졌다. 각각 차지하는 비율을 알아보자.≪內需司及各宮房田畓摠結與奴婢摠口都案≫에 의하면 용동궁의 경우 이러한 구분이 잘 되어 있는데, 유토 가운데 매득한 땅이 30결 76부 4속이고, 사여와 절수는 1,230결 34부 2속으로서 매득한 땅보다 사여와 절수가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용동궁은 왕비의 內帑을 관할하는 궁으로 권력이 강한 궁이었으므로 이러한 토지에서는 절수가 궁방전을 늘이는 중요한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유토, 무토의 구분만으로 확실한 토지의 내역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로써 본다면 임란이 지난 뒤 절수를 통하여 궁방전이 매우 늘어났으며 이 시기 특징적인 토지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