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가문학
16세기에 국문 시가문학은 형식의 세련성과 내용의 깊이에 있어 뚜렷한 발전을 보였다. 이 시기 국문 시가문학의 주 담당층은 사대부로서, 그들은 강호자연 속에서 심성을 수양하는 자신의 삶을 노래하거나, 유가적 이념을 향촌의 피지배계급에게 전파하려는 교훈적 내용을 작품에 담았다.
16세기의 사대부들이 국문시가를 통해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나름의 근거는<陶山十二曲>을 지은 李滉(1501∼1570)의 언급을 통해 잘 파악할 수 있다.
한거하여 휴양하는 여가로 무릇 性情에 느낌이 있는 것을 매양 시로 표현하는데, 지금의 시는 옛날의 시와 다르기 때문에 읊조릴 수는 있으나 노래할 수는 없어, 만약 노래를 하고자 할 경우 반드시 俚俗의 말로 엮지 않을 수 없다. 대개 國俗의 음절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李滉,≪退溪集≫ 권 42,<陶山十二曲跋>).
16세기 국문시가의 존재 의의는 이처럼 歌唱의 필요성에 그 핵심이 놓여 있었다. 또한<도산십이곡>의 주제를 ‘言志’와 ‘言學’으로 설정한 바와 같이, 기존의 翰林別曲類의 ‘矜豪放蕩’이나 李鼈<六歌>의 ‘玩世不恭’과는 다른 차원의 ‘溫柔敦厚’한 수준을 얻고자 하였다.
16세기 전, 중반은 재지 사림이 성리학의 도학정치 이념을 앞세우며 훈척세력에게 도전한 시대였다.
이로 인해 일어난 네 차례의 거듭된 사화와 잦은 정변은 일부 재지 사림들에게 정치현실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하였다. 이 시기에 창작된 李賢輔(1467∼1555), 李滉, 權好文(1532∼1587), 李珥(1536∼1584) 등의 국문시가에는 사림들의 이러한 의식이 적절히 표현되어 있다. 이들은 부패한 정치와 도덕적 이상을 상호 대립적인 항으로 인식하였다.
古人도 날 몯 보고 나도 古人 몯 뵈
古人을 못 봐도 녀던 길 알 잇니
녀던 길 알 잇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李滉,<陶山十二曲> 言學 3수).
高山 九曲潭을 사이 모로더니
誅茅 卜居니 벗님 다 오신다
어즈버 武夷를 想像고 學朱子를 리라(李珥,<高山九曲歌> 1수).
이들에게 있어 강호자연은 정치현실 이상의 가치를 지닌 求道의 공간이었다. 그들은 불변하는 理法이 현현해 있는 이 강호자연과의 친화를 통해서 철학적 깊이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修己와 治人의 이상이 현실 정치에서 순조롭게 연결되지 못할 때에는 강호자연과 정치현실 사이에서 선택의 문제가 불가피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권호문의 경우에서 보듯이 현실정치를 포기하고 강호에서의 삶을 선택하는 고뇌가 표현되기도 한다.
江湖에 노쟈 니 聖主를 리례고
聖主를 셤기쟈 니 所樂애 어긔예라
호온자 岐路애 셔셔 갈 몰라 노라 (權好文,≪松巖集≫ 續集 권 6,<閒居十八曲>4수).
16세기 중반 선조대를 거치면서, 사림들은 훈척세력과의 치열한 정치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중앙정계를 장악한다. 그러나 다시 사림들 내부에서 분파가 생김으로써, 16세기 신진 사림들이 훈척세력에 대항하여 추구했던 바의 至治主義는 이제 명분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상황은 국문시가를 대하는 자세에도 변화를 가져와, 鄭澈(1536∼1593), 申欽(1566∼1628)의 작품에 오면 도학적 세계로의 침잠이나 사변적 미의식의 추구는 상당히 축소되어 나타난다. 신흠의 다음 시조에서 보듯, 잦은 정치적 부침 속에서 일시적으로 정계를 물러나 있는 지식인에게, 이제 江湖는 정신적 안정감을 회복시켜 주는 휴양의 공간일 따름이다.
산촌에 눈이 오니 돌길이 뭇쳐셰라
柴扉를 여지 마라 날 즈 리 뉘 이시리
밤듕만 一片 明月이 긔 벗인가 노라(金天澤,≪靑丘永言≫(珍本)).
한편, 16세기 국문시가의 한 흐름인 훈민의 계몽적 경향은, 당시 사림들이 자신의 이념을 향약을 통해 향촌사회에 구현하고자 한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周世鵬(1495∼1554)의<五倫歌>, 宋純(1493∼1584)의<오륜가>, 정철의<訓民歌>등은 유가적 가치규범을 생활화하고자 한 사대부의 의도가 문학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아버님 날 나시고 어마님 랄 기시니
父母옷 아니시면 내 몸이 업실낫다
이 德을 갑려 하니 하 이 업스샷다(周世鵬,≪武陵雜稿≫ 別集,<五倫歌> 2수).
주세붕의<오륜가>는 序章을 비롯해 父子, 兄弟, 夫婦, 主奴, 長幼의 총 6장으로 되어 있는데, 오륜에 대한 직접적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철의<훈민가>16편은 향촌이라는 구체적 공간에서의 사족과 농민의 윤리에 비중이 놓여 있다.
이 시기 시조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국문시가는 歌辭이다. 가사는 4음보 연속체의 律文이라는 느슨한 형식적 제약이 있을 뿐, 주제·소재·구성 등에 특별한 제약이 없는 개방적 장르이다. 이 시기에 가사는 시조와 마찬가지로 사대부에 의해 창작되었는데, 송순의<俛仰亭歌>, 白光弘(1522∼1556)의<關西別曲>, 정철의<星山別曲>·<關東別曲>·<思美人曲>·<續美人曲>등이 주목할 만하다.
뎨 가 뎌 각시 본 듯도 뎌이고
텬샹 옥경을 엇디야 니별고
다 뎌 져믄 날의 눌을 보라 가시고
어와 네여이고 내 셜 드러보오
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즉 히냐마
엇딘디 날 보시고 네로다 녀기실
나도 님을 미더 군디 젼혀 업서
이야 교야 어러이 구돗디
반기시 비치 녜와 다신고(鄭澈,≪松江歌辭≫(星州本),<續美人曲>).
정철의 가사는 우리 국문 시가문학의 가장 높은 지점에 놓이는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우리말을 아름답게 구사한 표현기법은 자못 뛰어나다. 金萬重은≪西浦漫筆≫에서 정철의 이 국문 가사를 동방의<離騷>에 비견하면서, 天機가 자연히 발동한 것이면서도 夷俗의 천박함이 없는(天機之自發, 而無夷俗之鄙俚)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고 하였다.<관동별곡>과<사미인곡>은 그래도 한자를 많이 빌어 쓴 반면, 이<속미인곡>은 우리말을 곱게 구사하였기에 가장 뛰어나다고 평하였다.
양란을 거치고 난 후 17세기에 들어서는 국문 시가문학에도 상당한 변화가 나타난다.
16세기에 큰 성취를 이루었던 강호시조는 17세기 尹善道(1587∼1671)의<漁父四時詞>에서 그 언어적·심미적 세련성이 완성된다고 하겠다.<어부사시사>는 계절별로 각 10수씩, 총 40수로 이루어진 연시조로서, 시간적 흐름에 따라 전개되어 전편이 하나의 완결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압개예 안 것고 뒫뫼희 비췬다
떠라 떠라
밤믈은 거의 디고 낟믈이 미러 온다
至匊悤 至匊悤 於思臥
江村 온갓 고지 먼 빗치 더옥 됴타(尹善道,≪孤山遺稿≫ 권 6,<漁父四時詞> 春詞 1수).
윤선도의<어부사시사>에는 강호에서 누리는 기쁨과 충족감이 어부의 고양된 흥취와 더불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한편 이 시기는 당쟁이 활발했던 시기임으로 해서 姜復中(1563∼1639)의<癸亥反正歌>와 같이 西人을 찬양하는 내용과, 李德一(1561∼1622)의<憂國歌>와 같이 당쟁을 비난하는 내용의 시조들도 지어졌다. 이런 작품들은 자신의 주장을 직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문학적 성취도는 떨어진다고 하겠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시조의 담당층은 사대부에서 平民歌客으로 그 중심이 이동된다. 창법도 변화하여 이전까지 불리던 전아한 고전적 창법인 歌曲唱 대신 평이하며 대중적인 호소력을 가진 時調唱이 나타났다. 중인층 가객인 金天澤의≪靑丘永言≫, 金壽長(1690∼1770)의≪海東歌謠≫등의 歌集이 편찬된 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시조가 소수의 사대부들의 애호물에서 벗어나 중인, 평민에게까지 폭넓게 수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長劍을 혀 들고 다시 안자 혜아리니
胸中에 머근 이 邯鄲步ㅣ 되야괴야
두어라 이 한 命이여니 닐러 므슴 리오(金天澤,≪靑丘永言≫(珍本)).
이 시조에서 보듯이 김천택은 서리·아전층에 속해 선천적으로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차단당한 채 살아야했던 자신의 신분적 갈등을 우울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이 시기에는 평시조가 여전히 많이 지어졌으나 일명 蔓橫淸類라 하는 辭說時調가 또한 나타나 18세기 이후 뚜렷이 발전을 거두게 된다.
17세기의 가사는 주제가 다양해지면서 산문화·장편화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우선 양란을 거치면서 전쟁의 체험을 그린 작품이 나타났다. 崔睍(1563∼1640)의<龍蛇吟>은 전란의 경과와 책임을 당대의 벼슬아치에게 돌려 통렬하게 비판하였고, 朴仁老(1561∼1642)는<太平詞>에서 싸움의 경과와 승리의 과정을 웅장한 문체로 노래한 반면,<船上歎>에서는 임란을 회상하면서 왜적이 쳐들어 올 수 있게 배를 만든 軒轅氏를 원망하고 일본에 사람이 살게 된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하여, 혹심했던 전란 체험을 표현하였다. 박인로의<陋巷詞>와 鄭勳(1563∼1640)의<嘆窮歌>에는 전후 생존의 기반이 무너진 향촌의 양반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운 생활이 표현되어 있다. 이들 작품에는 강호에서 품위를 지키며 살고자 하는 소망과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의 빈곤문제가 중층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旱旣太甚야 時節이 다 느즌 졔
西疇 놉흔 논애 잠 녈비예
道上無源水을 반만 혀 두고
쇼 젹 듀마 고 엄섬이 말삼
親切호라 너건 집의 달 업슨 黃昏의 허위허위 다라가셔
구디 다 門밧긔 어득히 혼자 서셔
큰기 아함이를 良久토록 온 後에
어화 긔 뉘신고 廉恥업산 옵노라
初更도 거읜 긔 엇지 와 겨신고
年年에 이러기 苟且 줄 알건만
쇼 업 窮家애 혜염 만하 왓삽노라(朴仁老,≪蘆溪集≫ 권 3,<陋巷詞>).
위의 글에는 달도 없는 저녁에 밭갈 소를 빌러 가는 영락한 鄕班의 처지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참을 문 밖에서 망설이다가 어렵게 부탁해 보지만 소를 빌리지 못한 후, 박인로는 없으면 굶을 망정 남의 집, 남의 것을 부러워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궁핍한 자신의 처지를 감수한다. 한편 민심을 결집하여 황폐해진 나라를 복구할 것을 주장한 작품으로서<雇工歌>, 李元翼(1547∼1634)의<雇工答主人歌>가 있다.
이 시기의 유배가사로는 宋疇錫(1650∼1692)의<北關曲>이 있는데, 송주석은 할아버지 宋時烈이 숙종 원년(1675)에 함경도 덕원으로 귀양갈 때 동행하면서 겪은 고난을 작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