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2권 조선 후기의 정치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2. 영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정비1) 탕평책 시행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1. 탕평책 실시의 배경
          • 1) 붕당정치의 위기
          • 2) 탕평론의 대두
        • 2. 영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정비
          • 1) 탕평책 시행
            • (1) 탕평책의 제기
            • (2) 완론탕평파의 대세 장악과 반탕평파·준론탕평파의 연대
            • (3) 정국의 추이
          • 2) 정치 구조의 변동
          • 3) 기본 법전의 정비
          • 4) 군영 정비와 군주권 강화
        • 3. 정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강화
          • 1) 준론탕평과 군신 의리
            • (1) 준론탕평론의 적용
            • (2) 정국의 추이
            • (3) 정국운영의 특징
          • 2) 규장각과 왕정
          • 3) 장용영과 군주권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1. 양역의 편성과 폐단
          • 1) 양역의 편성
          • 2) 양역의 모순과 폐단
        • 2. 양역변통론의 추이
          • 1) 양역변통론의 여러 형태
          • 2) 양역변통론의 대두
          • 3) 양역변통론의 전개
        • 3. 균역법의 시행과 그 의미
          • 1) 균역법의 제정 경위
            • (1) 감필
            • (2) 급대재원의 마련
          • 2) 균역법의 내용
            • (1) 감필균역
            • (2) 균역청
            • (3) 군액감축
            • (4) 급대재원 조달
            • (5) 급대
          • 3) 균역법의 의미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1. 세도정치의 성립과 운영 구조
          • 1) 세도정치의 성립
            • (1) 권세가의 권력 독점
            • (2) 왕권의 약화와 붕당의 퇴조
          • 2) 세도정치의 성격
            • (1) 정치 참여층
            • (2) 권력의 주체
            • (3) 국정 인식과 정책
          • 3) 세도정치의 운영 구조
            • (1) 비변사
            • (2) 중앙 군영
            • (3) 언로와 공론
        • 2. 세도정치의 전개
          • 1) 순조대의 세도정치
            • (1)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순조 즉위년∼3년)
            • (2) 순조 친정 초기(순조 4년∼11년)
            • (3) 순조 친정 중기(순조 12년∼26년)
            • (4)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순조 27년∼30년 5월)
            • (5) 순조 친정 말기(순조 30년 6월∼34년)
          • 2) 헌종대의 세도정치
            • (1) 헌종대 순원왕후 수렴청정기(헌종 즉위년∼6년)
            • (2) 헌종 친정기(헌종 7년∼14년)
          • 3) 철종대의 세도정치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1. 삼정의 문란
          • 1) 전세제도의 문란
            • (1) 전결세 항목의 증가
            • (2) 전정의 부실
            • (3) 전정의 폐단
          • 2) 군역제의 해이
            • (1) 군역제의 변화
            • (2) 군역제 개혁
            • (3) 군역제의 문란
          • 3) 환곡제의 변질
            • (1) 환곡제 운영
        • 2. 삼정개혁론의 전개
          • 1) 19세기 전반기의 삼정개혁론
          • 2) 1862년 농민항쟁기의 삼정개혁론
            • (1) 삼정에 대한 책문
            • (2) 삼정개혁방안
          • 3) 삼정이정론의 반영
        • 3. 부세제도 개선의 한계
          • 1) 삼정체제의 구조적 모순
          • 2) 전정이정책과 정책의 추진
            • (1) 전정의 구조적 문제와 이정책 수립
            • (2) 정책 추진의 실상과 한계
          • 3) 군정이정책과 정책의 추진
            • (1) 군정의 구조적 문제와 이정책 수립
            • (2) 정책추진의 실상과 한계
          • 4) 환정이정책과 정책의 추진
            • (1) 환정의 구조적 문제와「파환귀결책」
            • (2) 정책추진의 실상과 한계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1. 청국과의 관계
          • 1) 호란 후 대청관계의 수립
          • 2) 심양에서의 소현세자
          • 3) 1650년대 이후 북벌론과 나선정벌에의 출병
          • 4) 백두산 정계비 문제
          • 5) 조선과 청의 문화적 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1) 왜란 이후 조일 통교의 회복
            • (1) 17세기 초 국교 회복 교섭과 대일본정책
            • (2) 기유약조의 체결과 통교체제의 확립
            • (3) 통교 회복 직후 조일 교린관계의 실태
          • 2) 17세기 중반 조일 통교체제의 개편
            • (1) 국서개작사건과 통교루트의 일원화
            • (2) 통교체제의 개편
            • (3) 겸대제 실시와 외교 사행의 정비
            • (4) 왜관 중심의 통교·무역과 조일 교섭체계의 형성
          • 3) 17세기 후반 이후 조일 통교양상의 변화
            • (1) 1711년 신묘년 통신사에 대한 의례 변경과 그 의미
            • (2) 17세기 후반 조일 양국민의 접촉과 대일정책
          • 4) 19세기 조일 통교체제의 왜곡
            • (1) 통신사 의례의 왜곡
            • (2) 조일 교린관계의 변화
          • 5) 개항 전후 양국관계의 추이와 전근대 통교체제의 붕괴
            • (1) 개항 전 일본에서의 정치적 변동과 대마번의 조일 통교 대행
            • (2) 왜관 침탈과 조일관계의 변질
            • (3) 조일수호조규 성립과 전근대 조일 통교체제의 붕괴
        • 3. 서양과의 관계
          • 1) 조선과 서세동점
          • 2) 조선 선교의 시도
          • 3) 서양인과의 접촉
          • 4) 이양선의 출현
          • 5) 서양인의 조선 인식
          • 6) 지도 제작과 조선 인식의 확대
          • 7) 조선인의 서양 인식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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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정비

1) 탕평책 시행

(1) 탕평책의 제기

 18세기 조선시대 정치를 특징짓는 ‘蕩平’論은 주자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四書보다도 원시유학의 기초가 되는 六經 중에서≪尙書≫洪範篇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군주는 탕평·정직의 정치를 행함으로써, 사회 일반의 나쁜 무리와 아첨이 통하는 기풍을 없애고, 好惡·偏黨·反側같이 사회를 혼란시키는 제반 현상들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논리적 근거는 군주권이 하늘과 연결되는 신성성 곧 전제적 성격이 강했던 시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는 결국 사대부에 대한 군주권의 우위를 주장하면서 집권관료제를 재정비함으로써 사회 안정을 도모하려는 정국운영 노력이었다. 탕평은 기층사회에 대한 시책에 적용될 때에는 ‘大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탕평을 표방한 정국운영 논의는 숙종 초(17세기 말)에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당시는 붕당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상호 공존 원칙이 무너져 갔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후 격렬한 당쟁을 겪고 나서, 50년 뒤인 영조대에 와서야 현실정치에 본격적으로 적용되었다.068) 곧 이 정책은 이전 단계의 정국운영이 가지는 문제점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바탕에서 실시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목표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의 숙종대와 경종대 정국운영 추이와 그 특징을 개략적으로나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숙종 즉위(1674) 이후의 甲寅禮論 논쟁부터는 기본적으로 공존하는 붕당과 붕당간의 公論 조제를 기본 구도로 해서 정치적·사회적 이해 대립을 해결한다는 정국운영 방식이 파기되었다. 그 대신 군주가 공론을 是非의 차원에서 분별함으로써 강력하게 개입하는 정치 상황이 나타났다. 이러한 정국운영은 영조 4년(1728) 무신란 다음 해에 己酉大處分으로 탕평정치가 출발하기 전단계까지 계속되었다. 곧 이 기간 동안 사림의 공론에 의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무너진 한편, 상대당을 소인당이라고 지목하면서 군주의 권위를 빌려서 一黨이 전권을 장악하는 ‘換局’이라 불리는 형태의 정치적 격변이 8번 가량 일어났다. 경신환국(1680)·기사환국(1689)·갑술환국(1694)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날 때마다 다른 당파에 대한 보복과 살육이 잇따르는 일당 전제적 정국운영이 당연하게 긍정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정치적 격변의 출발점이 된 경신환국 직후, 尹拯 같은 서인계 산림은 학문성을 높여서 당론을 타파하고 공론을 세움으로써, 진정한 사림정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윤증과 가까웠던 산림 朴世采도 서인과 남인을 다시 조제 보합하여 다붕당정치 형태를 회복하는 길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탕평의 논리로서 제시하였다. 이 주장들의 핵심은 당파간의 우열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를 시비의 차원에서 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시비의 차원은 권력을 휘두른 간신(權奸)과 그 심복하는 무리들에게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율곡 李珥의 조제보합론에 근거한 붕당정치론을 수용한 견해이기도 했다. 이들은 이후 소론계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소론계 관료집단의 지도자였던 崔錫鼎·남구만들은 이를 받아들여 남인계 인재를 등용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에 의해서 숙종 12년(1686)과 24년에는 탕평전교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의 밑바탕에는 양반 문벌 중 특권적 정치집단이 붕당정치를 가탁해서 권력을 독점하려 한다는 지적이 깔려 있다는 점은 특히 주목된다. 이를 소론계 史臣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사류와 훈척은 예로부터 서로 용납되지 않았는데, 어찌 (이제 와서) 배반하여 떨어져 나갈 까닭이 있을 수 있겠는가. 훈척이라는 자들은 공신가문을 지켜 주겠다는 맹세에 기대고 임금의 예우에 의지하여 총애를 믿고 공을 떠맡아서 때때로 지나치게 외람하니 경신환국 이후의 세 척리가 멋대로 방자하였는데 그 중에 金益勳이 가장 심하였다.

…서인과 남인 붕당의 폐단은 실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근본이지만, 이는 한때 의견의 갈라섬으로 인한 싸움이 아니므로 …남인 당파라는 이유로 나라 절반에 이르는 인물들의 벼슬길을 막는 금고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저 노론당이라는 자들은 대대로 나라의 정사를 장악해서 반대당을 참살하는 데 용감했으므로 정국이 환국될 때마다 가장 심하게 화를 당하였으므로, 개인적인 원한으로 마음이 쏠려버려서 공적인 마음은 다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陰陽과 黑白은 구별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으나 속으로는 모함하여 보복하는 계책으로 쓰여지게 했으므로, 죄가 없는 사람들도 함께 섞여 금고를 당하였다(≪肅宗實錄補闕正誤≫권 14하, 숙종 9년 6월 무진).

 곧 숙종·경종대의 실제 정국운영은 왕실·외척세력과 결탁한 1붕당이, 공론의 ‘優劣’을 조제하는 대결이 아니라 의리의 ‘是非’를 가리는 대결, 곧 상대 당파를 소인당으로 취급하여 제거하는 환국이라 불리는 일당 전제적 정국운영 방식을 기본으로 해서 장악하여 갔고, 이 결과 붕당 상호간의 보복과 살육도 義理라는 이름 아래 합리화되는 폐해가 야기되었다. 그리고 이는 외척집단들이 당파의 지도자 산림집단과 결탁함으로 해서 야기된 심각한 폐단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국 상황에 대하여, 기호지방 중심의 직업적 관료가문이 주도했다고 생각되는 소론당과, 영남과 기호지방의 중소지주적 사림세력을 기반으로 한 남인당이 이들 노론당을 사대부 체제를 파괴하는 소인당으로 공격하였으므로, 그 결과 치열한 당쟁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곧 몇 차례의 탕평 노력에도 불구하고, 숙종 연간의 정국운영은 국왕이 당파간에 첨예한 대립이 야기된 문제에 대해서 직접 시비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 후일 개인적인 차원의 일을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했다고 비난되었던 노론과 소론의 현안문제에 대해서 내려진 국왕의 병신처분에서 잘 알 수 있듯이, 탕평의 정국운영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곧 한 붕당이 척신계와 결합해서 전권을 장악해가는 한편, 상대당을 소인당으로 지목하여 모든 인물들을 제거해 버리는 당쟁이 계속되었다. 거듭되는 환국과 그 때마다 시비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보복과 숙청으로 해서, 노론·소론·남인 모두 다 반대당은 소인당이므로 사류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철칙으로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는 곧 군자당과 소인당 사이에는 의리의 조제나 인재의 보합이 있을 수 없으므로, 조제보합론을 내세우는 것 자체가 오류라는 견해였다. 다시 말하면, 이른바 李珥가 사림정치 추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 최악의 형태인 군자당과 소인당의 대립 상황이 실제 현실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이의 견해를 빌린다면, 진짜 붕당과 가짜 붕당의 대결양상이란 곧 사림정치가 파탄 시기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069)

 이러한 정국운영으로 인한 폐해로 해서, 경종 연간(1720∼1724)에는 또다시 趙文命·金一鏡·沈檀들을 위시한 소론·남인계에서 탕평정책을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때는 탕평의 표방을 빌린 붕당정치 복구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나마도 각 정파가 정국 주도권을 극대화하려는 정략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뿐이었다. 이것은 화해가 불가능했던 당시의 대립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숙종 초에 탕평론이 제시된 이후는, 노론계나 남인계 모두 이 논거 자체를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공격하기에는 일진일퇴 정국에 뒤따르는 혼란이 너무나 컸다. 그래서인지 노론계나 남인계에서도 탕평을 내세운 소론계의 조제보합론과 같은≪尙書≫洪範편에 근거하는 皇極 곧 ‘大中至正’의 논리를 역으로 내세워서, 자기 당파의 의리만이 황극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는 당론합리화 주장도 많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는 고대적인 天命論에 근거하는 군주권의 정국 주도를 인정하는 논거였으므로, 결국 붕당의 공론에 의한 정국 주도를 약화시키는 논리로 기능한 셈이었다.

 18세기 초반 당쟁이 격화된 것이 단순히 지배계급인 사대부 계층내의 정치투쟁 격화를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일부 새로운 중간계층들이 서울지역과 지방에서 성장해 가면서 정치참여 계층으로 자신들을 근접시켜 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 향촌사회에서는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힘입어 향족이 성장하여 사족에 대신하여 중앙정부가 파견한 수령의 조세수취를 보조하면서 향촌 운영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상업의 발달은 서얼·역관·상인층들을 급속하게 성장시켰고, 일부는 중앙 정계에서 군주권 또는 특권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자신의 이해관계를 당쟁에 투영시켰다. 대표적 기술직 중인인 역관 집안의 장희빈이 사대부 집안에 대신하여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러한 시대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곧 중간계층의 성장 역시 당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이와 연결되는 정치·사회적 모순도 계속 증가해서, 양반 지주층의 토지겸병 및 절수의 확대, 중간수탈의 증가, 일반 농민의 군역 부담 가중같은 사태가 야기되었다. 여기에다 계속되는 흉년과 질병의 만연으로 생산담당층으로 이루어진 기층사회에서는 遊離·도망·비밀결사조직 같은 다양하고 지속적인 반발이 계속되었다.070)

 그리고 이러한 기층민과 중간계층의 저항을 조직화한 反正시도가 영조 4년(1728) 戊申亂으로 폭발하였다. 이 병란은 당시 남인과 소론계의 급진 失志士族세력이 연대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 전국적으로 발달하고 있었던 장시망을 이용하여 掛書·유언비어 같은 방법으로 반란의 대의를 전국적으로 선전하기도 해서,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양상의 사회적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071) 이에 충격을 받은 국왕과 집권세력들은 이제까지의 정치운영 방식을 시급히 바꾸어야 한다는 점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변화해가는 정치·사회적 상황에 빨리 대처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다음 해 기유대처분으로 탕평론이 실제 정치의 운영원칙으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18세기 초반에 다시 내세워진 탕평의 정국운영론은 1차적으로는 일진일퇴하는 환국이라는 정국운영을 타파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정국운영을 황폐화시킨 근본이 되어버린 붕당 자체를 타파해야 한다는 표방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끌어 갔다.

068)탕평책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있다.

鄭萬祚,<英祖代 初半의 蕩平策과 蕩平派의 活動>(≪震檀學報≫56, 1983).

―――,<英祖代 中半의 政局과 蕩平策의 再定立>(≪歷史學報≫111, 1986).

崔完基,<英祖朝 蕩平策의 贊反論 檢討>(≪震檀學報≫56, 1983).

朴光用,<蕩平論과 政局의 變化>(≪韓國史論≫10, 서울大, 1984).

―――,<英·正祖代 南人勢力의 政治的 위치와 西學政策>(≪한국교회사논문집≫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069)李珥,≪栗谷全書≫권 7, 辭大司諫兼陳洗滌東西疏 己卯.
070)鄭奭鍾,≪朝鮮後期 社會變動硏究≫( 一潮閣, 1985).
071)李鍾範,<1728년 戊申亂의 性格>(≪朝鮮時代 政治史의 再照明≫, 汎潮社, 1985).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