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망
조선 전기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어망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어망의 명칭은 균역법 실시 이후 균역법과 관계있는 문헌에 비로소 보인다. 주요한 문헌은≪균역사목≫과 이보다 수년 뒤에 편찬된≪均役廳事目≫,0566)≪經世遺表≫권 14, 均役事目 追議,≪萬機要覽≫財用編 3, 海稅條 등이다. 이들에 의하여 도별로 어망 또는 어망설치 장소를 보기로 한다.
≪균역청사목≫에 의하면, 경기도에는 網機·漁基·漁條·溫堗이 있었다. 망기와 어조·온돌은 어망을 가리키고 어기는 어망설치 장소로 생각된다. 온돌은 “해변에서 물고기를 잡는 곳”0567)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柱木網을 가리키며 현재 연평도에서는 주목망을 ‘왼돌’이라고 한다. 주목망은 자루 모양의 긴 그물의 網口를 큰 지주 2개로 고정시켜 조류를 따라 그물에 들어오는 물고기를 잡는 어망이다. 조수의 간만차가 크고 조류가 빠른 서해안에 설치되었던 중요한 어망의 하나였는데 조기가 많이 잡혔다.
≪균역청사목≫에 의하면, 황해도에는 網基·온돌·洋中立船揮罹가 있었다. 망기는 어망을 설치하는 장소 또는 그 곳에 설치된 어망을 가리키는 것으로, 개막이그물(建干網)로 생각된다. 이것은 기다란 그물을 간석지에 설치하여 놓고 간조 때에 그물에 의하여 차단되거나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어망이다. 온돌은 과거에는 ‘연돌’이라고도 하였는데 역시 주목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숙종 34년(1708)의 각 도의 宮家 折授 어장에 관한 기록에 온돌이 보인다.0568) 양중 입선 휘리는 洋中 즉, 육지에서 좀 멀리 떨어진 바다 가운데에 배를 세우고 휘리, 즉 후릿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을 말한다. 후릿그물은 양쪽 끝에 긴 끌줄이 달린 띠처럼 생긴 기다란 어망인데, 고기잡는 법은 그물의 한쪽 끝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 물고기를 포위한 뒤 양쪽 끌줄을 육지에서 끌어당겨 잡는 것이다. 그런데 후릿그물을 바다 가운데에 세운 어선에서 끌어올린다면 그것은 방그물(手繰網, 배후릿그물)이었을 것이다. 방그물이 18세기에 이미 개발되어 있었다는 것은 주목되는 일이다.
≪균역사목≫에 의하면, 충청도에는 注朴이라는 어망이 있어 “볏짚으로 그물을 떠서 조수가 진퇴하는 곳에 설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경세유표≫에서는 이를 索罟라고 하였는데 볏짚으로 꼰 새끼로 만든 어망이라는 뜻이다. 주박도 주목망의 일종으로, 현재 연평도에 주목망이 남아 있는데, 수심이 깊고 조류가 빠른 곳에 설치하는 것은 ‘왼돌’, 수심이 얕아 간조 때에 어망이 노출되는 것을 ‘주복’이라고 부르고 있다. 주박과 주복은 어원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에는 여러 가지 어망이 있었다.≪均役行覽≫에 나오는 영조 26년(1750) 전라도 균세사의 보고에 의하면, 土箭·狽擡·防口簾·扈箭·編簾·土場·紗月網·足臺網·布網·竹網·眞絲行網·小邊網·碇耳網·叱音網·鼓網·小弓網·滅致網·擧沙土網·浮板 등의 어구가 있었다. 이 중 오늘날 어떠한 어망을 말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월망은 사달망, 즉 사둘이다. 전라남도에서는 지금도 사둘을 ‘사달’이라고도 한다. 족대망은 족대이다. 포망은 젓새우 어획용 어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라북도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망의 형태가 족대와 비슷한데 이를 밀고 가면서 젓새우를 잡는다. 이를 포망이라고 하고 ‘밀방’이라고도 한다. 진사 행망은 명주실로 만든 행망으로, 행망은 일종의 걸그물(刺網)이었다. 걸그물은 물고기가 그물코(網目)에 꿰이게 하여 잡는 어망이다. 소변망은 작은 변망을 말하는데, 변망은 개막이그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이망은 과거에 볼 수 있었던 닻배그물(碇網)로 보인다. 닻배그물은 바다의 바닥에 설치하는 걸그물(底刺網)로, 어망을 큰 닻으로 고정시켰다. 소궁망은 작은 궁망을 말하는데, 궁망은 과거에 많이 있었던 弓船網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궁선망은 들그물(敷網)류에 속하는 어망으로서 어선의 뱃머리에서 어망을 내밀어 물 속에 잠기게 하여 조류를 타고 들어오는 새우나 기타 어류를 잡는 것을 말한다.≪林園十六志≫에서는 이 어망을 杈網이라고 소개하고 속명을 ‘횃배’라고 한다고 하였다.0569) 멸치망은 焚寄抄網으로 보인다. 멸치는 불빛을 좋아하는 성질, 즉 趨光性이 있는 어류이므로 불빛을 밝혀 멸치를 모은 다음 초망으로 떠올려 잡는데 이 어망이 분기초망이다.≪자산어보≫에 밤에 불빛으로 멸치를 유인하여 분기초망으로 잡는 어법이 실려 있다.0570) 이 밖의 어망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데 대개 소규모의 어구로서 시골의 노인이나 어린이가 반찬거리를 잡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균역청사목≫에 보이는 전라도의 漁條는 어망으로 보이는데 “蝟島 앞바다 宗船 1척 100냥, 좌우 2등 2척 각 90냥, 3등 2척 각 80냥,…좌 7등 1척 40냥”이라고 되어 있다. 각 어선은 정해진 각자의 어장에서 조업하고 어장의 豊度에 따라 차등 과세하였던 것이다. 이 어선들이 사용한 어망은 中船網이었을 것이다.0571) 영조 24년(1748) 위도에서는 “도내에서 물고기잡이하는 中船이 立船하는 곳은 큰 漁利가 있다”0572)고 하여 중선망 어업이 활발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선망은 기다란 자루그물을 어선의 양현 밑에 달고 조류를 따라 들어오는 어류나 새우를 잡는 어망이다. 주목망과 같이 조수의 간만차가 크고 조류가 빠른 서해안에서 발달된 독특한 어망으로서 조기나 청어를 많이 잡았고,0573) 새우를 잡는 것도 있었다. 후자는 ‘醢船網’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젓새우 어획용으로 쓰이고 있다.
≪균역청사목≫에 의하면, 전라도의 靈光 등 읍에는 무명실로 만든 후릿그물(綿揮網)·개막이그물(綿邊網)·大罟·葛網 등이 있었는데, 세금은 어망의 길이를 기준으로 매겼다. 대고는 대형 후릿그물이고 갈망은 칡덩굴 껍질로 만든 어망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망의 종류는 알 수 없다.
경상도에도 몇 가지 어망이 있었다.≪균역사목≫에 의하면, 경상도의 어조는 물고기가 왕래하는 어로에 어선이 각자 정하여진 곳에서 그물을 치고 물고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조는 바다에만 있었는데 대구 어조와 청어 어조가 있었고, 각각 일정한 장소가 정해져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어조는 중선망이 아니라 주로 구한말에 볼 수 있었던 줄살(乼矢)·장살(杖矢)등과 같은 정치망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청어·대구 등은 ‘洋中去處條’라는 어망을 어선에 싣고 대양에서 잡기도 하였는데 이 어망은 정치망이 아니라 걸그물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순조 14년(1814) 통제사 徐英輔의 보고에서 알 수 있듯이 어망을 싣고 나가 물고기를 잡고, 잡는데 따라 ‘洋中去處稅’라는 세금을 냈다.0574)
≪균역사목≫에 興海·延日·長䰇·蔚山 등 청어 어장의 揮罹船과 細網船에 대한 수세 규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경상도에서도 후릿그물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다에 대구·청어 어장, 문어 어장이 있었고, 강에도 江魚 후리 어장이 있었다고 한다. 세망선은 세망을 사용하는 어선인데, 세망은 주로 청어를 어획한 걸그물이었고 세간에서 ‘시망’이라고 하였다.0575) 고종 31년(1894)경에는 경상북도지방의 세망선 중 양중 거처조에 속하는 것도 있었다.0576)
또 경상도의 어망 중에는 ‘洋中擧揮罹’라는 것이 있었다.≪균역사목≫에 의하면, 이것은 “그 網具가 심히 크고 곁군(格軍)이 아주 많아서 비록 바다 가운데서 물고기를 잡을지라도 이익이 많으므로 지금 20냥으로 세금을 매긴다”고 하였다. 거휘리는 일제시대까지도 많이 사용한 우리 나라의 전통적 두리그물(旋網)로, 물고기를 포위하여 잡는 어망이고 주로 청어를 잡는 데 사용되었다.
함경도와 평안도에 대해서는≪균역사목≫에서 德源의 청어 휘리세를 간단히 언급하고 있을 뿐으로 지극히 간략하게 다루었다.≪만기요람≫에 의하면 강원도에는 후릿그물이 곳곳에 있었는데 과거에는 멸치 후릿그물 어업이 가장 성하였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조선 후기에는 여러 종류의 전통적 어망이 사용되고 있었고, 지역별로 자연적 조건에 알맞는 어망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물감(網地)을 명주실로 만든 우수한 어망도 사용되고 있었다.
≪林園十六志≫佃漁志에는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어망을 여러 가지 다루고 있다. 우리 나라 것으로는 위에서 본 것 이외에도 명주실로 만든 빙어 어획용 걸그물, 반두, 좽이(投網), 사둘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그물코가 촘촘한 어망인 數罟를 명주실로 만드는 방법이나 뜸(浮子), 발돌(沈子),0577) 染網法 등을 설명하고 있다. 뜸은 소나무 껍질 등 가볍고 잘 뜨는 나무로 만들고, 발돌은 흙을 구워 만들기도 하고, 기와나 벽돌 조각을 갈아서 君遷子 모양으로 다듬은 뒤에 양변에 홈을 파서 만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염망은 黃蘗나무를 도토리즙에 섞은 것으로 물들였다고 한다. 또 荒乫木 껍질을 다린 물로 물들이기도 하였다고 한다.0578)
0566) | ≪均役廳事目≫(奎章閣圖書 17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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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7) | ≪正祖實錄≫권 36, 정조 16년 12월 무자. |
0568) | ≪備邊司謄錄≫59책, 숙종 34년 12월 30일. |
0569) | 徐有榘,≪林園十六志≫佃漁志 권 3, 弋獵 杈網. |
0570) | 丁若銓,≪玆山魚譜≫권 1, 鱗類 鯫魚. |
0571) | 徐有榘,≪林園十六志≫佃漁志 권 3, 漁條網. |
0572) | ≪承政院日記≫1036책, 영조 24년 11월 28일. |
0573) | 전라도에서는 중선이 어장에서 청어를 잡은 뒤 돌아가서 배를 강변에 정박시켜 두고 그 다음해의 어기를 기다렸다고 한다(≪均稅行覽≫報備局稟議成冊). |
0574) | ≪日省錄≫순조 14년 정월 21일. |
0575) | 조선 말기의 세망에는 명주실로 정교하게 뜬 우수한 것도 있었다(下啓助·山脇宗次,≪韓國水産業調査報告≫, 1905, 鰊刺網 圖解). |
0576) | ≪慶尙道內沿江海邑庚寅條船鹽藿漁稅總數都執≫(奎章閣圖書 18099). |
0577) | 뜸의 원래의 우리말은 ‘그물버굿’이었고, 발돌은 ‘그물톳’이었다(金弘喆,≪譯語類解補≫佃漁補). |
0578) | 徐有榘,≪林園十六志≫佃漁志 권 3, 弋獵 數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