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서울의 상업도시로의 성장
가. 인구증가와 공간확대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육상·해상교통의 발달에 따라 전국적 시장권이 형성되면서, 점차 전국적 시장권의 중심지였던 서울도 종래 정치·행정중심지에서 상업도시로 변화되었다.0992)
서울이 상업도시로 성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구의 증가였다. 한성부의 인구통계에 의하면 서울인구는 효종 8년(1657)에 80,572명에서 현종 10년(1669)에는 194,030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호구파악을 엄밀히 한 결과라고 일단 해석되지만, 실제 인구의 증가를 반영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실 거주인구의 증가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1660년대를 전후하여 다수의 시전이 창설된 점이다. 현종 원년경에는 西江米廛이, 숙종 6년(1680)경에는 麻浦米廛과 門外米廛이 창설되었으며, 현종 12년에는 서소문 밖에 外魚物廛이 창설되었다. 이외에도 鷄兒廛·南草廛·凉台廛·門外隅廛·門外床廛 등도 이 시기에 창설되었다. 이러한 신설 시전의 증가현상 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미전·어물전 등의 증가이다. 미곡과 어물은 都城民의 일용 소비품이었기 때문에 이들 시전의 증가는 소비인구의 증가를 상정하지 않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특히 미전이나 어물전의 설치지역이 도성 밖과 京江邊인 서강·마포 등지였다는 점은 인구증가가 서울 도성 안이 아니라 성밖, 특히 경강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17세기 후반 이른바 小氷期의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전국 각지에서 많은 流移民들이 발생하였다.0993) 이러한 유이민에 대한 진휼정책은 자기 고을사람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자기 고을을 떠난 사람은 다른 지역에서는 진휼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울에서만은 王都라는 이유로 전국 각지의 유민들을 모두 수용하여 진휼하였다. 때문에 유이민들은 대부분 서울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17세기 후반의 자연적·사회적 조건을 고려해 볼 때 이 시기의 서울의 인구증가는 대부분 외부로부터 유입된 인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추정된다.
더구나 18세기 이후 서울은 상업활동에 부수되는 각종 일거리들이 많이 생겨, 수십만 명의 ‘遊手之輩’들도 각종 雜務에 종사하면서 먹고 살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므로 서울에 몰려든 유민들은 각종 대규모 토목공사나 藏氷役 등의 坊役에 雇立되어 생계를 유지하거나, 또는 양반가의 노비신세가 되어 살아가기도 했다. 이외에도 유민들은 ‘流丐之類’가 되어 서울의 廣通橋나 孝經橋 아래서 움막을 치고 생활하거나, 하천변에 집을 지어 살고 있었다. 이에 따라 17세기 중엽에는 開川(청계천)변에서 채소 등을 경작하는 ‘川上居民’이 늘어나고 있었다. 18세기에 이들은 개천변에 주택을 건설하여 거주하였으며, 이들의 집도 매매되었다. 그러므로 영조 31년(1755) 청계천에 대한 대대적인 준설사업을 시행할 때, 특별히 이들 ‘川邊造家者’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서울에 인구가 증가하자 가옥에 대한 수요도 당연히 늘어났다. 17세기 후반까지 사대부들이 평민가옥을 빼앗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를 ‘閭家奪入’이라고 했다. 이 시기≪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한 각종 연대기의 기록에도 사대부의 ‘여가탈입’을 금지하는 왕의 명령이 계속 실렸지만, 18세기 후반부터는 양반들이 평민들의 가옥을 빼앗는 사례가 거의 사라졌다. 이와 같은 ‘여가탈입’의 발생은 서울 내에서의 주택부족에 기인하는 것이었고, ‘여가탈입’의 소멸 또한 평민들의 주택에 대한 권리의식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외부에서 유입된 貧殘民들은 개간이 금지된 산허리까지 개간하였는데, 주로 경강변인 萬里峴·西氷庫 등지가 개간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유이민들의 서울 이주에 따라 나타나는 주거공간의 부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한편 18세기 이후 서울의 공간적 규모도 확대되었다. 서울의 지역적 공간은 세종때에 도성 안은 물론 도성에서 10리까지를 경계로 삼고 있었다. 이른바 ‘城底十里’를 한성부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이 ‘성저10리’는 조선 후기 四山禁標지역과 일치한다. 이와 같은 범위는 18세기 인구증가로 확대되고 있었다. 영조 3년 도성민들이 上言을 올려 사산금표지역의 조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영조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 인구증가에 따라 교외에 一片의 空閑地도 없어 백성들이 시신을 매장할 곳이 부족하다는 점을 이유로 사산금표지역의 조정을 허락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주민의 도성 밖 거주공간은 더욱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는 유입인구의 주거지가 도성 밖, 특히 경강지역에 몰리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강변 인구증가와 한성부 공간확대를 반영하여 17세기 후반에는 경강변인 용산·서강·한강·豆毛坊·屯之坊 등지가 한성부의 五部 밑의 행정단위인 坊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18세기 후반에는 동대문 밖의 崇仁·昌信坊지역과 한강 하류지역인 망원·合井지역이 延禧坊·延恩坊·常平坊으로 편제되었다. 이 시기 인구증가 요인이 되었던 유입인구는 대부분 유이민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유동인구로서 한성부의 호구파악에 누락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8세기 이후 서울의 실제 거주인구는 3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