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상업도시로의 성장
서울이 18세기 이후 전국적 시장권의 중심도시로서 성장하면서 서울 외곽에 새로운 상품유통의 거점도 생겨났다. 廣州의 松坡場과 楊州의 樓院店(다락원점)이 그것이다. 이 두 지역은 한성부의 관할이 아니었으므로, 시전상인들이 禁亂廛權을 행사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난전상인들은 누원점과 송파장을 직접 연결하여, 서울을 거치지 않고 동북지역과 삼남지역으로 상품을 유통시켰다. 이 결과 서울에는 시전중심의 상업체제가 붕괴되고, 자유상인인 私商들에 의한 상업체제가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 후기 서울의 시장과 상가도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서울의 전통적인 시장이었던 종로의 시전거리와 더불어 亂廛商人들의 상설시장인 梨峴과 七牌가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칠패시장은 어물판매에 있어서는 내·외어물전보다 유통물량이 10배에 달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또한 과일을 판매하는 隅廛도 松峴·貞陵洞·典洞, 門外의 上·下 우전과 南門 안의 우전 등 여섯 군데에 이르렀다. 종로 시전이나 이현·칠패 외에 19세기 중엽에는 雜市도 형성되어 소소한 물건을 판매하였다. 조선 후기 서울의 시장은 종로의 시전을 비롯하여 이현, 칠패, 각지의 시전, 경강의 점포, 잡시 등 매우 복잡하게 형성되어 상업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던 것이다.
이처럼 서울이 상업도시로 성장하면서 서울은 화폐경제가 모든 경제활동을 지배하게 되었다. 南公徹은 이러한 사정을 “서울은 돈으로 생업을 삼으며, 8道는 곡식으로 생업을 삼는다”0994)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헌종 8년(1842) 가짜 암행어사 행세를 하다가 붙잡혀 포도청에 끌려 온 한 죄수도 “서울은 지방과 달라서 돈이 있으면 안되는 일이 없는 곳”0995)이라고 서울의 상업도시로서의 분위기를 실감있게 표현하고 있었다.
18세기 이후 서울은 명실상부하게 전국적 시장권의 중심도시였다. 서울에서는 전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이 판매되었다. 과일의 경우를 예로 들면 ‘秋香’이라 불리는 황주·봉산의 배, ‘月華’라 불리는 南陽·安山의 감, 남부지역의 柚子·橘·石榴 등도 반입되었으며, 복숭아의 경우도 ‘僧桃’·‘六月桃’와 울릉도에서 생산되는 ‘鬱陵桃’도 서울에 반입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국내상품만이 아니라 외국상품도 서울에서 판매되었다. 이중환도≪택리지≫에서 “부유한 상인이나 큰 장사치가 되면 앉아서 물건을 파는데, 남으로는 일본과 통하고, 북으로는 燕京과 통한다. 여러 해 동안 천하의 물자를 수입·수출해서 혹은 수백만금에 이른 자가 있다. 그런 부자는 오직 漢陽에 제일 많고 다음이 開城이요, 또 그 다음이 平壤과 安州이다”0996)라 하여, 서울상인들이 국제교역을 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음을 말하였다. 또한 헌종 10년에 저술된≪漢陽歌≫에서도 “팔로는 통하였고, 燕京·일본 다 아는구나. 우리 나라 所産들도 붓그럽지 안큰마는 他國物化 交合하니 百各廛 장홀시고”라 하여 서울이 18세기 후반에 오면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도 가지게 되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