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물가상승과 서울 유통구조의 변화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이와 같은 화폐경제의 동향을 반영하면서 유통계에 주목할 만한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하나는 지속적인 물가상승이었고, 다른 하나는「錢荒」의 재현과 심화였다. 물가상승은 화폐유통 영역이 확대되고 상품화폐경제가 현저히 발달하는 가운데 수반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동전유통이 시작된 17세기말에는 동전가치가 불안정하여 일시적인 물가상승이 있었으나, 18세기 전반 초기 전황의 성격에서도 잘 나타나는 바와 같이 동전유통이 정착되면서 동전가치는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18세기 전반의 물가 동향은 凶豊과 지역 사정에 따라, 또한 계절적 시차에 의해 시장가격의 騰落이 심하기 때문에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米價는 풍년일 경우 1석에 2∼3냥, 흉년에는 4∼5냥의 시세를 보였고, 綿布價(木價)는 비면작지대의 경우 1필에 2냥 이상, 면작지대의 경우 1냥 5∼8전 정도의 시세를 유지하였다.1052) 이는 조세금납시의 법정 환산가(作錢價)인 미 1석당 5냥, 면포 1필당 2냥을 약간 밑도는 수준이었다.
조선 후기 물가상승 추세가 뚜렷해지는 것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 물가상승을 주도한 것은 미곡과 면포였다. 미가등귀는 대규모 미곡시장의 형성과 私商·船商들이 주도하는 조직적인 유통망을 배경으로 미곡유통이 활발하였던 서울과 근교, 지방의 漕倉·포구 등에서 현저하였다. 18세기말 이들 지역의 미가는 1석당 10냥을 호가하였고, 19세기에 접어들어서는 12∼13냥에서 15냥까지 등귀하는 경우도 흔히 나타났다. 또한 면포가격도 크게 등귀하여 18세기말 서울이나 비면작지대의 경우 1필당 3냥에서 3냥 4∼5전에 거래되었고, 19세기 전반에는 지방 장시에서의 시세가 보통 1필당 4냥까지 상승하였다. 물가는 18세기 후반 이후 경향적으로 상승하여 19세기 전반이 되면 18세기 전반 시세에 비해 평균 2배 내지 2배 반 정도 상승하고 있는 셈이었다.1053)
이 시기 물가상승 추이를 반영하며 서울을 중심으로 나타난 상품유통 현상이「穀荒」과「綿荒」이었다. 만성적 미가등귀를 뜻하는「곡황」은 18세기 서울의 인구증가와 미곡시장의 확대를 배경으로 대규모 상업자본을 갖춘 경강상인 등 비특권적 미곡상인들이 都賈활동과 租稅防納을 주도함으로써 형성된 독점적 미곡유통구조였다.1054)「면황」의 심화 역시 18세기 후반 이후 급증하고 있는 조세금납에 의해 서울과 연결된 특권적 면포유통구조가 해체되고 시장을 통한 면포유통이 발달하면서 성행한 면포상인들의 도고활동에 기인한 것이었다.1055) 곧 물가상승은 동전유통량 증대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화폐유통이 비특권적 상품유통의 발달, 대규모 상업자본을 갖춘 신흥사상의 성장 등과 상호 밀접한 관련 속에 확대됨으로써 현실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화폐유통이 확대되고 물가가 상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는 또한 전황이 심화되고 있었다. 동전유통량의 부족을 뜻하고 따라서 물가하락이 예상되는 전황과 물가상승(곡황)이 동시에 만성화되고 있는 유통경제 현실은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된 현상이 아니라 실상 이 시기 상품화폐유통의 특질을 반영하는 하나의 일관된 경제변동이었다. 당시 문제가 된 전황은 일반적인 동전유통량 부족이라기보다 대개「都民」이라 불린 시전상인과 공인 등 특권상인들의 화폐 부족을 뜻하기 때문이었다.1056) 말하자면 이 시기 전황은 사상의 상업자본이 특권상인의 그것을 압도하게 되면서 특권상인이 화폐유통의 특권적 지위를 상실하고 있다는 자본력의 약화과정, 봉건적 유통기구의 해체과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18세기 전반에 나타났던 전황의 연장이면서도 이 시기 전황이 그 이전과 구별되는 점은 여기에 있었다. 화폐유통의 주도권은 신흥사상에게 이전되고 있었고, 시·공인들은 대부분「債逋」을 야기하면서 자금난에 시달렸다.
18세기 후반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나타난 이러한 상품화폐유통의 변동은 특권상인을 기반으로 서울의 유통구조를 조절해가는 봉건정부의 유통정책이 근본적인 한계를 맞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는 원활한 재정운영을 불가능하게 하고 재정악화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봉건정부는 이미 정조연간부터 그 대책에 부심하였다. 정부의 대책은 크게 두 방향에서 모색되었다.1057) 우선 기존의 봉건적 유통기구를 유지하기 위한「小變通」으로서 물가와 전황에 대한 일시적인 대증요법을 실시하였다. 물가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정부가 비축한 미곡과 면포를 대량 방출하여 發賣하였고, 조세 징수시 규정 이상의 금납을 억제하고 면포징수를 강화하였으며,「곡황」과「면황」을 주도하는 都賈革罷도 강조되었다.「전황」에 대해서는 특권상인의 자금난을 덜어주기 위한 자금 대여(放債)를 시행하고,1058) 대규모 주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실행되지는 못하였지만 일부 논자들은 高額錢이나 은화 또는 淸錢 등의 유통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물가상승과 특권상인의 위축은 이 시기 상품화폐유통의 발전에 따른 구조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소변통으으로는 해결될 수 없었다. 여기에 일종의「大變通」으으로 추진된 것이 정조 15년(1791)의「辛亥通共」이었다.신해통공은 전면적인 것은 아니나 六矣廛 외의 시전의 특권을 혁파하여 난전의 상업 자유화를 인정한 획기적인 상업정책이었다.1059) 또한 신해통공은 서울의 상권을 장악하고 곡황과 전황을 주도하고 있는 사상의 자본력을 봉건적 유통기구에 적극 수용하여 서울 유통구조의 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악화되고 있는 국가재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포괄적인 의미의 유통정책이었다. 곡황이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米廛이 육의전에서 제외되고 있다는 사실에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봉건정부는 특권상인에 대한 대안없는 지원보다는 신흥 상업자본의 유통주도권과 도고활동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전황과 곡황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봉건정부의 이러한 유통정책은 이에 상응한 재정개혁과 상공업대책이 뒤따르지 않는 가운데 오히려 물가상승과 도고활동만 조장하고 재정악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이후에도 봉건적 재정구조는 완강히 견지되었고, 지속되는 주전사업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화폐통제력은 현저히 약화되어 갔다. 이에 따라 과중한 국역부담에 시달리는 봉건적 유통기구의 해체는 가속화된 반면, 사상은 봉건정부와 긴밀한 유착 속에 도고활동을 더욱 확대하고 貢人權·主人權 등 각종 이권에 참여함으로써1060) 화폐유통의 주도권을 강화해 나갔다.
1052) | 方基中, 앞의 글(1984), 176·18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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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3) | 方基中, 앞의 글(1990), 219쪽. 이러한 추세는 물가 수준의 주요 지표가 되는 農地가격이나 導掌價·貢人價·主人價와 같은 각종 이권가격 상승률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
1054) | 이 시기 미곡유통과 경강상인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姜萬吉, 앞의 책. 李世永,<18, 9세기 穀物市場의 형성과 流通構造의 변동>(≪韓國史論≫9, 서울大, 1983). 高東煥, 앞의 책. |
1055) | 方基中,<朝鮮後期 軍役稅에 있어서 金納租稅의 전개>(≪東方學志≫50, 1986), 143∼145쪽. ―――, 앞의 글(1990), 220쪽. |
1056) | 方基中, 위의 글(1990), 220쪽. 李載允,<18世紀 貨幣經濟의 發展과 錢荒>(延世大 碩士學位論文, 1994). |
1057) | 方基中, 위의 글, 221∼222쪽. 李載允, 위의 글, 제3장. |
1058) | 이른바「貢市錢貨散貸」로서, 이 때 시·공인과 군병에게 대여된 자금은 모두 15만 7천 냥에 달하였다. |
1059) | 姜萬吉, 앞의 책, 제5장. 劉元東,≪韓國近代經濟史硏究≫(一志社, 1977) 제5장. 金東哲,<蔡濟恭의 經濟政策에 관한 考察>(≪釜大史學≫4, 1980). |
1060) | 劉元東, 위의 책, 제7·8장. 吳美一,<18·19세기 새로운 貢人權·廛契 창설운동과 亂廛活動>(≪奎章閣≫10, 서울大, 19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