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18세기 전반∼19세기 중엽 조세금납의 전개
가) 포납조세의 금납화
이와 같이 조세금납은 국가면포수취체계의 모순을 극복한다는 발생사적 성격과 관련하여 성립한 지 20∼30년 만에 봉건적 재정구조·유통구조를 위협할 정도로 급속하게 증대하였다. 조세금납은 여러 면에서 조세부담자·농민층에게 유리하였고, 부담경감의 방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세금납의 성격은 화폐경제가 농촌사회에 침투하는 과정에서 면포수탈의 한계가 극복되는 한 측면에 불과하였다. 이 시기 화폐경제의 확대 속에서 농민층은 화폐구득을 위한 상품생산과 유통시장에 편입되어 많은 경우 궁박판매와 고리대에 의해 파산하고 몰락하였다. 조세금납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양상을 촉진하고 확대시키는 수탈기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금납이 포납보다 농민층에게 유리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부담경감에 불과하였다.
조세금납의 이러한 양면성은 봉건사회 해체기 화폐경제의 전개에 나타나는 일반적 특징으로서, 18세기초「전황」을 통해 전면화하였다. 전황은 상품생산과 시장권의 성장에 기초한 화폐경제의 확대 속에서 동전이 봉건관부·지주·부상들에게 집중됨으로써 야기된 현상이었다. 동전퇴장과 고리대가 발달하였고, 농민층의 화폐구득은 어려워져 갔다. 또한 동전가치의 상승에 따라 물가가 하락세를 보여 조세금납 성립기에 비해 금납이 부세경감의 방편이 될 수 있었던 조건은 악화되었다. 그러나 전황하에서도 기존의 조세금납 추이는 크게 변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그것은 영조 초기 전황대책으로 세 차례에 걸쳐 시도된 조세금납제의 폐지, 곧「純木令」의 실시와 그 좌절과정을 통해 여실히 확인되었다.1088)
「순목령」에 의한 포납복귀는 동전이 이미 일반적 가치척도·교환수단으로 확립되어 있는 이 시기 유통경제의 성격상 실현 불가능한 조치였다. 그것은 “쌀을 가지고 동전을 구한 후 동전으로 면포를 구입해야 한다”1089)는 지적과 같이, 농민층에게 화폐구득과 면포구득이라는 이중의 유통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오히려 부담만 가중시켰다. 또한 물가가 작전가에 비해 현저히 낮다면 금납 경향이 저하될 수 있었으나 전황하에서도 물가는 그러한 정도까지 하락하고 있지 않았다.1090)「純木上下」를 전제로 하는「순목령」은 국가재정 운영과 관련해서도 불가능한 조치였다. 국가재정은 이미 화폐경제에 깊이 편입되어 있었고,「순목령」은 재정에 의존하는 서울의 봉건적 유통기구(공·시인)의 상업활동을 위축시킬 뿐이었다.
이와 같이 화폐유통의 확립, 화폐경제의 농촌침투는「전황」하에서도 조세금납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봉건정부도 조세금납을 필연적 추세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조 11년(1735) 3차「순목령」을 철회한 후 대동목은 기왕의「錢木參半」으로 복귀하였고, 소농민에게 집중되고 있는 군포의 경우에는 면작조건을 배려하여「從民願」 수봉을 채택하고 이를 법제화하였다.1091)
이에 따라 포납조세의 금납은 18세기 중엽 이후 화폐유통의 발전과 함께 더욱 증대하였다. 田結稅에서 금납을 주도한 대동목의 경우 19세기 중엽까지「전목참반」작전율이 유지되는 가운데 격심한「면황」이 형성될 때에는 수시로「木邊代錢」이 給災로서 실시되었고, 19세기 전반에는 전액 금납을 공인한 읍도 출현하였다.1092) 전세목은 18세기 중엽 이후에도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거의 금납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19세기 전반 예외적인 조치로서 몇 읍에는 금납이 허용되었다.1093)
18세기 중엽 이후 조세금납 전개의 새로운 계기를 부여한 것은 均役法의 실시였다. 균역법은 과중한 군역민의 부담을 半減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재정화폐화에 의해 불안정해지고 있는 軍門 재정을 유지한다는 목적에서 실시하였다. 그리고 후자를 위해 均役廳을 신설하여 군문에 대한 給代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봉건정부의 의도와 달리 균역청 수입은 조기에 화폐화과정을 걸어 19세기초에 동전이 이미 수입의 90%를 차지하였고, 또한 대부분의 급대 운영이 지방재정을 압박함으로써 오히려 균역법은 재정구조를 동요시키는 배경이 되었다.1094)
이러한 균역법의 성격과 관련하여 군역세의 금납이 급증하였다. 영조 11년 수취방식이「종민원」으으로 바뀐 군포에서의 금납은 세액이 반감되면서 한층 증대하여, 정조 즉위 후에는 “매해 군포의 純錢 상납이 고질적인 병폐”1095)라 지적될 정도로 금납비율이 급증하였다. 이에 따라 각 군문에서는 면포가 크게 부족하여 금납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다른 한편 조세수취에 의한 면포 공급이 격감하면서 서울에는「면황」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균역법 이후 군포의 반감과 금납의 확대는 국가면포수취체계를 전반적으로 해체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대책에 부심한 봉건정부는 금납을 일정한 수준에서 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정조 9년(1785) “各軍門 各衙門 身布는 純木 혹은 木錢參半 징수를 병행하며, 만약 면작 흉년으로 인한 稟請이 아니면 순전 징수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군포수취법을 마련하였다.1096)
새 군포수취법의 취지는 민원에 따르는 수취방식을 폐지하고 役種에 따라 작전율을 정한 데 있었다. 즉 훈련도감 소속 군포는「純木」, 훈련도감 외의 병조·금위영·어영청 등 중앙군문 소속 군포는「錢木參半」상납으로 정하였고, 각 아문 소속 군포는 관행으로서「순전상납」을 허용하였다. 작전율의 조정과 더불어 새 군포수취법에서는 18세기 전반부터「면황」이 발생하였을 때 급재의 일환으로 실시하였던「分數作錢(木邊代錢)」을 완전히 제도화하였다.1097) 이는 면포수취 강화에 따른 군역민의 반발을 예상하여 마련한 대책이었다.
그리하여 18세기말 이후 군포 금납은 세 계통의 작전율을 원칙으로 하면서「분수작전」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의해 18세기 후반까지 급증하였던 금납의 추세는 일정하게 둔화되었다. 일정액의 면포수취를 유지하고자 하는 봉건정부의 의도를 반영하여 세 계통의 작전율은 19세기 이후에도 계속 시행되었다.「분수작전」의 분수율도 대개는「순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정액의 면포비납은 항상 존재하였다. 특히 1840년대 헌종연간에 접어들면서 분수율은 더욱 낮아졌다. 이에 따라 18세기말 이후 19세기에 접어들어서는 군포 지불수단을 둘러싼 봉건정부와 농민층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특히 이 시기의 면포가격은 작전가를 훨씬 상회하여 1필당 3냥 5전∼4냥까지 상승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분쟁은 불가피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를 이용한 향촌의 말단 稅吏들의 防納수탈도 격심해졌다.
나) 미납조세의 금납화
숙종 5년(1679)의「작전규정」에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금납 성립기에는 米納조세의 금납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포납조세의 금납이 발달하면서 18세기 전반 점차 조세미 금납이 공인된 지역이 형성되었다.1098) 조세미 금납은 전결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숙종 39년 황해도의 新溪·谷山·瑞興·遂安 등「山郡 4읍」의 전세와 대동세, 연읍 鳳山郡의 田稅太 금납이 허용된 이래, 영조 25년(1749) 경상도의 安東·尙州·醴泉·比安·龍宮·聞慶·咸昌 등「嶺底 山郡 7읍」의 전세, 영조 28년 황해도의 黃州·豊川·載寧·信川·長淵·安岳·文化·松禾·長連·殷栗·봉산 등「長山 이북」11 연읍의 전세·대동세, 영조 31년 禮安·榮川·豊基·順興·奉化 등「竹嶺 山郡 5읍」의 전세가 각각 금납화되는 등, 18세기 중엽까지 황해도 15개읍, 경상도 12개읍 등 총 27개읍의 전세나 대동세 금납이 공인되었다.
이와 같이 일부 지역에서 전결세 금납이 출현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징세지대 편성과 관련한 세곡운송상의 폐단 때문이었다. 세곡의 중앙수송은 모두 선운에 의존하고 있는데, 지역 조건이 선운에 적당하지 않을 경우 과다한 경비 지출과 加斂이 뒤따랐다. 산군이면서도 전세를 미납해야 하는「田稅作米山郡」이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들 지역에서는 조창까지의 전세곡운반에 따르는 가렴이 조세부담을 가중시키는 주요한 원인이었기 때문에, 농민층은 동전유통이 정착되면서 끊임없이 전세 금납을 요구하였다. 금납이 허용된 지역은 황해도 연읍을 빼고 모두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전세작미산군」이었다. 또한 황해도의 11개 연읍도 船路가 험한 특수지역으로서 세곡운반시에「故敗」·「偸食」등의 폐단이 많았기 때문에 금납화된 곳이었다.
세곡운송의 과다한 가렴을 극복하고자 하는 조세부담자·농민층의 집요한 금납요구는 18세기 후반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 결과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충청도의 永春·延豊·丹陽·淸風 등「半山郡」4읍의 전세, 堤川(연읍)의 전세·대동, 강원도 연읍인 伊川·安峽·楊口·寧越·麟蹄·鐵原·橫城 등 7읍의 전세·대동, 황해도 연읍인 兎山·平山 2읍의 전세, 토산·海州·延安·白川〔배천〕·瓮津·康翎·金川 등「長山 이남」7읍의 대동소미, 경기도 長湍(연읍)의 전세·대동 등 모두 21개 읍의 전세 내지 대동세 금납이 추가로 인정되었다.
전세금납이 실시되자 作錢價를 둘러싼 분쟁이 심화되었다. 봉건정부는 숙종 39년 전세금납을 처음 공인할 때 작전가를 米 1석당 7냥, 田米 5냥, 太 3냥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는「전황」하의 시가보다 크게 높은 것으로서 이에 대한 조세부담자·농민층의 저항은 불가피하였다. 결국 조세부담자의 지속적인 요구에 의해 작전가는 영조 10년대 후반경에 1석당 5냥으로 인하되었고, 이는 면포의 1필당 2냥식과 함께 법정 작전가로 고정되었다.1099)
이와 같이 전결세의 금납은 징세지대 편성의 모순과 관련한 부담증대를 해결하고자 하는 조세부담자·농민층의 적극적인 금납화운동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예컨대「전세작미산군」은 실제 전라도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곳에서의 전세미 운송에 따른 가렴과 분쟁은 위의 지역보다 더욱 심하였지만 금납은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賃船上納」되는 광범한 연읍지역의 전결세는 철저하게 금납과 차단되어 있었다. 미납조세의 금납을 억제하고자 하는 봉건정부의 입장은 완강히 견지되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중엽까지 전결세미 금납이 공인된 지역은 모두 48개 읍에 이르는 데 그치고 있었다.
한편 18세기 전반까지 금납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던 軍保米는 균역법 이후 지불수단을 둘러싼 분쟁이 심화되면서 점차 금납화과정을 걷게 되었다.1100) 그것은 세액이 반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가렴과 중간수탈이 증대하고 미가가 상승함으로써 군보미 징수가 전반적으로 가혹한 방납수탈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군역민 한 사람이 부담하는 미 6두역에 대한 防納價는 보통 6∼7냥으로서, 작전가의 3배에 이르고 있었다. 이에 대한 군역민의 저항은 면역·피역 등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기존 군역제 내에서 적극 추진된 것이 금납 요구였다. 금납이 최선의 변통책이라는 것은 봉건관료들도 대개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봉건정부는 군병을 미곡구매자로 전락시킨다는 이유로 금납을 수용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후반 이후 米保軍이 많은 경기·충청·강원·황해도에서는 장기간에 걸친 군역민의 금납화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결과 1840년경까지 전체 미보군의 22%에 해당하는 14,000여 명의 미보군이 錢保軍으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봉건정부는 결국 헌종 9년(1843)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 등 3군문 소속 미보군 34,775명의 군보미를 전면 금납화시키는「保米變通」을 단행하였다.1101) 대신 3군문의 동전수입에 해당하는 액수 만큼 균역청 結錢의 일부를 다시 미곡으로 징수하여 이를 3군문과 상호 교환함으로써 군병들의「放料米」를 해결하였다.1102)
1088) | 方基中, 앞의 글(1984), 172∼179쪽. |
---|---|
1089) | ≪備邊司謄錄≫76책, 영조 즉위년 10월 24일. 李匡德,≪冠陽集≫권 9, 啓 湖南御史書啓別單. |
1090) | 주 33) 참조. |
1091) | 方基中, 앞의 글(1984), 180쪽. |
1092) | 면포납이었던 충청도의 永春·丹陽·淸風·延豊과 경상도의 軍威, 마포납이었던 경상도의 咸陽·居昌·安義·山淸, 전라도의 長水·雲峯, 강원도의 平康·麟蹄·金化 등 14개 읍의 大同木·麻布가 금납화되었다. |
1093) | 경상도의 眞寶·軍威·英陽(면포납)과 강원도의 금화·평강(마포납) 등 5개 읍이 금납화되었다. |
1094) | 方基中, 앞의 글(1986), 124∼130쪽. 鄭演植,<均役法 시행 이후의 地方財政의 변화>(≪震檀學報≫67, 1989). 白承哲,<17·18세기 軍役制의 變動과 運營>(≪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90). |
1095) | ≪備邊司謄錄≫165책, 정조 6년 10월 15일. |
1096) | ≪大典通編≫戶典 徭賦. |
1097) | 「분수작전」은 위의 법정 작전율 이상의 금납을 허용하는 조치로서,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각 도(감영)에서 면작 흉풍을 조사한 군현 단위의「綿災實分等」을 종합하여 도 내의 군현별 면작 상황을 크게 尤甚·之次·稍實邑 등 세 유형으로 구분하고, 주로 우심·지차읍을 대상으로 작전율 인상을 稟請하도록 한 것이다. 말하자면 比摠制를 면포수취에 확대 적용한 것으로, 중앙에서는 이를 토대로 木邊 중 일정 비율의 금납 증액을 給災로서 허용하는 것이다(方基中, 앞의 글, 1986, 151∼156쪽). |
1098) | 이하 方基中, 앞의 글(1984), 180∼189쪽 및 앞의 글(1990), 206쪽 참조. |
1099) | ≪大典通編≫戶典 收稅. 이 법정 작전가에 의한 일반적인 전세금납을「元作錢」이라 한다. |
1100) | 이하 方基中, 앞의 글(1986), 130∼142쪽 참조. |
1101) | 이 때 군보미 6두의 작전가는 원 세액 2냥에 잡비 5전 4분을 가산하여 2냥 5전 4분으로 정하였다. |
1102) | 이를「結作米」라 부르는데, 결전의 작미는 전라도(作米量은 1결당 세액인 5전 중 3/5), 충청도와 황해도(작미량은 4/5) 등 3도의 연읍에서만 시행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