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4권 조선 후기의 사회Ⅱ. 향촌사회의 변동1. 친족과 촌락구조의 변화1) 친족·문중조직의 변화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1. 양반층의 증가와 분화
          • 1) 양반인구의 증가
          • 2) 면역인구의 증가
          • 3) 양반계층의 분화
        • 2. 양반서얼의 통청운동
          • 1) 서얼인구의 증가와 사회참여
            • (1) 서얼의 개념과 신분계층상의 지위
            • (2) 서얼인구의 양적 증가와 질적 변화
            • (3) 서얼의 정치·경제적 지위향상과 사회참여
          • 2) 서얼통청운동의 확대
            • (1) 18세기의 서얼통청운동
            • (2) 19세기의 서얼통청운동
        • 3. 중간신분층의 향상과 분화
          • 1) 중인층의 지위상승과 분화
            • (1) 중인의 특성과 성장배경
            • (2) 전문직 중인층의 지방관진출
            • (3) 부민층의 신분변화
          • 2) 중인의 통청운동
            • (1) 통청운동의 발기
            • (2) 통청운동의 전개
          • 3) 향리층의 지위상승과 분화
            • (1) 향리층의 분화
            • (2) 향리층의 신분지위 상승운동
        • 4. 서민층의 성장
          • 1) 서민의 경제적 성장
            • (1) 농민의 경제적 성장
            • (2) 공장의 경제적 성장
            • (3) 상인의 경제적 성장
          • 2) 서민의 신분상승운동
          • 3) 서민의 문예활동
            • (1) 문학에서의 활동
            • (2) 미술에서의 활동
        • 5. 노비신분층의 동향과 변화
          • 1) 노비 존재양태의 변화
          • 2) 노비정책의 전환
            • (1) 선상·입역의 폐지와 고립제의 실시
            • (2) 신공의 감액
            • (3) 추쇄정책의 전환
            • (4)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의 실시
          • 3) 노비의 신분상승운동
          • 4) 내시노비의 혁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1. 친족과 촌락구조의 변화
          • 1) 친족·문중조직의 변화
            • (1) 「문중」의식의 형성
            • (2) 문중활동의 전개양상
          • 2) 동족마을의 발달과 촌락조직의 변화
            • (1) 동족마을의 발달
            • (2) 촌락조직의 성격변화
        • 2. 지방행정체제의 변화
          • 1) 중앙통제적 지방제도의 강화
            • (1) 감영체제의 발전
            • (2) 수령권의 강화와 사족지배질서의 약화
          • 2) 면리제의 발전과 촌락운영질서의 변화
            • (1) 면리제의 발전
            • (2) 촌락운영질서의 변화
        • 3. 호구정책의 강화
          • 1) 누적·탈역호구의 증가
          • 2) 오가작통법의 시행
          • 3) 호패법의 강화
        • 4. 향촌자치체계의 변화
          • 1) 조선 중기 사족중심 향촌자치체계의 구조와 붕괴
            • (1) 조선 중기 사족중심 향촌자치체계의 구조
            • (2) 조선 후기 사족중심 향촌자치체계의 붕괴
          • 2) 관 주도 향촌지배질서의 성격
            • (1) 관 주도 향촌통제책의 강화
            • (2) 사족에 대한 견제와 향전금지
            • (3) 19세기 관 주도 향촌지배질서와 「이향」의 발호
        • 5. 계의 성행과 발전
          • 1) 조선 초·중기의 계
          • 2) 조선 후기 계의 성행
          • 3) 조선 후기 계의 제도적 발전
          • 4)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계의 변모
      • Ⅲ. 민속과 의식주
        • 1. 촌락제의와 놀이
          • 1) 촌락제의
            • (1) 제사이름과 제신
            • (2) 제사철과 제사비용
            • (3) 제장과 단당
            • (4) 제의 목적
          • 2) 연희와 놀이
            • (1) 가면극
            • (2) 인형극
            • (3) 남사당놀이
            • (4) 전승놀이
          • 3) 세시풍속
        • 2. 의식주생활
          • 1) 의생활
            • (1) 시대배경과 의생활
            • (2) 편복류와 양식
            • (3) 의료의 수급체제와 직조
          • 2) 식생활
            • (1) 조선 후기 식생활의 환경
            • (2) 조선 후기 식생활의 양상
            • (3) 숭유주의가 식생활에 미친 영향
            • (4) 조선조 궁중의 식생활
            • (5) 식품의 종류와 조리법의 발달
            • (6) 부엌세간과 식기
          • 3) 주생활
            • (1) 사회변동과 주거계층의 변화
            • (2) 서민주거의 발달과 지역적 특성화
            • (3) 풍수적용의 민간확산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1) 「문중」의식의 형성

 가족 및 친족제도로 반영되는 문중의 범위와 성격은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가 크게 다르다. 조선 전기의 가족 및 친족제도는 상속이나 제사관행을 통해서 확인되듯이, 중국의 종법체계와는 차이가 있었다. 조선 전기는 고려의 불교의례와 비종법적인 친족체제가 성리학의 보급과정을 통하여 점차 성리학적 禮制로 개혁되어 가는 과도기였다. 이러한 과도기적인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혼인에 있어서의 男歸女家婚이다. 그리고 이러한 혼인관습은 단순한 혼인의 습속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친족의 인식범위나 제사 및 재산의 상속 등 여러 사회관습에 작용하여 부처·자녀·친손과 외손을 동일시하는 「兩系親族 = 非父系親族體系」를 존속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친족 및 종법의식은 사족들의 성리학 이해가 심화되고,≪朱子家禮≫가 적극적으로 보급되면서 점차 변모하여 갔다. 더욱이 양란 이후 체제유지를 위하여 집권사족들이 예론을 중시한 경향은 이같은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바로 이러한 사회사상적 배경에 기초하면서 조선 전기의 가족 및 친족의식은 17세기 중엽을 분기점으로 부계친족 중심의 문중결속과 이를 통한 전면적인 친족결합 모습의 재편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제까지 밝혀진 부계친족 중심의 친족의식은 제사상속 및 분재상에서 남녀차등 및 장자우대의 경향, 족보에서 보여지는 여계친족 수록범위의 축소, 입양제도의 일반화 등으로 요약된다. 아울러 이러한 가족 및 친족의식의 변화는 향촌단위의 사회구조상에도 반영되어 족계나 문중조직의 발달, 동계나 문중서원의 발달, 동족마을의 형성이라는 조선 후기 문중활동의 기반이 되었다.468)

 조선 후기에 가족 및 친족에 대한 관념상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변화는 우선 남귀여가혼의 관습이 사라져 갔다는 점이다. 이는 모계친족과의 상관이 점차 축소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조선 후기까지도 유제가 부분적으로 남기는 하지만, 17세기 후반에는 壻留婦家의 기간이 1년 또는 반년 정도로 단축되었고 이후 가부장적인 부계친족제가 더욱 일반화되면서 점차 해소되어 갔다. 이러한 부계친족 중심의 친족의식은 친족범위를 축소시켜 족보의 기록범위와 기록방식도 변하게 만들었다. 조선 후기의 족보들은 조선 전기의 족보와 분명히 구별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즉 조선 전기의 족보는 부계를 기준으로 하면서 동시에 「父-子系」와 「父-女系」가 동일한 체계와 비중으로 기재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족보에서는 외손의 수록범위 축소, 자녀의 기록순서가 나이 순에서 先男後女로, 嫡庶를 구분하면서 입양자가 증가하는 등의 변화양상이 구체적이고 일반적으로 발견된다. 17세기 후반 이후 간행되는 부계친족 중심의 족보들은 대부분이 ‘詳內略外’를 표방하면서, 그리고 여계는 사위와 그 외손1대에 한정하여 기록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469) 이러한 17세기 중엽 이후의 변화는 점차 가속화하여 대체로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보편화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입양결정이 부계친족과 모계친족간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향을 통하여 잘 살필 수 있다. 즉 입양과정에서 부변과 모변의 양변합의 비중은 광해군 10년(1618) 96%, 인조 13년(1635) 100%, 숙종 3년(1677) 69%, 숙종 34년 23%, 숙종 43년 2.9%로 나타난다.470) 이를 보면 17세기 전반기만하여도 부변과 모변의 합의가 거의 일반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후 점차 감소되는 추세를 보이다가 18세기 전반 이후는 거의 처변이 제거되어 부계친족 중심으로 고정되는 양상을 살필 수 있다.

 부계친족 중심의 친족체계는 재산과 제사의 상속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내외친을 망라하는 조선 전기의 친족관념하에서는 재산상속에서 자녀는 균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분재되는 재산의 유래도 부변·처변·모변 등으로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적장자를 중심으로 하는 친족체계 아래서 17세기 중엽 이후는 장자우대, 남녀차등이라는 경향이 일반화되어 갔다.471) 이를 통해서 조선 전기의 균분제는 17세기 중엽부터 차츰 무너져 장자우대나 남녀차등 분배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18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균분상속은 거의 사라지고 대체로 장자우대와 남녀차등의 분재가 일반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472)

 그러면 조선 전기의 균분상속제가 어떠한 이유로 17세기 후반 이후는 점차 차등상속의 경향으로 변화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의 가능성을 생각하여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사회적 배경하에서 발생했던 균분상속제가 17세기 이후 해소되고 차등제로 변화하는 배경은, 균분상속제가 오랜 기간 동안 시행되면서 결국 사족들의 가산분할을 초래하고 대부분의 사족들로 하여금 세대가 내려갈수록 빈곤화와 생산력 저하를 맞게 했으며, 이것이 결국 차등상속의 한 원인이 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즉 재산의 자녀균분은 15세기 상황에서는 사족들의 재산확대의 수단과 과정으로 긍정적인 작용을 하지만 실제 균분상속의 지속은 사족의 재산소유를 영세화시켜 17세기 이후는 그 장애의 요인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반대현상으로 차등상속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473)

 이와 더불어 재산의 균분상속이 차등상속으로 변화되는 요인으로는 장자 중심의 가부장제에 입각한 종법질서의 강화를 들 수 있다. 부계친족 중심의 가부장적인 종법윤리의 보급은 宗家 및 장자를 중심으로 하는 친족의식과 사회경제적 토대를 중시하도록 만들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또 가족수의 팽창으로 인한 자기 제어와 분별의 필요성이 발생한다면 장자 중심의 종가를 우선 보존하고 선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더욱이 모든 친족이 균등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면 이러한 문제는 고려의 여지가 없을지 모르나, 친족간의 경제적 편차가 발생하고 가문의 사회경제적 토대가 위협받게 된다면 당연히 종가와 장자만이라도 선택적으로 경제적인 토대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양란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화과정에서 사족들간의 경제력 편차가 더욱 확대(분화)됨으로써 과거와 같은 가문간의 유대와 호혜적인 공유개념으로 균분상속이 유지되기 어려웠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과 필요에 따라 장자우대의 상속제나 종가 중심의 재산집적 및 유지를 꾀하는 사회적 관행들을 일반화시켰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조선 후기의 문중기반과 조직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양반사족의 대응방식이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 仁祖反正을 계기로 한 정국의 변화도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세력은 훈척세력 및 대북정권을 배척하는 과정에서 대외적으로 崇明排淸의 대의명분과 함께 대내적으로는 綱常 우선의 예법질서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禮制 역시 종래의 부부·부모·자녀라는 수평관계에서 父 - 夫 - 子를 중심한 가부장적 수직간계로 재편성됨으로써 夫婦·父子·君臣·嫡庶·主奴·長幼의 철저한 상하·주종관계를 채택하였다. 이러한 지배이념의 변화야말로 친족 및 종법체계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또 다른 배경이 되었다고 보여진다.474) 이에 따라 喪葬禮와 상속제, 입후봉사문제, 족보편찬, 동족촌락 등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동성혼 금지, 異姓不養制 정착, 자녀차등분재, 輪廻奉祀에서 장자봉사로의 변화와 함께 유교의례의 보급으로 봉제사 접빈객의 사조가 일반화되면서 奉祀條의 증가와 장자봉사로 인한 장자상속분의 증가가 17세기 후반 이후 정착되었다고 생각된다.

 제사상속의 문제도 이러한 변화와 그 궤를 같이한다. 조선 전기에서 17세기말까지는 윤회와 장자봉사가 공존하다가 18세기 초엽부터는 윤회봉사가 사라져 갔다. 아울러 조선 전기 가묘와 조상제사에 관한 법제적 정비과정 속에서 보듯이 몇 대를 봉사하느냐의 문제도 4대봉사가 아니었다. 예컨대≪經國大典≫에 따르더라도 6품 이상은 3대, 7품 이하는 2대, 서인은 부모만 제사토록 되어 있었고 李彦迪의≪奉先雜儀≫나, 李珥의≪擊夢要訣≫에서조차 3대봉사를 일반관례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이후의 예서들에서는 4대봉사와≪주자가례≫와 같은 사당제를 일반적으로 채택하였다.475) 이는 17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야 사족들도≪주자가례≫에 입각한 의례체계를 완전히 이해하였고, 이를 시행할 만한 사회경제적인 배경이 마련되었음을 말해주는 일면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476)

468)李海濬,<朝鮮後期 門中書院 發達의 推移>(≪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1).

―――,<朝鮮後期 門中活動의 社會史的 背景>(≪東洋學≫23, 檀國大, 1993).
469)친족의 결속력과 그 범위를 살피는 데는 行列의 사용도 주목된다. 이를 文化柳氏의 사례를 통해 보면 1340∼1640년대(13∼15세) 형제사용에서, 1430∼1640년대(16∼20세) 형제·4촌·6촌까지의 行列 사용이 일반적이었으나(이는 조상제사가 증조부모까지였던 이 시기의 제사관행과도 관련된다고 생각됨), 대체로 17세기 중후반에 해당되는 22세부터는 8촌까지의 항렬 사용이 일반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흔히 고조부모 이하를 「堂內」로 부르는 것과 일치하며, 이후의 시기에는 10촌·14촌으로 확대되어 고종 원년(1864)의 족보에서는 완전한 대동항렬이 사용되기에 이른다.
470)崔在錫,<(朝鮮時代 養子制와 親族組織>(≪歷史學報≫86, 1980).
471)崔在錫, 앞의 글(1972). 이와 함께 재산의 소유 계기도 전과 같은 모변이나 처변의 구분이 사라지고 다만 「傳來財産」으로 단일화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崔在錫의 분석에 의하면 분재의 시기별 변화는 다음의 표와 같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균분상속의 기본틀이 무너지고 있음과 균분상속이 지켜지지 않으면서 처변재산의 감소를 반영하는 현장으로 보여진다.

구 분 1500∼1649 1650∼1749 1750∼1850 비율(%)
균 분

장 남 우 대

남 녀 차 별

남자균분·여자차별

장남우대·여자차별

장남 아닌 자 우대
21(21)

1( 1)

0( 1)

0( 0)

0( 0)

2( 3)
22(19)

8( 4)

2( 1)

4( 5)

0( 2)

2( 6)
0( 4)

0( 1)

0( 8)

1( 5)

2( 1)

0( 3)
43(44)

9( 6)

2(10)

5(10)

2( 3)

4(12)
66( 52)

14( 7)

3( 12)

8( 12)

3( 3)

6( 14)
24(26) 38(37) 3(22) 65(85) 100(100)

<분재기에 나타난 노비 및 (토지)분재의 시기별 통계>

472)그러나 이는 제사상속의 문제와 결부되는 문제, 즉 제사를 윤회로 하느냐 장자가 맡느냐에 따라 장자의 분배량은 달리 계상될 수도 있다.
473)조선 전기의 사회적인 배경에서 발생했던 균분상속제가 17세기 이후 해소되는데는 성리학적 윤리의 보급과 예학의 발달, 이에 따른 조상숭배와 동족관념의 강화, 田民의 세분화 및 재산의 영세화가 고려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金容晩, 앞의 글 및 李樹健, 앞의 글).
474)李海濬, 앞의 글(1993).
475)인조 10년(1632) 申湜(1551∼1623)에 의하여≪家禮諺解≫가 간행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파악되고 있다.

張哲洙,<祠堂의 歷史와 位置에 관한 硏究>(文化財硏究所, 1990).

高英津,≪朝鮮中期 禮說과 禮書≫(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2).
476)鄭勝謨,<喪·葬制度의 歷史와 社會的 機能>(≪韓國의 喪葬禮≫, 국립민속박물관, 1990).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