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연극
(1) 산대나희
나라의 지도원리로서 유교를 채택한 조선조는 척불숭유의 정책을 시행하였으므로 불교왕조였던 고려의 연등회나 팔관회 등의 의식은 계승하지 않았으나 儺禮와 山臺雜劇은 이어져 더욱 성행되었다. 특히 나례는 고려 예종조(1105∼1122) 이후 점차 驅疫보다 나례의식 후에 거행된 雜戱部가 확대되어 나례가 儺戱로 인식되고, 더욱 본말이 뒤바뀐 느낌이었다. 즉≪朝鮮王朝實錄≫에 산견되는 바 “觀儺는 즉 雜戱이다”라거나 “儺禮의 설치는 본래 놀이하기 위한 것으로 매우 잡스러운 놀이이기는 하지만 볼 만한 것이다(儺禮之設, 本爲戱事 雖極雜戱 而觀之)”라는 기사들860)로써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조에 들어 儺禮都監이나 山臺都監을 두어 관장하던 나례는 섣달 그믐날에 행하던 驅儺 때만 아니라 중국사신을 영접할 때나 임금의 祔廟還宮 때나 종묘친제 때, 공자묘를 참배하는 謁聖 때, 대비의 壽宴인 進豊呈 때, 임금의 각종 行幸 때, 지방장관 등을 환영할 때, 宴樂歡娛 때 등 광범위하게 公儀로서 행하여졌으며, 이 때 공연한 山臺戱는 山臺雜戱·山臺儺禮·儺戱 등으로 그 명칭을 혼용하였으며 놀이 내용도 다채로워졌으나 기본적으로는 고려의 산대잡극이나 나희와 다름이 없었다.
조선 초기 문종 즉위년(1451) 6월, 중국사신을 맞이할 때 나례의 설치 여부를 놓고 논의한 것이 보이는데, 그 기록에서 조선조 나례희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861) 즉 그 놀이(戱謔)의 내용을 廣大의 ‘西人·注叱·弄鈴·斤頭’ 등 規式之戱와 水尺(倡優)의 ‘僧廣大’ 등 笑謔之戱와 악공들의 음악의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 고려의 百戱와 음악 양부에 비해 소학지희가 뚜렷이 독립된 것과 성종 때 편찬된≪樂學軌範≫의 鶴蓮花臺處容舞合設條로 보아 구나 뒤의 가무부문이 확장된 것을 특색으로 들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