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Ⅰ. 민중세력의 성장1. 신분제의 이완과 민중사회의 성장2) 17세기 위기 이후 대민 지배정책의 전환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1. 신분제의 이완과 민중사회의 성장
          • 1) 사족지배구조의 정착과 신분구조의 변화
          • 2) 17세기 위기 이후 대민 지배정책의 전환
            • (1)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의 전환과 ‘여민휴식’정책의 철회
            • (2) 공동납체제로의 전환과 18∼19세기 호적 운영의 변화
          • 3) 사족지배질서의 동요와 민중의 성장
        • 2.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공동체 질서와 민중
          • 2) 18세기 향촌공동체의 변화와 민중조직의 활성화
            • (1) 면리제의 강화와 민
            • (2) 동계의 변화와 분동
            • (3) 민중조직의 활성화
          • 3) 19세기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향회의 활용
            • (2) 민중조직과 농민항쟁
        • 3. 민중운동의 사상적 기반
          • 1) 성리학에 대한 사상적 도전
            • (1) 성리학의 교조화
            • (2) 민중사상의 확산
          • 2) 민중운동의 사상적 특성
            • (1) 민중운동 속의 사상경향
            • (2) 민중사상 전파의 주체
            • (3) 정부의 대응책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과제
          • 1) 민중세계의 각성
          • 2) 유대관계의 강화
          • 3) 향권의 추이
          • 4) 사회세력의 동향
        • 2. 유민과 명화적
          • 1) 유민
            • (1) 유민발생의 배경
            • (2) 유민의 실태와 유입처
            • (3) 정부의 유민대책
          • 2) 명화적
            • (1) 명화적 발생의 배경과 조직체계
            • (2) 활동양상과 그 성격
            • (3) 정부의 대책
        • 3. 여러 지역의 항쟁과 ‘무신란’
          • 1) 18세기 초 민중의 동향과 변산군도
          • 2) 무신란의 발단과 전개
            • (1) 18세기 초 정치정세와 ‘무신당’의 결성
            • (2) 무신당의 반정계획과 지방토호·녹림당의 가세
            • (3) 무신란의 전개와 향촌사회의 동향
            • (4) 무신란의 참가계층과 그 성격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특성과 항쟁의 배경
            • (1) 서북지방의 사회·경제적 특성
            • (2) 매향과 향권의 동향
            • (3) 중앙권력의 구조적 수탈
          • 2) 항쟁의 과정
            • (1) 서북민의 저항과 홍경래 난의 발발
            • (2) 홍경래 난의 전개과정
          • 3) 항쟁의 결과
            • (1) 홍경래 난 전후 향촌지배세력의 변동
            • (2) 반봉기군 ‘의병’의 향권 장악
            • (3) 서북민항쟁의 역사적 의의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여건
            • (1) 사회경제적 배경
            • (2) 정치적 여건과 지방사회의 운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1) 항쟁의 발생 지역
            • (2) 항쟁의 직접적 계기
            • (3) 항쟁의 전개과정
            • (4) 항쟁의 참가층과 주도층
            • (5) 항쟁조직
            • (6) 요구조건
            • (7) 공격대상
          • 3) 정부의 대책과 항쟁의 의미
            • (1) 농민항쟁에 대한 정부의 대응
            • (2) 삼정에 대한 대책
            • (3) 이정책에 대한 반대 논의와 저항
            • (4) 농민항쟁의 평가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1) 변란과 민란
          • 2) 변란발생의 배경
            • (1) 사회적 모순의 심화와 ‘저항적 지식인’의 활동
            • (2) ‘양이’의 침공과 ‘이단사상’의 만연
          • 3) 변란의 추이
            • (1) 19세기 전반의 변란
            • (2) 해서, 영남세력의 변란
            • (3) 광양란
            • (4) 이필제란
            • (5) 기타
          • 4) 변란의 성격
            • (1) 변란의 조직과 운동구조
            • (2) 변란의 이념
            • (3) 변란과 19세기 후반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17세기 위기 이후 대민 지배정책의 전환

(1)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의 전환과 ‘여민휴식’정책의 철회

 임진왜란 종결 이후 복구사업이 신속하게 전개되면서 전쟁으로 위축되었던 조선사회는 점차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 사회가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에 비례해서 국가의 대민 지배정책의 기조도 점차 변화되어 갔다. ‘여민휴식’정책이 철회되고 민간경제 및 사회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전환된 것이다. 17세기 국가의 대민 지배정책은 광해군, 인조 때와 효종, 현종, 숙종 때의 그것 사이에서 일정한 차이가 발견된다.

 우선 광해군 때의 정책을 살펴보면, 광해군은 자신이 왕세자로서 직접 전란을 경험한 바 있기 때문에, 광해군 때 국가정책의 방향은 선조 때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광해군 재위 기간 동안 가장 개혁적인 정책으로 평가되던 호패법이 양반층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시행 3개월 만에 폐기될 정도였다. 광해군 때의 최대 성과는 경기지방에 제한적으로 실시한 大同法이었을 뿐이었다. 反正으로 집권에 성공한 인조 때의 정국은 광해군 때의 실정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인조 때의 정국운영도 광해군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집권 초기 강력한 개혁 의지를 가지고 추진한 호패법이 丁卯胡亂의 발발을 계기로 철폐되고 있었던 사례에서, 인조 때에도 ‘여민휴식’의 기조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인조 때 정국의 성격과 관련하여 이 시기 실시된 양안과 호적의 실결수 및 호구 파악 수준을 검토해 보자.

 인조 13년(1635)에 끝난 하삼도의 量田에 따르면 당시 양안상의 등재 토지는 임진왜란 이전의 88.7% 수준인 89만 5천 856결007)에 불과했다. 그리고 인조 26년에 작성된 戊子戶籍에서는 임진왜란 이전 戶摠, 口摠의 각각 49.8%(44만 1천 321호), 36.8%(153만 1천 365구)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었다.008) 양안과 호적상에서 제시된 수치만으로 볼 때 임진왜란이 경과한 지 50여년이 지나도록 전란의 피해는 극복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양안과 호적상의 수치가 실제 토지개간 정도나 인구의 증감 정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국가 공권력이 토지와 인민에 대해서 미치는 영향력, 즉 국가의 대민 지배력의 강도를 보여주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여민휴식’정책의 기조가 인조 때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가정책의 기조가 전환기를 맞이한 시기는 효종 때였다. 北伐論의 대두와 적극적인 전쟁 수행 의지의 표출은 그러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경기, 강원도에 머물러 있던 대동법이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까지 확대 실시되는가 하면, 銅錢의 주조와 유통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 公奴婢推刷 사업의 실시와 같은 일련의 정책을 통해서 국가의 대민 지배강도는 이전 시기보다 한층 높아졌다. 이와 같은 국가의 정책기조는 현종 때에도 지속되어, 전라도 山郡에까지 대동법이 확대 실시되고 良役 자원의 확보를 위한 획기적인 방법인 奴婢從母法이 시행되기에 이를 정도였다. 이와 아울러 호적이 매 式年마다 작성되고 국지적이나마 양전사업 또한 계속해서 추진되었다. 당시 국가의 대민 지배력의 강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효종, 현종 때, 그리고 숙종 전반기에 작성된 호적의 호구 증가 추이를 살펴보자.

연 대 가 호 인 구 호당 구수 비 고
인조 26년

(1648)
441,321 1,531,365 3.47구 *한성부에서 작성한 民口總數(533,720호,

 1,793,701구)와 오차가 많이 발생.

*‘與民休息’政策의 추진 시기.
효종 8년

(1657)
658,771 2,290,083 3.48구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의 변화:北伐論

*효종 즉위년(1649)≪經國大典≫의 5家1統法

 시행안 제시, 효종 9년에 재확인.
현종 10년

(1669)
1,313,453 5,018,644 3.82구 *현종 7년(1666) 호적법을 엄격하게 운영:

 脫漏者에 대해서는 全家徙邊刑에 처함.

*한성부에서 작성한 民口總數(1,313,652호,

 5,018,744구)와 오차가 크지 않음.
현종 13년

(1672)
1,176,917 4,695,611 3.99구 *현종 11·12년(1670∼71)의 庚辛大飢饉을 경험.
숙종 4년

(1678)
1,342,428 5,246,972 3.91구 *숙종 원년(1675) 5家作統法의 전면 실시.

*紙牌法의 실시.
숙종 19년

(1693)
1,546,474 7,188,574 4.65구 *숙종 7년(1681) 女子入籍法을 엄격하게 적용.
숙종 25년

(1699)
1,293,083 5,722,300 4.46구 *숙종 21·22년(1695∼96) 乙丙大飢饉과 이후의

 전염병 유행으로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

<표 2>17세기 호적상의 호구 증가 추이

 인조 후반기까지 임진왜란 이전 호구수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던 호구수는, 효종 때에 접어들면서 급증하기 시작하여 불과 9년 만인 효종 8년(1657) 戶數 49.3%, 口數 49.6%가 증가하고, 그로부터 12년 후인 현종 10년(1669) 호수 99.4%, 구수 119.2%가 증가하는 등 급증추세를 보이다가 이후 점차 고정되는 경향을 보인다. 五家作統法의 실험 운영과 戶籍脫漏者에 대한 全家徙邊刑의 적용과 같은 강력한 호구정책에 힘입어 현종 때에는 主戶로 등재 가능한 실제 가호에 근접하는 수치가 확보될 수 있었던 것이다. 1가호당 평균 구수의 증가추세에서도 국가의 호구 파악 강도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다. 즉 호당 평균 구수는 3.47명(인조 26년)→3.48명(효종 8년)→3.82명(현종 10년)→4.46명(숙종 25년)으로 계속 증가추세를 보이다가 이후 고정되고 있다. 호적 등재상에 나타난 호구수를 통해서 국가의 대민 지배력의 강도를 측정할 때, 임진왜란 이후로부터 인조 때까지가 동일한 정책적 기조가 유지된 시기로, 그리고 효종, 현종 때 이후 시기가 동일한 시기로 구분된다고 생각된다. 요컨대 효종, 현종 때에는 임진왜란 이후 인조 때까지 국가의 주요 정책기조로 활용되던 ‘여민휴식’정책이 철회되고, 민간경제와 사회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한층 강화되는 시기로 선회했다고 볼 수 있다.

 효종 때 이후 국가의 강력한 대민 지배정책의 실시는 양반층에게는 결코 유리할 것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와 노비가 국가의 공권력 아래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부세운영과 관련되는 한 국가는 양반층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었다. 良役弊端의 모순이 점증하던 이 시기, 이 문제 해결에 임한 국가의 자세에서 그러한 사정을 읽을 수 있다. 양반층이 군역의 면역층으로 확인된 이후 군역, 곧 良役稅는 하층 양인층 일반이 부담해야 하는 일종의 신분세로 기능했다. 게다가 효종, 현종 때 이래 국가의 호구 파악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호적 등재 가호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바로 이 때 대동법 실시 이후 자체 재원조달의 기반을 빼앗긴 각 관청들은 새로운 재원으로 양역세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효종 때 이후 양역세 징수와 관련된 각종 모순이 커져갔으며, 그와 관련해서 몰락하는 양인층도 증가하고 있었다. 16∼17세기 전반까지 농민층에게 피해를 집중시킨 貢物防納 폐단의 자리를 양역세가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양역폐단이 중요한 사회모순으로 부각되자 국가에서는 양역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양역세를 양인층의 신분세, 곧 人丁稅로 고정시킬 것이 아니라 양반·상민 구분없이 모든 가호에서 부담하는 부세, 곧 家戶稅로 전환시키자는 주장이 그 과정에서 대두되었다. 戶布論이 그것이었다.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호포론이라고 할 수 있는 兪綮의 호포론을 통해 당시 양반층이 이해한 호포론의 내용을 살펴보자.

호포론 주장의 뜻은 添丁에 있지 않고 均役에 있으며, 富足에 있지 않고 救急에 있으며, 士族을 侵削하는 데 있지 않고 영원히 免役을 허락하는 데 있다(≪孝宗實錄≫권 21, 효종 10년 2월 갑신).

 유계의 호포론은 士族戶에 대해서도 收布를 허용하되 양반층의 면역이라는 이전 시기의 추세를 철저하게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대부분의 양반층은 양역세의 가호세로의 전환을 촉구한 유계의 호포론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보였다. 양반층은 일반 상민층과는 다른 특권 신분으로서 신분세인 양역세를 부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세운영과정에서도 일반 상민층과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양반층의 면역을 전제로 한 호포론은 실행에 옮겨질 수 없었다. 호포론의 논의과정에서 확인되듯이 효종 때 이후 국가에서는 대민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반층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회 주도세력으로서의 그들의 역할과 특권을 유지, 보호하는 방향에서 결정되었던 것이다.

007)≪增補文獻備考≫권 141, 經界 1, 朝鮮.
008)≪增補文獻備考≫권 161, 戶口考 1, 歷代戶口, 朝鮮.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