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민중의 사회적 결속
1) 공동체 질서와 민중
우리 역사상 민중이란 말이 전면에 부각된 것은 동학농민전쟁의 1차봉기에서였다. “兩班과 富豪 앞에 고통받는 민중과, 方伯과 守令 밑에 굴욕받는 무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043)고 하는 茂長起布 당시 띄운 격문의 한 구절이 민중의 위치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 때의 민중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집단적인 힘에 의해 모순된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층으로서, 이전의 백성의식이나 평민의식에서 한 단계 나아간 민중의식을 갖추어 나갔던 사회세력이라 하겠다.044) 그런데 이들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후기 이래 사회적 결속을 강화시켜 온 저력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조선 후기 민중이 하나의 사회세력으로 결집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장기간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기존 지배층이 중심이 된 공동체적 질서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있는 힘을 키우며 조직적인 기반을 넓혀왔던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민중이 어떻게 공동체적 질서 속에서 존재하고, 18, 19세기에 걸쳐 그 구각을 깨고 나오는가, 그리하여 자신들의 사회적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던가 하는 점들을 살피기로 한다.
기층민들은 신앙활동 혹은 경제적 활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찍부터 공동조직을 형성하였으며 그러한 조직 내에서의 활동을 통해 상호 유대를 강화하고 사회적 결속을 다져나가고 있었다. 이같은 공동조직의 조선 전기 모습들은 주로 지연·혈연적인 배경이 강한 洞隣契나, 민속 고유의식을 주관하고 생활공동체적 기능을 수행하던 香徒, 淫祠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기층민들의 조직이 당시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선조 6년(1573) 경연석상에서 향약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때 좌의정 朴淳이, “우리 나라 풍속이 서울로부터 시골구석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을의 계모임이 있어서(洞隣之契 香徒之會) 사사로이 약속을 맺고 서로 검칙 규제한다”045)라고 언급했던 데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향도는 기층민의 공동조직이 어떠한 형태를 하고 있었으며 또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는가를 살피는 데 많은 단서를 제공한다. 향도는 고려 전기까지만 하여도 祈佛 단체로서의 성격이 중심이었으며, 그 규모는 하나의 군현 주민이 거의 대부분 그 구성원이 될 정도로 큰 것이었다. 고려 전기의 농업은 아직도 기술적으로 휴한법의 제약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제약을 가진 사회는 인력 통제의 필요성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지녀 지역 공동체로서의 향도의 구성이 그와 같이 대규모적인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휴한법 아래에서는 기본적으로 조방적 농업경영형태를 취하게 되므로, 노동력의 투입기간은 짧으면서도 한 차례의 동원 규모는 커야 하는 조건 때문에 농업경영에 투입되는 구성원들은 상대적으로 강한 집단성을 지니게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046)
향도조직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사회전환 과정에서 변질되면서 그 형태도 고려 전기적인 신앙결사, 자연촌 중심의 공동체적 유대를 기반한 수호신앙 형태로서의 淫祀, 祀神香徒契類, 喪葬扶助的인 洞隣契類, 乞人組織類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조선 전기의 다양한 향도류 조직들은 지배층에 의해 불법 혹은 자의적인 사조직으로 매도되면서 그 부정적 측면이 강조되고 있었지만 촌락조직으로서의 명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047) 대체로 조선 전기의 향도조직들은 그 조직의 범위를 자연촌으로 하고 있었으며 구성원도 상천민이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이들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행사들도 공동노역이나 마을의 잡역, 그리고 무속적인 전통이 가미된 마을제사, 관혼상장의 공유와 부조가 주된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는 배경에는 휴한법의 극복과 연작상경법으로의 이행이라는 농법상의 커다란 변화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층민들의 각종 조직은 16세기 사림세력이 향촌사회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됨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세력은 조선 전기의 향촌질서를 성리학적인 것으로 재편성하여 가면서 자신들 중심의 지배체제를 구축하여 갔다. 조선 초기부터 지연과 혈연을 바탕으로 同甲契·門人契·族契 등을 만들어 왔던 사족들은 향촌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로 洞契를 만들었다. 동계를 만들어 나갔던 주 목적은 지주제를 기반으로 한 농촌경제의 안정과 부세체계의 장악을 통한 상하신분질서의 유지였고, 이를 위해 사족간의 결속 뿐만 아니라 하민을 통제할 수 있는 洞案·洞規·洞財 등과 같은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층민들의 여러 조직들은 일차적인 통제의 대상이 되면서 그들 나름의 전통적인 동린적 기반을 잃고 동계에 흡수되어 나갔다. 하층민에 대한 통제는 동계의 約條에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대체로 하층민에 대한 신분적·경제적 지배 예속관계의 확립 또는 재강화를 모색한 것이었다.
물론 사족이 하층민들에 대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계급적인 이해만을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층민들의 소농경제는 양반지주층의 경제적 또는 경제외적인 착취로 인해 극히 불안정하였으며 그에 따른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향촌사회의 안정은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그에 따라 사족층은 하층민 안정, 즉 소농경제의 보호를 위해 최소한의 양보를 모색하였다. 동시에 하층민 통제의 방법으로 약속을 위반하는 경우 契員奴婢, 家門奴婢라 하더라도 각 노비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公議, 僉議에 의해 公事로 治罪하는 방식을 채책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반층의 공동대응은 당시 향촌사회에서 하층민의 저항이 심각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러한 저항에 대해 당시 지배층이 공동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동계 등을 기반으로 하여 재지사족은 군현 단위에서 그들 중심의 一鄕 지배체제를 운영해 나갔다.
그런데 성리학 중심의 사족 지배질서가 구축되어 가는 과정에서, 기층민조직이 동계나 향약조직의 하부구조로 편입되거나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지만, 그같은 조건 속에서도 조선 전기 이래 기층민의 생활문화 기반 위에서 존속되던 향도, 음사 등의 촌계류 조직들은 명맥이 끊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사림 중심의 정치지배구조가 정착되었던 16세기의 경우 이들 기층민 조직들은 지배이념과 근본적으로 상충되지 않는 생활공동체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지배계층의 하민 지배틀 속에 잠행하게 된다. 향도에 대해 成俔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 데서 저간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 풍속이 날로 야박하여 가지만 오직 香徒만은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대체로 이웃의 천민들끼리 모여 회합을 갖는데 적으면 7∼9인이요 많으면 혹 100여 인이 되며, 매월 돌아가면서 술을 마시고, 상을 당한 자가 있으면 같은 향도끼리 상복을 마련하거나 관을 준비하고 음식을 마련하며, 혹은 상여줄을 잡아주거나 무덤을 만들어주니 … 이는 참으로 좋은 풍속이다(成俔,≪慵齋叢話≫권 8, 葬儀).
16세기에 형성되고 있던 사족중심의 향촌 지배질서는 16세기 말, 17세기 초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크게 파괴되고 동요하게 되었다. 이에 사족들은 양란이 끝나자 洞契를 복구하고 鄕案을 중수하는 등 서둘러 향촌사회의 재건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새로 복구된 동계의 성격은 전쟁 전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上下合契의 형태가 새롭게 모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048) 물론 16세기에도 하층민이 동계에 포섭되고는 있었지만 이들이 별도로 下契를 구성하였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제 동계 복구를 위해 하층민의 동원이 절실해지는 가운데 하계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것이었다. 그러한 점은 민인에 대한 의식의 변화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비록 관념적이기는 하지만 ‘귀천을 따지지 않는다’거나 ‘하인, 노비들도 비록 명분은 다르나 天命之性을 함께 받았다’라는 등의 표현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하민을 통제의 대상으로만 간주하였던 16세기의 인식과는049) 분명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위와 같은 변화가 나타나게 된 것은 양란 후 향촌사회의 복구과정에 민인들의 협조가 절실히 요청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난중에 보였던 민인들의 광범한 저항이 민인들을 일방적인 통제의 대상으로 둘 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하였을 수도 있다. 사족들은 이미 임진왜란 전부터도 민인들에 의해 그 지위를 위협받고 있었다. 임진왜란 전에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재지사족들조차도 그들의 가문노비에 대한 통제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통제를 위해 洞令을 특별히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다. 민인의 저항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더욱 격화되어 안동지방과 같은 경우에는 土賊을 방어하기 위해 義軍이 조직되고 있을 정도였다.
이제 향촌사회는 사족의 결속만으로는 민인을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족들은 상하 결속의 조직으로 동계를 재편, 중수함으로써 부분적이나마 위축된 자신들의 권위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사실 강력한 동족적 기반과 지주, 토착세력으로서 그들이 과거부터 누려왔던 동 단위에서의 사족으로서의 지위는 아직 흔들리지 않았고, 그 지위를 통하여 사족들은 상하합계 형태로 하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17세기에 일반화되는 상하합계 형태의 동계, 동약들은 바로 이같은 상황 아래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주변의 수개 촌락을 동계체계 안에 묶어둠으로써 대외적인 대표성과 지위도 과시해보려는 목적을 갖는 것이었다.
동계조직이 마련되면서 기존의 촌계류 조직들은 상당 부분 흡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순조롭게만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17세기 후반 당시에도 향약이 실시되지 못하던 곳도 있었다. 숙종 10년(1684) 漢城府에서 下契(香徒契)를 혁파하고 향약을 실시하는 문제에 대해 보고한 다음과 같은 내용은 향약 실시가 일률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大臣의 啓에 따르면 私契를 혁파하여 그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는데 … 오늘날 향도를 혁파하고 하나같이 鄕約之規로써 서로 送喪을 돕게하는 것이 그 뜻은 진실로 좋으나, 각 방 각 리에는 호의 많고 적음이 있어 (향약을) 두루 다 설치할 수는 없습니다. 또 각 리에 士夫戶가 많고 庶民戶가 적은 경우에, 사부의 喪에는 동리 서민이 당연히 스스로 힘써 그것을 봉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민서의 상에 있어서는 사부가에서 비록 約法에 따라 奴를 보내준다고는 하지만, 그 중 힘있고 사나운 노복은 반드시 약법을 따르지 않고 폐단을 일으킬 것이므로 제압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실로 백성들이 (향약을) 크게 불편하게 여겨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대저 대신의 뜻도 이와 같으니 각 방 각 리에서 향약으로써 서로 돕고자 하는 곳이 있다면 그에 따라 시행토록하는 방법이 실제 사의에 합당할 것입니다(≪承政院日記≫303책, 숙종 10년 3월 23일).
위 한성부의 보고내용은 상당수의 지역에서 향약(동약)이 실시되기도 하였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 향도계와 같은 것이 여전히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상장부조나 공동노역 등과 같은 극히 부분적인 자연촌락 단위의 자체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던 향도류 조직들은 동계가 보편화되면서 그 하부 단위에 포함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동계, 동약구조 속에서 확인되는 村契, 小契, 下契, 私契 등의 조직들이 바로 그 구체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촌계류 조직이 유지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기능은 보다 위축된 상태였다. 그만큼 동계조직이 촌락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던 것이다. 18세기 官主導의 향약이 사족들에 의해 추진되어 왔던 동계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도 그같은 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결국 16∼17세기 사족 중심 동계질서의 성립과정은 향촌사회 내에서의 기층민의 성장과 한계라는 양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하합계의 형식을 이끌어내고 동계 내에서 운신의 폭을 넓혀가고 있었던 점은 분명 기층민 성장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것이 민인들의 적극적인 저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향촌사회에서 지배권을 재강화하려는 사족층의 이해 속에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기층민들은 지배층이 중심이 된 공동체적 질서 속에서 제약되고 있었던 것이다.
043) | 吳知泳,≪東學史≫(永昌書館, 1940), 11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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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 鄭昌烈,<백성의식, 평민의식, 민중의식>(≪현상과 인식≫5-4, 1981). |
045) | ≪宣祖實錄≫권 7, 선조 6년 8월 갑자. |
046) | 李泰鎭,<17·8세기 香徒 조직의 分化와 두레 발생>(≪震檀學報≫67, 1989). |
047) | 李海濬,<朝鮮時代 香徒의 變化樣相과 村契類 村落組織>(≪省谷論叢≫21, 1990). |
048) | 朴京夏,<倭亂直後의 鄕約에 대한 硏究>(≪中央史論≫5, 1987). |
049) | 1568년에 만들어진 退溪의<溫溪洞規>의 洞令에는 ‘本主나 他主에게 무례불손한 자(노비), 무리지어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리는 자, 천방에서 벌목하는 자, 밭에 모래흙을 흘려보내는 자’ 등 통제 대상이 잘 드러나 있다. 이에 대해서는 鄭震英,<16세기 安東地方의 洞契>(≪嶠南史學≫창간호, 1985)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