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계의 변화와 분동
16∼17세기의 재지사족은 당시 변동하고 있던 사회적 조건 아래에서 그들 중심의 지배체제를 강화, 유지하기 위해서 각종 동계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재지사족 중심의 동계와 그 운영원리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를 거치면서 일정한 변모를 보였다. 그 변화는 우선 洞 재정의 운영면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대체로 이전까지는 동내에서의 상호부조는 구성원들이 그때그때 현물을 수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 관례였다. 洞穀을 마련하는 경우라도 그것의 利殖기능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으며 그 목적도 동민의 구제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들면서부터는 일정한 자금을 확보하여 그 이자를 가지고 비용을 충당한다던가, 경우에 따라서 契畓을 마련하여 거기에서 생기는 賭只로 각종 비용을 충당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에 따라 취식의 목적이나 대상도 달라져 나갔는데, 취식의 주대상이 ‘勤實下人’이 된다거나 빈한한 양반은 거기서 제외되고 있던 것은 그 자금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으며, 그 목적도 이전까지의 동민 구제로부터 洞內補役이라던가 講舍의 설립 등으로 달라져 나갔다.058)
동계는 위와 같이 그 운영에 있어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구성원 역시 달라져 가고 있었다. 16∼17세기의 동계는 上, 下契員을 모두 그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었지만 이제 18세기에 이르면 상계원들만의 조직으로 크게 제한되어 폐쇄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는 물론 상계원 자체 내의 갈등, 예를 들면 嫡庶 간의 갈등이나 빈부차의 격화 등이 그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을 터이지만, 그보다는 소농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취해진 정부의 향촌사회통제책, 즉 공동납의 강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주제가 발전하고 소농경제가 성장하는 가운데 토지소유관계나 동내의 계층 구성이 변화함에 따라 정부는 이제 기존의 재지사족을 매개로 해서만은 부세제도를 원활하게 운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정부는 효과적인 수세행정의 일환으로 기존의 동계를 하나의 수세 단위로 재편하고, 그 내부의 구성원리를 유지시킨 채 공동납을 강화하였던 것이다. 숙종 37년(1711) 법제화된 ‘里定法’은 전세에서의 比摠制, 환곡에서의 里還, 잡역세에서의 공동납 등과 일련의 관련을 갖고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과정에서 사족들이 중심이 된 洞契, 洞約 조직들이 부세의 단위로 활용되어 17세기 말, 18세기에 있어서 동계는 수취체계의 하부 단위로 고정되어 갔다.
공동납의 실시는 어느 단계까지는 효과적일 수 있었지만 과거의 전통적인 촌락기반 위에서 유지될 수 있던 촌락간의 유대를 근본으로부터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공동납은 신분제, 지주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수취를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농경제가 발전하고 그로 인해 사회 계급관계가 변질되고 복잡해짐에 따라서 원만하게 운영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동납의 강화가 기존 향촌사회 자치조직이라 할 동계를 하나의 수세 단위로 고정시켜 나가게 되었을 때, 그것이 어느 단계까지는 구속력을 가질 수 있었지만, 결국은 향촌사회 내부의 구성원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되는 것이었다. 즉 동계조직 내에 묶인채 잠재되어 있던 상·하민간의 대립, 촌락 간의 대립 등과 같은 다양한 갈등이 표면화되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동민간의 갈등은 인적 조직으로서의 동계조직의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上下合契’의 형태로 조정할 수 있었던 동계가 이제 18세기에 들어오면서는 下契를 포섭할 수 없게 되었던 사실이 그 점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동계에서 하계원의 참여 기피나 下契案이 없어지는 현상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하계가 동계의 통제권 밖에서 존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18세기에 재지사족의 영향력이 촌락사회에서 곧바로 상실된 것은 아니었다. 위와 같은 변화를 기초로 정부에서 관주도의 향촌통제책을 강화시켜 나가는 가운데서도 사족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던 것은 아직도 이들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당시 재지사족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기존의 체제를 고수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또다른 자구책을 강화해 나갔다. 17세기 말, 18세기 관주도의 향약에 그들이 참여했던 것이 전자의 예라고 한다면, 동족촌락을 형성하고 족계·문계·학계 등을 강화하거나 義莊을 설치하고 자신들의 족적 결합을 다지고자 했던 것은 후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사정이 달라지게 된다. 동약의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였던 대구 夫仁洞 洞約이 18세기 말에 이르러 하민들의 요구에 의해 그 기능이 축소, 상실되어 갔던 것은 그 단적인 예를 보여준다.059) 이러한 사정은 관에서 주도하였던 동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이 시기의 각 동(리)은 사족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18세기 후반, 특히 광범위하게 작성되고 있던 牧民書類의 하나인≪七事問答≫의 文狀條에 ‘分洞’이 하나의 항목으로 포함되고 있던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060)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겠지만 사족지배질서가 유지되던 16∼17세기의 촌락은 대개 일정한 지연적 공동체로서 수개 또는 10여 개 자연촌락들이 하나의 연합체로 묶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사족들이 집거하거나 영향력 있는 사족이 거주하는 ‘洞’과 ‘里’가 중심촌락으로 이들의 전체명칭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리와 동에 집거하였던 사족들은 동계나 동약 등을 통해 거의 常賤民으로 구성되어 있던 것으로 보이는 하위의 수개 또는 10여 개의 마을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광역의 리 밑에 묶여 있던 자연촌들이 바로 18세기 후반 이후 독자적인 조직과 규모를 지니면서 독립된 마을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061) 이같은 촌락사회 구조상의 변모가 야기된 데에는 상품경제의 발달, 화폐경제의 진전과 같은 여러 요소가 지적될 수 있지만 주목되는 사실은 촌락 분화과정에서 하민들의 分洞 요구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제 일반 민들이 사족들이 주도하던 향촌지배체제의 모순과 한계성에 직면하면서 자신들의 진로를 모색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사족지배체제의 굴레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동질감을 확인하고 또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되었을 때에는 구체적인 삶의 공간에서 결속력을 강화하여 나가게 되었다. 이는 이후 민인이 변혁의 주체로 기능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는 토대가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