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18세기의 민중운동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과제
조선 후기는 중세사회의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기존의 봉건적 사회구성이 급속도로 변동·해체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활발하게 추구되던 시기였다. 변화의 움직임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조선 후기라는 시간적 범주 속에서도 특히 변혁의 시기로 인식되고 있는 19세기는 민중의 저항이 집중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발생한 시기였다. 이 때의 민중항쟁은 외형상 봉건지배층의 가혹한 탐학과 빈발하고 있던 극심한 재해 등이 계기가 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당시의 사회구조가 민중의 삶과 극도의 마찰을 빚어내지 않을 수 없게끔 모순이 심화되고 있었고, 나아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봉건권력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 민중의 의식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같은 19세기의 사회변동은 결코 19세기 역사 안에서만의 우연적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18세기의 조선사회가 지니고 있던 역사적 모순의 산물이었다. 어느 시기에 어떠한 사회현상이던간에 그 현상은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할 때 역사적 繼起性을 띠게 된다. 말하자면 19세기의 역사전개는 18세기의 역사전개, 그리고 18세기의 역사전개는 17세기의 역사전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8세기는 절대연대상으로 숙종 26년(1700)에서 정조 23년(1799)까지이지만, 대체로 영·정조 때를 지칭한다. 이 시기의 성격을 한 때 ‘안정기’, ‘부흥기’, ‘또 하나의 전성기’로 이해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사회는 결코 안정된 사회는 아니었다. 양란으로 흐트러졌던 기존의 질서가 제대로 복구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변화의 모습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기존 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사회 저변에서 꾸준히 추구되고 있었고, 기득권층의 이익에 대한 신진세력의 도전이 강인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즉 18세기의 조선사회는 이전 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여러 변화가 한층 증폭되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力動性을 지니고 있었다.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18세기의 사회를 역동성있게 움직이는 힘의 바탕이 되었다. 그런가하면 지배구조의 모순은 날로 경직화되어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켰고, 소외계층을 확대시켜 그들로 하여금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을 촉진시키고 있었다.
본래 조선사회는 양반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일반 민중의 사회생활은 매우 제약받았다. 민중은 정치적으로 지배권력에 예속되어 있었고, 신분적으로 양반층에 억압받고 있었다. 그런데 강압적이고 폐쇄적이었던 봉건적 지배체제는 이미 16세기 중엽 이래로 체제를 이끌던 힘이 약화되더니, 倭亂과 胡亂을 겪으면서는 사회운영의 기본 질서였던 신분제가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지배이념으로서의 성리학의 지위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조선사회의 이러한 움직임은 변화의 시작에 불과하였으며 사회 전반에까지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 변화가 본격화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지배구조의 모순이 여러 방면에서 심하게 드러나면서 그러한 현실을 묵과만 할 수는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더구나 이 시기의 변화에서 주목되었던 것은 기충민이 변화의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당시 민중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은 기층민으로서의 농민이었다. 지배체제가 마련한 모순구조 속에서 맹목적으로 복종하며 신음하던 농민들이 사회의 모순을 깨닫기에 이른 것이다. 더 이상 봉건지배층에게 자신들의 삶을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농민들은 나름대로 살 길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들은 황폐된 농촌에서 자신들이 당면한 생활조건을 스스로 개선해 나가야 했다.
농민들은 농토를 개간하고 수리시설을 복구하면서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영농방법을 개선하였는가 하면, 시장경제에 편승하여 보다 많은 소득을 올리고자 새로운 작물을 재배하기도 했다. 한편, 농촌사회의 변화 속에서 불가피하게 농촌을 떠나야 했던 일부 농민들은 도회지에 모여 상공업 활동을 시도하거나, 포구, 장시, 광산 등지를 찾아 임노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평탄하게 전개되지 못하였다. 봉건지배층의 가혹한 손길은 그들로 하여금 삶을 여유있게 지내도록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날이 가난에 쪼들리고 빚에 몰리게 했다. 이에 지금까지는 불평과 불만이 있어도 내색하지 못하고 순종하는 체 하거나, 아니면 가족을 거느리고 몰래 야반도주하여 고향을 떠나는 방도밖에 생각하지 못하던 농민들은 두레와 같은 공동체 조직을 통해 유대감과 자율성을 높여가면서 생존의 응집력을 키웠고, 마침내 집권층의 독선과 탐관오리·악덕 지주의 탐학에 대하여 도전적 행동으로 그들의 의사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힘겨운 부담을 피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나는 流亡도 어찌보면 지배구조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그것은 소극적 행동이었다. 이제 농민들은 종래의 소극적 자세를 바꿔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했다. 변혁의 주체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민중의 저항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봉건적 수취체제에 대하여 避役·抗租·拒稅 등의 형태로 저항했는가 하면, 壁書·掛書·疏請 등의 방법으로 지배체제의 모순과 탐관오리의 비리를 비판하였다. 심지어는 張吉山·邊山群盜·戊申亂과 같이 무력을 동원하여 변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廢四郡團·流團·才團·後西江團과 같은 조직체계를 갖춘 명화적, 즉 도적집단이 횡행하기도 했다. 또한 지배층의 멸망을 예언하는 秘記나 圖讖說이 널리 유포되었고, 미륵신앙이 사회 저변에 확산되기도 했다. 이러한 민중의 저항운동은 18세기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봉건지배층의 구조적 모순을 배경으로 한 필연적 현상이었다. 특히 그 모순은 민중의 생존권과 직결되고 있었기 때문에, 민중의 삶이 담겨져 있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는 한 18세기의 민중운동이 지향하는 바를 바로 진단할 수 없다. 즉 18세기의 민중의 동요는 기본적으로 당시 조선사회에 널리 확산되고 있던 사회경제적 변화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18세기의 민중은 향촌에서, 도시에서 또는 농업적 측면에서, 상공업적 측면에서, 이 시기 사회경제적 변화를 주목하고서 거기에서의 자신들의 사회적·경제적 이익을 보다 분명히 자각하고 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각종 침탈에 맞서면서 도전적 존재로 성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점차 깨우치게 된 이 시기의 민중은 힘을 축적하기 위해서도 당시의 사회경제적 변화가 봉건적 질서에 유리하게 편입되도록 관망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 시기 그들의 움직임은 의식의 수준이나 힘의 축적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어서 외형상 群盜나 변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민중이 일정한 지위를 구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순이 심화되고 변화가 추구되고 있던 18세기의 향촌사회였지만, 이 시기에 있어서도 향촌의 사회적·경제적 권한과 이익은 봉건지배층이 강인하게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이 자율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틀을 깨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