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Ⅱ. 18세기의 민중운동3. 여러 지역의 항쟁과 ‘무신란’2) 무신란의 발단과 전개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1. 신분제의 이완과 민중사회의 성장
          • 1) 사족지배구조의 정착과 신분구조의 변화
          • 2) 17세기 위기 이후 대민 지배정책의 전환
            • (1)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의 전환과 ‘여민휴식’정책의 철회
            • (2) 공동납체제로의 전환과 18∼19세기 호적 운영의 변화
          • 3) 사족지배질서의 동요와 민중의 성장
        • 2.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공동체 질서와 민중
          • 2) 18세기 향촌공동체의 변화와 민중조직의 활성화
            • (1) 면리제의 강화와 민
            • (2) 동계의 변화와 분동
            • (3) 민중조직의 활성화
          • 3) 19세기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향회의 활용
            • (2) 민중조직과 농민항쟁
        • 3. 민중운동의 사상적 기반
          • 1) 성리학에 대한 사상적 도전
            • (1) 성리학의 교조화
            • (2) 민중사상의 확산
          • 2) 민중운동의 사상적 특성
            • (1) 민중운동 속의 사상경향
            • (2) 민중사상 전파의 주체
            • (3) 정부의 대응책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과제
          • 1) 민중세계의 각성
          • 2) 유대관계의 강화
          • 3) 향권의 추이
          • 4) 사회세력의 동향
        • 2. 유민과 명화적
          • 1) 유민
            • (1) 유민발생의 배경
            • (2) 유민의 실태와 유입처
            • (3) 정부의 유민대책
          • 2) 명화적
            • (1) 명화적 발생의 배경과 조직체계
            • (2) 활동양상과 그 성격
            • (3) 정부의 대책
        • 3. 여러 지역의 항쟁과 ‘무신란’
          • 1) 18세기 초 민중의 동향과 변산군도
          • 2) 무신란의 발단과 전개
            • (1) 18세기 초 정치정세와 ‘무신당’의 결성
            • (2) 무신당의 반정계획과 지방토호·녹림당의 가세
            • (3) 무신란의 전개와 향촌사회의 동향
            • (4) 무신란의 참가계층과 그 성격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특성과 항쟁의 배경
            • (1) 서북지방의 사회·경제적 특성
            • (2) 매향과 향권의 동향
            • (3) 중앙권력의 구조적 수탈
          • 2) 항쟁의 과정
            • (1) 서북민의 저항과 홍경래 난의 발발
            • (2) 홍경래 난의 전개과정
          • 3) 항쟁의 결과
            • (1) 홍경래 난 전후 향촌지배세력의 변동
            • (2) 반봉기군 ‘의병’의 향권 장악
            • (3) 서북민항쟁의 역사적 의의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여건
            • (1) 사회경제적 배경
            • (2) 정치적 여건과 지방사회의 운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1) 항쟁의 발생 지역
            • (2) 항쟁의 직접적 계기
            • (3) 항쟁의 전개과정
            • (4) 항쟁의 참가층과 주도층
            • (5) 항쟁조직
            • (6) 요구조건
            • (7) 공격대상
          • 3) 정부의 대책과 항쟁의 의미
            • (1) 농민항쟁에 대한 정부의 대응
            • (2) 삼정에 대한 대책
            • (3) 이정책에 대한 반대 논의와 저항
            • (4) 농민항쟁의 평가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1) 변란과 민란
          • 2) 변란발생의 배경
            • (1) 사회적 모순의 심화와 ‘저항적 지식인’의 활동
            • (2) ‘양이’의 침공과 ‘이단사상’의 만연
          • 3) 변란의 추이
            • (1) 19세기 전반의 변란
            • (2) 해서, 영남세력의 변란
            • (3) 광양란
            • (4) 이필제란
            • (5) 기타
          • 4) 변란의 성격
            • (1) 변란의 조직과 운동구조
            • (2) 변란의 이념
            • (3) 변란과 19세기 후반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무신란의 전개와 향촌사회의 동향

 영조 4년(1728) 3월 초순부터 근기지방과 전라·경상도에서는 외방기병을 위한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정세윤 등은 김수종·성득하 등 부안세력의 거병을 지휘하기 위하여 부안(변산)으로 내려갔으며, 안동·상주에는 이인좌의 동생인 이웅보(이능좌)와 표종제인 조세추 등이 파견되었다. 이인좌 자신은 안성·양성·진위 등지에 양반과 마병 50여 명을 포함하여 약 300여 명의 군사를 몇 군데로 나누어 집결시켰다.409) 영남과 호남에서의 군병이 오기를 기다려 합세하기 위함이었다. 한세홍은 평안병사의 거사 상경을 촉구하기 위해 평양병영으로 떠났다.

 양성·진위 등지에 모인 녹림당은 노속, 협호(리하인), 화전민, 전호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는 변산적과 통하던 세력도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칼 등의 무기를 가진 자는 10명 중 1명 정도이었고 나머지는 장대를 들고 있는 정도였다.410) 근기의 반군은 고변의 징후가 있자 몇 곳에 분산되어 있던 군사를 素沙坪으로 집결하였다. 이 때 다소 군기와 마필이 보충되면서 대오를 정비할 수 있었던 素沙陣은 청주로 진격하였다. 당색이 다른 병사가 청주병영을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영남과 호남의 군사가 오기 전에는 도성으로 진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411) 그러나 녹림당이 주축이 된 반군의 규모나 전력으로 청주성 점령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반군측의 선전선동은 이를 수월하게 하였다. 이 때 선전선동은 일부의 소론·남인·소북 등의 지방관이 모두 거사에 가담하였으며 해서 관서지방도 모두 참가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전라도에서는 태인의 박필현과 담양의 심유현이 기병하여 李明誼가 전라도 도원수가 되고 전라병사 趙儆이 후원이 되며, 또한 경상도에서는 이현좌(이인좌)가 장차 8만병을 몰고 온다”고 하고, 나아가서는 “도성은 만 명이나 되는 군사가 잠입하여 내응을 하는데 각창과 군기고가 하룻밤 사이에 불탄다”는 등의 내용이었다.412) 지리산·변산의 屯聚賊이 의병이 되어 근기로 몰려오며 이 때에는 鄭都令의 편에 서야 살 수 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413)

 이런 상황에서 근기 호서의 행정·치안이 마비되어 吏民이 도산하고 모두 도피하는 형국이 되었는데 이 틈을 이용하여 반군은 청주성의 장교와 향리를 포섭하고 민가와 상통하여 쉽게 청주를 점령하였다.414) 다음날부터 청주와 인근 지방의 사태는 급변하였다. 연기군에서는 파옥사건이 일어났고, 청주 북면에 거주하는 유학 柳海는 명화적으로 체포되어 있던 중에 방면되자 기꺼이 반군에 가담하였고 문경의 적수 李奉春도 감옥을 빠져나와 청주의 반군에 가세하였다.415) 근기·호서의 200여 명에 이르는 남인·소론계 사족이 청주의 반군진영에 합세하였다.416) 그리고 좌수를 지내고 향교의 수임을 지낸 자를 비롯하여 향임층과 군관층이 대거 합세하였다. 당시 반군에는 “양반과 서얼을 칭하는 자들이나 교활하여 군역을 피하고자 하는 白民”이 많이 참여하였고, “적도에 들어간 자들이 새로 이방이나 사령·급창이 되었고 서얼들은 이 때를 맞이하여 어깨를 으쓱대며 적진에 투입하였으며” 좌수를 지내고 향교의 수임을 지낸 자, 그리고 향임층과 군관층이 대거 합세하였다.417) 반군에는 피역층과 서얼 그리고 양반을 모칭하는 세력을 비롯하여 향임, 관임을 얻으려는 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반군의 세력은 크게 확대되면서 인근의 황간·회인·청안·목천·진천 등지에 반군측 수령이 파견되었다. 반군측도 “살인하지 않으며 재물을 빼앗지 않는다”라거나, “군역과 신역을 제감한다”는 등의 민정책을 반포하기도 하고 또한 민심을 회유하기 위하여 전곡과 포목을 나누어주었으며 또한 관노비에 상급을 내리고 환곡을 분급해주었다.418) 당시 민의 자발적인 참여는 매우 광범하였다. 당시 공주에 퇴거한 양반은 일반 행인이나 상인 등이 기꺼이 참여하는 것을 보고 그 형세를 이렇게 적고 있었다.

밭가는 자에게 애휼을 베풀고 행인을 죽이지 않으니 思亂의 백성과 怨國의 무리가 모두 흥이 나서 용감하게 적진에 들어갔다. 적세는 날로 치열해지니, 행로에서 투입한 무리는 죽을 각오를 한 군졸이 되었다(≪戊亂錄≫3월 22일).

 호남에서 금위영과 어영청으로 번상하기 위해 도성으로 가던 5哨에 달하는 군병이 반군에 들었는데 그를 만류하는 양반에게 이렇게 항변하였다.

進士같이 국가의 은혜를 입고 국가의 養育을 받으면 국가가 이렇게 되었을 때 힘을 다하겠지만 우리 옷 우리가 입고 우리 음식 우리가 먹는 우리 ‘꾼’(軍)에게 국가는 무엇이겠습니까(≪戊申勘亂日記≫권 1, 3월 18일).

 여기에는 국가에 대한 강한 불신과 부정의식이 깔려 있음을 보겠는데 이리하여 불과 2, 3백 명으로 시작한 반군의 세력은 각처·각층의 이반세력의 궐기를 유도하며 청주를 점령한 이후에는 처음의 10여 배로 늘어났다.419) 이처럼 반군세력은 근기·충청지방의 민심이반을 기반으로 청주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그 세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남과 호남에서의 거병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안동·상주의 사족층은 피난하거나 협조하지 않았으며 좌수 등이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다른 향임층도 가담하지 않았다. 반노론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경상좌도의 사족은 거사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론에 기대한 거병은 실패하였던 것이다.420) 결국 안동이나 상주에 근거를 확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능좌·정희량은 경상하도를 중심으로 기병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안음현의 50여 호의 鄕品의 협조를 얻어 안음현감을 구축하고 곧 거창현도 점령하였다. 합천 굴지의 大姓이었던 曹聖佐도 향청의 전폭적인 협조를 이끌어내고 합천군을 장악하였다. 삼가·함양 등에서는 수령이 정희량과 조성좌의 기병 소식에 접하고 방비를 서둘렀으나, 오히려 향청 등이 군사권을 장악하고 반군측에 가담하고 말았다. 이 형세는 실로 “공격하지 않았는데도 수령들이 도망가서 피흘리지 않고 석권함”과 같았다.421) 이같은 순조로운 거사는 상주 안동과는 달리 향청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여기에 흉년을 당하여 제반 부세의 납부를 강요당하던 민인들이 호응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성은 해마다 흉년으로 기갈이 들었는데 춘궁을 당하여 미포의 독납이 있으니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차에 적의 무리가 창곡을 분급하고 그 마음을 기쁘게 하며, 소를 잡고 술을 빚어 배를 채워주니, 오로지 양민이 본심을 잃고 투입하였다(≪南征日錄≫권 2, 4월 2일 慶尙監司黃璿牒報).

 그러나 이 지방에서의 거병이 성공하였다고 하여도 안동·상주의 기병이 성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라좌도와 연계되지 않고서는 다른 지방으로 그 세력을 확산하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전라도에서의 기병도 주도층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필현의 관군 중심적 거병은 실패하였다. 그는 태인군을 이끌고 전주로 향하였으나 전라감사가 거부하자 곧바로 도망하고 말았다.422) 녹림당과 연결하여 오랫동안 양병하며 이인좌·이호 등과 체결하였던 나주세력도 가문 내의 일부 반대가 있자 거사에 참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423) 고부·순창 등지의 녹림당을 지휘하였던 송하세력은 박필현과 협력하여 괘서를 살포하기는 하였으나, 군사적인 행동을 같이 하지는 않았다.

무릇 임실 回美山 속에는 많은 도적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 때를 틈타 작변하고자 하였습니다. … 그런데 필현의 무리와는 계략과 모의가 다른 듯 하였는데 아마 필현의 무리가 기병하여 팔로가 소란하면 저들은 그대로 호남에서 할거하고자 하였던 것 같습니다(≪勘亂錄≫권 4, 4월 정유)

 정세윤과 직접 체결하고 있었던 변산의 金守宗·成得夏 세력만이 적극적으로 거사에 들어갔다. 관군 중심의 전주 점령이 실패하였음에도 그들은 청주 반군과 합세하여 안성과 죽산의 전투에 참여하였다.424)

 평안병사의 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근기에서 모군이 한창 진행되는 3월 6일 평양으로 떠난 한세홍은 평안병사 이사성으로부터 가을을 기다려 거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평안병사 이사성은 움직이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근기의 반군은 청주를 점령하여 근거를 확보하였지만 부안·변산의 일부 세력을 제외하면 영남과 호남의 반군과 합세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정부는 용인 어비곡에 퇴거하고 있던 奉朝賀 崔奎瑞가 급변을 알림에 따라 서울에 그 내응세력이 있을 것임을 간파하고 내응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하였다.425) 정부는 궐문과 성문의 파수를 강화하고, 각 진에 금위영과 어영청의 군사를 증파하여 외방인이 성내에 유입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다. 그리고 도성에 살고 있는 김일경 등의 가속이나 己巳大臣의 자손을 투옥하여 내응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검속하였다. 또한 쌀값이 등귀하면 민심이 동요한다는 이유로 세곡을 성내로 운반하였고, 재정난을 이유로 체불된 공인의 역가와 관료의 삭료를 미리 지급하였다. 이러한 치안·사회정책과 함께 都城死守論과 漢江守備令이 하달되었다. 무신당의 경중내응도 정부측의 효과적 대응으로 좌절되었다. 황해도와 강원도에는 향병징발령을 발동하였다. 그리고 소론 오명항을 도순무사로 삼아 관군을 남파하였다.

 청주 반군은 각처의 동조세력에 飛檄을 띄우면서 도성으로 진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도 각처의 유민·상인·화전민이 새로이 합세하여 일단 진천을 경유하여 안성·죽산에 이르렀으나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주하게 되었다.426) 이로부터 반군에 동조하였던 향촌의 사정은 크게 변하였다. 반군에 가담하였던 군관·장교층은 반군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반군의 지도자를 체포하고 그를 토벌하는데 가담하였다.427) 각처에서 ‘倡義軍門’이 결성되고 이들이 반군을 색출하는데 앞장섰다. 청주성은 사족 朴敏雄이 결성한 창의군문에 의하여 수복되었다. 창의는 주로 향소를 중심으로 속오군을 단속하고 노비층을 동원하는 차원에서 퇴각하는 반군세력의 색출 등을 담당하였다. 여기에는 경리청의 차인으로 興販料理로 민생을 침학하였거나 향임으로 荒政에서 죄를 얻어 정배된 자들도 창의에 적극 참여하였다.428)

 경상도에도 소모사가 부임하고 행정기구가 정상화되면서 사족층은 ‘義兵軍門’을 결성하였다.429) 3월 말경부터 서원과 향교가 중심이 되어 가솔·가노를 징발하여 대오를 편성하였다. 서원·향교·서당·부민 등은 군자를 기부하였다. 경상좌도의 ‘의병군문’은 거창·안음의 경상하도 반군세력을 군사적으로 토벌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지방행정의 공백을 메우고 치안상태를 유지하는 한편 관고를 단속하고 백성이 무단으로 이탈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수준이었다. 경상하도의 진주·거창 등지의 창의는 관군의 군사행동에 따라 군량를 보조하며 첩보활동을 수행하였다. 창의는 소수의 향리가 향소를 중심으로 가솔을 동원하는 수준에서 진행되었다.

409)≪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1, 3월 16일 金重萬供.
410)≪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1, 3월 16일 莫實·金重萬供 및 3월 17일 安簿供.
411)≪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1, 3월 26일 李麟佐供.
412)≪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1, 3월 16일 金玉成供·4월 25일 張欽供 및 권 2, 4월 1일 李光積供.
413)≪勘亂錄≫권 5, 5월 신유 湖西按撫使金在魯狀啓.
414)≪勘亂錄≫권 1, 3월 을축.
415)≪戊申別謄錄≫1책, 3월 17일 忠淸監司權詹狀啓.

黃翼再,≪華齊集≫권 5, 素患錄 戊申日記.
416)≪南征日錄≫권 1, 3월 19일.
417)≪戊申別謄錄≫2책, 3월 27일 南漢巡撫使 金東弼狀啓·3책, 4월 22일 忠州牧使金在魯狀啓.
418)≪英祖實錄≫권 19, 영조 4년 10월 무자.

≪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2, 4월 5일 李廷說供.
419)≪湖西散人實記≫권 1, 年譜 本邑趙僉正某戊申日記.
420)≪勘亂錄≫권 4, 4월 병신, 曹世樞供.
421)≪南征日錄≫권 2, 3월 27일 沃川郡守林世濂諜報 嶺南大元帥檄文.
422)≪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9, 8월 5일 李長郁供.
423)≪戊申別謄錄≫2책, 3월 29일 南漢巡撫使金東弼狀啓內 尹熙慶招辭.
424)≪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7, 6월 21일 高應良供.
425)≪英祖實錄≫권 16, 영조 4년 3월 갑자·병인.
426)≪英祖實錄≫권 16, 영조 4년 3월 계유.
427)≪湖西散人實記≫권 1, 年譜.
428)≪景宗實錄≫권 15, 경종 4년 8월 정사.

李匡德,≪冠陽集≫권 9, 湖南御史書啓別單.

≪戊申別謄錄≫4책, 6월 21일 忠淸兵使趙儆狀啓·23일 湖西按撫使 金在魯狀啓.
429)黃翼再,≪華齊集≫권 5, 素患錄 戊申日記.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