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서북지방의 경제적 특성
≪經世遺表≫에서 “서북 두 도는 땅은 넓으나 사람이 드물고, 평탄한 田地가 아주 적다. 그런데 인삼·돈피·은·베와 어획의 이익이 또한 많으니, 남도에 시행하는 법으로써 셈할 수 없다”456)라고 하여 서북지방 경제사정의 특수성을 지적하였다. 즉 농업 자체로서의 이익보다는 상업적 작물과 기타 상업적 물품이 오히려 경제적 부의 축적 기반이 되고 있었다. “공·상 두 직업은 그 이익이 농부보다 후”457)하기 때문에 상업의 발달은 이 지역의 부를 증대시키는데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 점은 다음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關西 一路는 밭에서 두번 거두는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상업을 좇아 행합니다. 生穀은 南土보다 못하나 聚貨는 어떤 지역보다 낫습니다(≪日省錄≫순조 8년 9월 7일).
이처럼 평안도는 농업보다는 상업적 이익이 어느 지역보다 뛰어났다. 한편 상업 중에서도 국내시장보다는 대중국무역이 중심이었다. 大國人의 去來는 거의 없는 날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458)≪擇里志≫에서는 평안도 지역의 대중국무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평양과 안주 두 고을은 큰 도회지로 되어, 저자에 중국 물품이 풍부하다. 장사치로서 중국에 가는 사신을 따라 왕래하는 자는 매양 많은 이익을 얻어서 부유하게 된 자가 많다(李重煥,≪擇里志≫八道總論 平安道).
밑천이 많은 큰 장사를 말한다면 한 곳에 있으면서 재물을 부려, 남쪽으로 왜국과 통하며, 북쪽으로 중국의 연경과 통한다. 여러 해로 천하의 물자를 실어 들여서 혹은 수백만금의 재물을 모은 자도 있다. 이런 자는 한양에 많이 있고, 다음은 개성이며, 또 다음은 평양과 안주이다. 모두 중국의 연경과 통하는 길에 있으며, 큰 부자로 되는 바, 이것은 배를 통하여 얻는 이익과 비교할 바가 아니며, 삼남에도 이런 또래는 없다(李重煥,≪擇里志≫卜居總論 生利).
평안도 지역의 대중국무역이 가장 큰 利源임을 지적하였다. 매년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공무역뿐 아니라 潛商이라 불리는 밀무역도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었다. 때로는 밀무역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할 때도 있었다.
이에 따라 대청무역로상에 있는 일대 관문이자 灣商의 근거지였던 의주 또한 대외무역의 중심지로서 주목되고 있었다. 의주를 거치는 사무역 물품은 1/10로 과세되었으며, 그 세액은 영조 24년(1748)에 약 8천 냥이었으나 헌종 7년(1841)에는 71, 520냥으로 크게 증대되었다.459)
그리하여 18세기 말 19세기 초가 되면 평양의 柳商과 의주의 灣商 및 안주 상인들은 서울의 京商, 개성의 松商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고 국내의 상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460) 정조 22년(1798)에는 祥原郡의 경우, 民願에 따라 商船이 모이기 편리한 곳으로 邑治를 옮기는 일까지 있게 되었다.461)
함경도 지역의 원산도 신흥 상업도시로 등장하여 전국적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특히 서울과 원산을 잇는 東北捷路의 商業路로서의 三防路가 열리고 京商鄕賈들이 모두 이 길을 이용하게 됨으로써 그 발전을 더욱 촉진하였다.462) 순조 원년(1801)경에는 雪雲嶺도 열리게 되어 鐵嶺路 하나였던 것이 三路로까지 늘어났다.463)
수공업 생산 역시 18세기를 전후하여 서북지방에서 현저히 발전하였다. 영변·성천 등은 견직업의 주요 산지였다. 안주는 19세기에 들어오면서 견직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야장업도 발전하고 있었다. 19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부터는 정주의 納淸 場市와 박천군 용계면 일대를 중심으로 유기점의 수준을 넘어서는 유기 공장수공업이 발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광산경영에서도 새로운 요소가 발생하였다. 특히 서북지방에서는 대청 은자무역과 관련하여 금은광산의 채굴이 급속히 진행되었다.464)
이러한 사회적 분업의 발전과 상품생산의 발전은 앞서의 상업적 성장을 더욱 추동하였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한 세력들이 신향층의 모집단을 형성하여 나갔다고 보여진다.
456) | 丁若鏞,≪經世遺表≫권 4, 天官修制, 郡縣分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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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 | 丁若鏞,≪經世遺表≫권 5, 地官修制, 田制 3. |
458) | ≪正祖實錄≫권 12, 정조 5년 7월 경오. |
459) | 오종록,<비변사의 정치적 기능>(≪조선정치사 1800∼1863 하≫, 청년사, 1990), 557쪽의 주 62). |
460) | 홍희유,<1811∼1812년 평안도 농민전쟁과 그 성격>(≪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한 농민들의 투쟁(이조편)≫, 과학원 역사연구소, 1963), 58쪽. |
461) | ≪正祖實錄≫권 49, 정조 22년 7월 병인. |
462) | ≪正祖實錄≫권 24, 정조 11년 9월 계사. |
463) | ≪日省錄≫순조 원년 3월 16일. |
464) | 홍희유, 앞의 글, 52∼5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