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Ⅴ. 갑신정변3. 갑신정변의 전개2) 갑신정변의 준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1) 개화파의 형성
          • 2) 개화파의 분화
          • 3) 개화파의 활동
            • (1) 통리기무아문의 설치(1880)
            • (2)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의 파견(1881)
            • (3) 영선사(병기학습 유학생사절단)파견(1881)
            • (4) 신식 육군(별기군)의 창설(1881)
            • (5) 기무처의 설치(1882)
            • (6) 감생청의 설치(1882)
            • (7) 대외적 균세정책의 실시(1882)
            • (8) 해관의 설치(1882∼1883)
            • (9) 근대학교의 설립(1883)
            • (10) 근대신문의 발간(1883)
            • (11) 근대적 산업시설의 대두와 고취
        • 2. 개화사상의 발전
          • 1) 동도서기론의 대두
          • 2) 온건개화파의 개화사상
          • 3) 급진개화파의 개화사상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1. 개화정책의 추진세력
          • 1) 고종의 개화의지
          • 2)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3) 개화추진세력의 분화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1) 파견계획의 수립
            • (2) 고종의 밀명
            • (3) 어떤 인물들인가
            • (4) 일본시찰 활동
            • (5) 일본견문 보고서
            • (6) 일본을 보는 두 개의 눈-엇갈리는 진단과 평가
          • 2) 청국유학생(영선사)의 파견
            • (1) 사행의 교섭
            • (2) 사행준비와 출발
            • (3) 학습상황
            • (4) 유학생의 철수
          • 3) 미국시찰단의 파견
            • (1) 조미조약의 체결
            • (2) 조선보빙사의 미국파견 및 일정
            • (3) 조선보빙사 파견의 성과
        • 3. 제도의 개혁
          • 1) 정치·군사부문
            • (1) 정부기구의 개편
            • (2) 군사제도의 개혁
          • 2) 경제부문
            • (1) 농업기술의 도입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
            • (2) 상업의 보호와 수세정책
            • (3) 전환국의 설립과 신식 화폐주조
          • 3) 문화·교육·사회부문
            • (1) 박문국의 설치와≪한성순보≫·≪한성주보≫의 간행
            • (2) 서구식 근대교육의 수용
            • (3) 근대적 우정·전신·전기시설
            • (4) 근대 의료시설
      • Ⅲ. 위정척사운동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2) 위정척사사상의 보급
            • (1) 위정척사사상의 정립
            • (2) 위정척사사상의 심화와 확산
        • 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 1) 병자년의 위정척사운동
          • 2) 신사년의 위정척사운동과 척사·개화논쟁
        • 3. 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위정척사운동의 영향
          • 2) 위정척사운동의 의미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1) 임오군란의 배경
            • (1) 서울의 사회경제 구조와 하층민
            • (2) 하급 군병의 성격과 군제개편
            • (3) 하층민의 저항운동
          • 2)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 (1) 운동의 발생과 확산
            • (2) 정치적 차원에서의 운동의 실현
            • (3) 외세의 개입과 운동의 좌절
          • 3) 임오군란의 영향
            • (1) 일본의 국내 사정과 대조선정책의 변화
            • (2) 청의 대조선정책의 변화와 영향력 확대
            • (3) 국내 상황의 변화
          • 4) 임오군란의 구조와 성격
            • (1) 참가층의 구성과 동원조직
            • (2) 공격 목표와 요구의 한계
            • (3) 정부 및 지배층의 대응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선정부의 대청통상정책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청통상협의
            • (2)<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Ⅴ. 갑신정변
        • 1. 갑신정변의 배경
          • 1) 구미열강과의 외교
          • 2) 차관교섭
          •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
        • 2. 갑신정변의 주도세력
          • 1) 정변의 핵심세력
          • 2) 정변의 행동대원
        • 3. 갑신정변의 전개
          • 1) 정변 주도세력의 목표
          • 2) 갑신정변의 준비
            • (1) 개화당의 정변 무력문제
            • (2) 정변 단행의 결정
            • (3) 북청군대의 상경과 일부 유경
            • (4) 일본공사관 호위용 일본군의 차병
            • (5) 국왕의 밀칙 획득
            • (6) 행동계획의 최종 정리
          • 3) 개화정권의 수립
            • (1) 1884년 10월 17일 밤의 거사
            • (2) 신정부의 수립
            • (3) 개화파 신정부의 혁신정강 공포
          • 4) 청국 및 일본의 개입과 정변의 실패
          • 5) 갑신정변 실패의 요인
        • 4. 갑신정변의 영향과 의의
          • 1) 갑신정변의 영향
            • (1) 수구파정권의 재수립
            • (2) 개화당의 몰락과 숙청
            • (3) 조선·일본의 교섭과<한성조약>의 체결
            • (4) 청국·일본의 교섭과<천진조약>의 체결
          • 2)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북청군대의 상경과 일부 유경

개화당은 정변 단행의 결정을 내린 전후에 준비한 정변 무력을 서울에 집중시키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개화당은 1884년 6월 8일(양력 7월 29일) 일본에 유학시킨 서재필 등 14명의 사관생도들을 귀국시켰다.

개화당은 이와 동시에 윤웅렬이 함경남병영에서 양성한 북청군대를 서울로 불러올려 정변 무력으로 사용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옥균이 1884년 6월 19일(양력 8월 9일) 윤치호를 불러 모종의 밀의를 한 후, 윤치호는 바로 궁궐로 들어가 국왕에게 “가친(윤웅렬)이 技藝가 精硏한 병대 100명을 뽑아 상경 입감시킨 뒤 환송시키거나 諸營에 分置코자 하는데 청허하심이 어떠하옵니까”827)라고 요청하여 “뽑아 올리게 하라”는 윤허를 받았다. 또 이 자리에서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귀국한 사관생도를 수용하는 일도 건의하였다. 국왕이 북청군대의 선발과 상경을 윤허했으므로 윤치호는 이를 함경남병영의 부친 윤웅렬에게 알렸다.828)

윤치호가 7월 23일(양력 9월 12일) 입궐했을 때에는 국왕으로부터 ‘장차 너의 아버지를 시켜 北兵(북청군대)을 거느리고 상경케 할 계획이라’829)는 말을 들었다. 윤치호는 이튿날 북청의 윤웅렬에게 긴급히 소식을 알리고, 김옥균을 방문해 보고하면서 이 날 밤에는 김옥균의 집에서 잤다.830) 국왕이 북청군대의 상경을 결정한 약속을 지키자 김옥균과 윤치호는 상당히 흥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왕은 나흘 뒤인 7월 27일 윤웅렬을 摠戎中軍에 임명하여,831) 친군영 전영 正領官의 직책을 주고, 함경남병영에서 새로 조련한 북청군대를 상번시키도록 인솔하여 상경할 것을 명령하였다.832) 마침내 북청군대 상경의 국왕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국왕에게 예궐했다가 이 명령을 받은 윤치호는 흥분하여 그 길로 김옥균의 집으로 달려가서 보고하고 또 하룻밤을 김옥균의 집에서 묵으며 밀의하였다.833)

윤웅렬은 마침내 470명의 북청군대를 인솔하고 1884년 9월 5일(양력 10월 23일) 서울에 도착하여 우선 친군영 전영에다 주둔시켰다.834) 드디어 개화당은 북청군대를 양성하여 서울로 데려오는 지난한 일까지 성공한 것이었다. 국왕은 9월 10일에는 북청군대의 군사훈련을 친히 관람하고 그 씩씩함에 칭찬과 경탄을 마지않았고 윤웅렬의 노고를 치하하였다.835) 여기까지는 김옥균 등 개화당이 크게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위기감을 느낀 수구파들은 북청군대를 모두 돌려보내고 빼앗기 위한 반격활동을 비밀리에 맹렬히 전개하였다. 실제로 수구파들은 민비를 배경으로 하여 이 무렵 공식적으로는 이미 중앙의 군사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민비 수구파의 활동에 의해 국왕은 1884년 8월 26일 친군영의 전영·후영 2영을 전·후·좌·우의 4영으로 확충 개편하고 종래 지휘관의 명칭인 ‘監督’을 ‘營使’로 바꿈과 동시에 ‘군무당상’까지 겸하게 하고, 전영사에 韓圭稷, 후영사에 尹泰駿, 좌영사에 李祖淵, 우영사에 閔泳翊을 임명하여 군권을 모두 민비 수구파가 지휘하도록 하였다.836) 정계의 실권은 민비를 정점으로 하여 閔台鎬·閔泳穆·閔泳翊·閔泳韶·閔應植 등 5閔과 이에 야합한 이조연·한규직·윤태준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개화당으로서 1884년 봄 이후 기용된 경우는 우정국 총판에 洪英植(3월), 승정원 동부승지에 徐光範(6월), 귀국한 사관생도장 徐載弼이 조련국 士官長(6월)에 임명된 정도였다. 민비 수구파들은 이와 같이 군권에 이르기까지 실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북청군대를 돌려보내기 위해 국왕의 신임이 매우 두터우며 개화당에 가담해 있던 환관 柳在賢을 포섭하였다. 유재현은 당시까지 개화당의 요인의 하나로서 김옥균·윤치호와 긴밀한 연락을 하고 있던 인사였다.837) 그러나 유재현이 수구파의 공작으로 그 사이에 결국 변절하여 한규직에게 조종당해서 국왕에게 “지방의 軍心은 측량하기 어렵고 또 들으니 윤웅렬은 총 메고 탄알 장전하고 있다고 하는데 윤치호가 내응한다면 일이 매우 염려되니 북병의 조련을 보지 않음만 같지 못하다”838)고 마치 북청군대·윤웅렬·윤치호의 국왕 암살 가능성까지 망상하면서 모략 참소하였다.≪윤치호일기≫에서는 이것이 한규직(친군영 전영사)·이조연(친군영 좌영사)·윤태준(친군영 후영사)·민영익(친군영 우영사) 등 4영사가 비밀리에 작간하여 개화당과 윤웅렬의 진로를 저지하려고 배후 조종한 것이라고 하였다.

국왕은 처음에는 환관 유재현과 수구파의 참소를 무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왕은 북청군대 중에서 성적이 우수한 70명을 선발하여 모두 武科를 내리고 상을 주었다.839)

그러나 수구파의 참소와 특히 신임하는 환관 유재현이 매일 시종하면서 모략하고 설득하므로 국왕은 마침내 동요하게 되었다. 국왕은 9월 15일 명령하기를 “前南兵營 병정들이 모두가 오래 주둔하는 것은 심히 민망한 일이므로 그들을 輪回하여 상번시켜라”840)는 전교를 내리었다. 이것은 상경한 470명의 북청군대 중에서 일부만 서울에 남게 하고 일부는 북청으로 돌려보내 교대로 상번케 하라는 명령이었다. 국왕의 이 명령은 개화당에게 매우 큰 타격을 준 명령이었다.

개화당은 천신만고 끝에 북청에서 군대를 양성하여 470명을 서울로 불러올렸는데 국왕이 갑자기 일부만 서울에 남게 하고 북청으로 돌려보내라니, 정변의 무력 준비에 결정적 차질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개화당 중에서도 윤웅렬은 매우 당황하였다. 국왕의 교대 상번명령이 내려진 이튿날인 9월 16일 윤웅렬은 아들 윤치호를 불러 밀의한 결과, 국왕의 정변 지지가 확고하지 못한 상태에서 김옥균 개화당의 급진정변은 시기상조이며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데 합의하였다.841) 이에 윤웅렬은 9월 17일 서울에 데려온 470명의 북청군대 중에서 70명만 서울에 남겨 놓고 무려 400명을 북청으로 돌려보냈다.842) 250명만 북청으로 돌려보내도 될 것을 윤웅렬이 400명이나 돌려보낸 것은 정변의 실패를 내다보고 보신을 위해 정변 준비에서 발을 빼기 시작한 것을 시사하는 것이었다.843)

김옥균 개화당은 동지라고 믿었던 환관 유재현에게 배신당하여 470명의 북청군대의 절반 이상을 잃게 되고, 이어서 윤웅렬의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70명만을 서울에서 갖게 되었다.844) 국왕으로부터 무과 합격자와 동일한 자격을 인정받고 상을 받은 북청군대의 성적 우수한 정예가 70명이었는데, 이들을 서울에 남게 한 것으로 보인다.

개화당이 500명의 북청군대를 양성하여 그 중 470명을 서울까지 데려오는데 성공해 놓고서도, 유재현의 배신과 윤웅렬의 이탈로 마지막 순간에 400명을 돌려보내고 70명의 북청군대만을 정변에 활용하게 된 사실은 국왕을 둘러싼 신임 경쟁에서 수구파가 승리하고 개화당이 패배했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개화당은 70명의 북청군대 최정예 군인을 정변에 투입했으므로 북청군대 양성이 완전히 무위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 남게 된 북청군대 70명이 어디에 배속되었는지 기록상으로는 명료하지 않다. 친군영 후영을 신설하라는 국왕의 명령이 정변 얼마 전인 7월 22일 처음 나왔고, 갑신정변 도중에 후영 병정이 정변을 수호하기 위한 外衛를 담당했으며,845) 북청군대의 보호와 상경에 깊숙히 관여하여 북청 남병영에 두 번이나 내려갔던 박영효가 정변 도중에 친군영 전영사 겸 후영사가 되어 이를 지휘한 것을 보면,846) 이 70명의 북청군대는 친군영 후영에 배속된 것으로 보인다. 박영효는 그 후 회고담에서 개화당이 준비한 무력이 친군영 전·후영 1,000명이라고 하였다.847) 당시 1영의 병력은 500명이었다.

개화당은 친군영 전영 500명 전원을 스스로 양성하여 완전히 장악하였고, 친군영 후영 500명은 그 중 70명의 북청군대를 양성하여 이를 중핵으로 하고 신설 편입한 430명의 다른 조선군을 장악해서 합하여 지휘한 것이었다.

827)≪尹致昊日記≫, 1884년 6월 19일(양력 8월 9일).
828)≪尹致昊日記≫, 1884년 6월 19·21일.
829)≪尹致昊日記≫, 1884년 7월 23일.
830)≪尹致昊日記≫, 1884년 7월 24일.
831)≪承政院日記≫, 고종 21년(1884년) 음력 7월 27일.
832)≪承政院日記≫, 고종 21년 7월 27일.

≪漢城旬報≫34호, 1884년 8월 초1일,<諭旨恭錄>.
833)≪尹致昊日記≫, 1884년 7월 27일.
834)≪尹致昊日記≫, 1884년 9월 5일.
835)≪尹致昊日記≫, 1884년 9월 10일.
836)≪高宗實錄≫, 고종 21년 8월 26일.
837)≪尹致昊日記≫, 1884년 7월 28일.
838)≪尹致昊日記≫, 1884년 9월 11일.
839)≪尹致昊日記≫, 1884년 9월 14일.
840)≪高宗實錄≫, 고종 21년 9월 15일.
841)≪尹致昊日記≫, 1884년 9월 16일.
842)≪尹致昊日記≫, 1884년 9월 17일.
843)≪尹致昊日記≫, 1884년 10월 10일.

뿐만 아니라 尹雄烈은 정변 1주일 전에 親軍營前營 正領官 직책을 스스로 자퇴하였으므로 前營使 韓圭稷이 이를 수리하였다.

≪尹致昊日記≫, 1884년 10월 21일에는 정변 도중에 開化黨이 尹雄烈부자를 배신자로 간주하여 처단하려 하다가 尹致昊가 미국공사관 主事로 근무하고 있음을 참작하여 보류했었다고 高宗이 尹致昊에게 말해주고 있다.
844)柳在賢은 정변 직후 北靑軍隊를 돌려보내도록 참소한 배신자로 지목되어 徐載弼에 의해 정변 현장에서 斬殺되었다.
845)≪尹致昊日記≫, 1884년 10월 17일.
846)<甲申日錄>, 1884년 양력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847) 朴泳孝,≪東亞日報≫, 1930년 1월 5일,<韓末政客의 回顧談>.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