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부 지배층의 농업문제 인식과 농업정책
19세기 후반 전국 여론은 농촌문제의 해결방식을 둘러싸고 크게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문제의 소재는 신분제·부세제도 등 각 분야에 걸쳐 있지만, 특히 토지제도의 개혁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의견 대립을 보였다. 전자는 지주적 입장에서 지주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부세제도의 개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후자는 농민적 입장에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토지개혁론의 전통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井田論·均田論·限田論 등을 제안했다. 이들은 근대 사회를 독립 자영하는 소농경제에 기초한 사회여야 한다는 원칙 아래 이 문제에 접근한 것이다.0511) 이를 위해서는 상업이 발달해야 하며, 지주는 지주제를 해체시키는 가운데 상업 자본으로 전환하고, 농민의 경제 안정과 상품생산을 통한 근대화를 겨냥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입장에 동의하면서 지주층과 일정한 타협을 겨냥한 방안도 제시되었다. 지주의 토지소유를 인정하되 지대를 대폭 낮추어 장기적으로 지주제 해체를 겨냥한 減租論이 그것이다. 감조론은 당시 농업문제 해결방안의 한 조류였으며, 대한제국이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참여했던 海鶴 李沂도 주장한 바 있다.0512)
반면 문명개화론자들은 지주의 상품생산을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연결시켜야 한다는 명제 아래 농업문제 해결책을 두 방향에서 모색했다. 하나는 주류 견해로 이제까지 발전해 온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을 그대로 추인하는 가운데 지주제를 중심으로 생산력을 발전시켜 농업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재정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김옥균·박영효 등이 조선 후기 이래 정부 지배층이 추진해 온 삼정개혁론의 입장에서 지조개정을 주장하고, 신전개발·산림 천택의 치수·도로와 수리시설의 보수·목축의 장려 등 생산력 확충방안을 제시한 바 있었다.0513)
다른 하나는 소유권은 기존대로 유지하게 하고 경영권에서 타협점을 제시한 견해이다. 유길준의 개혁안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그는≪護富論≫에서 사유재산권은 보호해야 하며, 토지개혁은 부유층의 원한을 사고 농민들의 사행심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지주제를 주축으로 한 농업진흥론을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농민경제를 안정시키고 부국강병한 근대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다. 방법은 서양 농학을 도입하여 농업기술을 개량하고 농지개발을 추진하여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인데, 정부에서 자금을 대여하여 새로운 회사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이 과제를 수행하려는 것이었다. 개혁은 지주제를 바탕으로 하되 농민의 입장을 일정하게 고려한 방식으로 수행하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지대를 경감하고 작인의 경작권을 보장하는 대신, 지세는 지주와 작인이 공동 부담하는 방안이었다.0514)
정부는 문명개화론자들의 방안을 정책의 기조로 채택하였으며, 그 내용은 소유관계는 논외로 하고 농업기술 문제나 농업경영 구조개선 문제가 중심을 이루었다. 갑신정변 전야 정부는 1880년 이후 계속된 한해·개항무역·물가상승·군란발생 등에 대비하기 위해 농업생산력 확충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이를 구체화시켜 갔다.0515) 농과규칙과 농정에 관한 교지가 그 대책이었다.
통리군국사무아문에서 공포한 農課規則(1883년 11월 29일)은 通戶規則·農務規則·農桑規則으로 구성되었다.0516) 통호규칙은 5가작통의 戶法 아래 각 통에는 統首, 마을에는 副正, 읍에는 農課長의 직제를 신설하고, 권농에 힘쓰고 농사를 방해하며 놀고 먹는 자를 금하라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농무규칙은 농지개간과 수리시설의 신설과 보수를 강조했다. 농상규칙은 양잠업을 비롯한 목면 마포 등 상업적 농업을 육성 발전시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했다. 특히 농무규칙은 진황지를 개간한 자에게 소유권을 부여하는 조치로, 진전을 개발하여 국가 수입을 증대하고 농민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방안은 일반 민인이 진황지를 개간하여 자기 소유지를 확대해 갈 수 있도록 한 조치였지만, 계속 발전해 온 사적 소유권을 일면 부정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권력층은 이 조문을 빌미로 개간이라는 명분 아래 농민의 사유지를 약탈하는 데 이용하여 사회적 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0517)
1884년 9월에 시달한 농정에 관한 교지도 부국강병을 위한 생산력 확충 방안이었다.0518) 그것은 농상·직조·목축·차·종이 등을 관장하는 기구를 설치하고, 민간자본을 동원하여 敎民興業하는 방안이었다. 정부는 전자로서 蠶桑公司·織造局 등의 기구를 만들고, 후자로는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국가자본 이외에 민간자본을 도입하여 새로운 회사형태의 농장경영 시스템을 도입하여 달성하는 안을 제시했다. 중소지주층 이상의 부력이 있는 자를 중심으로 자금을 모아 구래의 계나 향약을 기반으로 서구 자본주의사회에서 성행하는 방식의 회사를 설립하여 民富와 國富를 꾀하려는 방안이었다.0519)
1885년 정부는 중앙에는 京城農桑會社章程을, 지방에는 交河農桑會社節目를 만들어 회사 설립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0520) 회사 설립자금은 양반지주층을 중심으로 평천민의 지주나 부농층도 사원으로 흡수하여 충당하도록 했다. 운영방식은 향약이나 계의 규약을 기반으로 삼되, 본래의 주 기능인 농민통제 기능은 제거하고 상부상조의 기능을 살리는 것이었다. 이익은 출자에 따라 배당하도록 했다. 사업은 신전이나 진전 등 농지개발을 통해 富를 축적하는 것이 주 목표였으며, 아울러 몰락하여 놀고 먹는 사람에게 임금을 지급, 정착 경영하도록 하여 농촌경제의 안정성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이었다. 농지경영 방식은 소작인에 대여하는 지주경영, 임노동을 이용하여 직영하는 농장경영, 자본가로서의 차지경영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전반적으로 회사 경영 양식은 자본가적인 방향을 지향하는 것이었으나 신분제적 농민통제기능을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은 1894년에 경성농상회사장정을 기초로 재정비한 官許農桑會社章程에서 수정 보완되었다.0521) 생산력 확충 방법으로 관개시설을 수축하고 水糞法을 채용하여 생산성을 높히는 전통적인 방안 외에, 서구의 기계와 농학을 도입하고 학교를 세워 교육시키는 방안도 새로 제시하고 있다. 사업자금은 단순 모집한 사원의 투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국채 혹은 외채를 도입하기 위한 방안도 강구했다. 그리고 장정 안에 남아 있던 신분제적 요소는 완전히 제거했다.0522)
서양 농학을 도입하여 농업기술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은 농업시험장의 설치와 연구, 농학교의 설립, 농서의 편찬 등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었다. 1884년 농무목축시험장을 설치하고 미국으로부터 농기구와 종자 및 가축 등을 수입하여 새로운 농업을 개발하기 위한 실험을 했다. 책임자는 崔景錫이었다. 그는 국내외 작물 344종, 가축 64수를 길러 수확물 종자와 해설서를 305개 지방으로 보내 재배하도록 권장했다. 그리고 양잠을 육성하기 위해 잠상공사를 설치하고 독일인 기사를 고빙하기도 했다. 특히 중국의 농서를 번역하여 보급할 것을 꾀했다. 李祐珪와 金思轍은≪增補蠶桑輯要≫(1884), 이희규는≪蠶桑輯要≫(1886)를 편찬했으며, 이우규는 더 넓은 계충에 보급하기 위해 한글본의≪桑蠶撮要≫를 편찬하기도 했다.
서구 농학 중심의 농서를 편찬하여 보급하는 시도도 했다. 安宗洙의≪農政新編≫(1881), 鄭秉夏의≪農政撮要≫(1886), 李宗遠의≪農談≫(1894), 池錫永의≪重麥設≫등이 그것이다. 일본 농학계에 소개된 서구 농학을 그대로 도입 소개한 것으로 지주의 상업적 농업과 상품화가 주 목표였다.0523)
농학교를 설립하여 서구의 농학을 교육시키는 작업도 병행했다. 2년제의 農務學堂을 설립하고 영국인 농학교사를 초빙하여 서구의 농학을 교육시켰다. 교육내용은 토지개량·목축·농지개간 등이 중심이었으며, 교과로는 농학·耕圃學·농화학·농기학·가축학·수학 등 구래의 농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조선정부의 농정책은 현실적으로 지주의 도움없이 수행하기는 어려웠지만 지주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소유권에 안주하여 지대만을 수탈하는 지주가 아니라 농업경영 능력이 있는 지주를 비롯한 부농층을 대상으로 한 농정책을 구상했다. 당시 서로 다른 두 개혁론이 서로 대립 갈등하면서도 정부측의 이같은 농정책에서 볼 때 경영권을 중심으로 양자간에 일정한 타협을 예상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1894년 농민전쟁에서는 정부와 농민군이<土地는 平均으로 分作케 事>라는 경영권을 중심으로 한 타협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서로 지향점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외세의 침입이라는 사태에 직면하여 기존의 소유관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경작권 차원에서 농민경제의 안정과 균산을 바탕으로 한 생산력 확충방안을 타협안으로 도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0524)
대한제국은 1898년 이 점을 고려하여 양전·관계발급 사업이라는 일련의 근대적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했다. 사업 내용은 구래의 소유권을 근대의 소유권으로 추인하되 경작권을 물권으로 인정하고, 지세는 지주와 작인이 공동 책임 납부하도록 하여 국가재정을 마련 근대 개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무엇보다 생산력 확충을 통한 국부의 증진이 최대 목표였기 때문에 여기에 충실한 지주층을 근대 개혁의 바탕으로 삼고 농민층도 여기에 가능한 끌어 들이는 방향에서 정책을 결정했던 것이다.0525)
0511) | 김용섭,<한말 고종조의 토지개혁론>(≪한국근대농업사연구≫하, 일조각, 1988)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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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 李 沂,<田制>(≪海鶴遺書≫, 국사편찬위원회, 1956). 이기의 田制에 대해서는 김용섭,<광무년간의 양전·지계사업>(≪한국근대농업사연구≫하, 1988). 최원규,<19세기 양전론의 추이와 성격>(≪중산정덕기박사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1996) 참조. |
0513) | 김용섭,<갑신 갑오개혁기 개화파의 농업론>(≪한국근대농업사연구≫하, 일조각, 1988) 참조. |
0514) |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유길준 전서≫1(서유견문), 일조각, 1971, 120∼121쪽;≪유길준 전서≫4(정치 경제편), 지제의, 135∼178쪽. |
0515) | 정부의 농정책은 김용섭, 앞의 책(하),<갑신 갑오개혁기 개화파의 농업론>, 1988과 이영학,<개항기 조선의 농업정책>(≪한국 근현대의 민족문제와 신국가 건설≫, 1997) 참조. |
0516) | ≪한성순보≫제7호 내아문포시, 1883년 12월 1일. |
0517) | 김용섭, 앞의 책(하),<고종조 왕실의 균전수도 문제>, 1988에서 전북지역에서 왕실이 농민의 소유지를 개간을 빌미로 약탈한 경우를 예시하고 있다. |
0518) | ≪일성록≫, 1884. 9. 12. |
0519) | ≪한성순보≫, 회사설, 1883. 10. 21. |
0520) | ≪京城農桑會社章程≫,≪交河農桑會社節目≫(奎古 4256-44). |
0521) | ≪官許農桑會社章程≫(奎 15322). |
0522) | 한우근,≪한국개항기의 상업연구≫(일조각, 1970), 230∼232쪽과 김용섭, 앞의 책,<갑신 갑오개혁기 개화파의 농업론>, 1988, 74∼89쪽. |
0523) | 농서의 편찬과 내용은 다음 글이 참고된다. 이광린,<안종수와 농정신편>,<농무목축시험장의 설치>(≪한국개화사연구≫, 일조각, 1969). 김용섭, 앞의 책(하),<갑신·갑오 개혁기 개화파의 농업론>, 1988. 김용섭, 앞의 책,<근대화과정에서의 농업개혁의 두 방향>, 1992. 김영진,≪농림수산고문헌비요≫(서울농촌경제연구원, 1982). 이춘녕,<개항 및 일정시대의 농학에 관한 연구>(≪학술원논문집(자연과학편)≫31, 1992). |
0524) | 최원규, 앞의 책,<19세기 양전론의 추이와 성격>, 1996 참조. |
0525) | 한국역사연구회,≪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민음사, 1995) 참조. 이 때 양전사업을 담당했던 김성규는 사업 직전 이 방식을 자기 관할지역의 역둔토에서 실제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作人常定法’ ‘恒定賭租法’을 정하여 실시하고 이를 관리할 농촌자치기구의 개혁안을 내놓았던 것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김용섭,<광무개혁기의 양무감리 김성규의 사회경제론>(≪한국근대농업사연구≫하, 일조각, 1988);박찬승,<한말 역둔토에서의 지주경영의 강화와 항조>(≪한국사론≫9, 1983)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