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2차 개혁
1) 제2차 개혁의 배경
일본이 청일전쟁을 도발하면서 조선에서 추구한 최소한(minimum)의 정책목표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시설을 한반도내에 설치·확보하며, 또 강화도조약 체결 이래 구축된 조·일간의 불평등조약체제를 일층 강화하면서 본원적 자본축적에 필요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침략적 발상의 연장으로서 일본이 조선에서 추구한 최대한(maximum)의 목표는 바로 조선왕국을 일본제국의 보호국으로 약취하는 것이었다.
일본내각은 청일전쟁을 개시할 때 미리 조선에 관한 장기적 정책목표를 설정해 놓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선전포고를 한 지 17일 만인 8월 17일에 내각은 장차 조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다음 4개의 대안을 거론하고 그 가운데 ‘을’안을 채택하였다.
(갑) 조선을 명실 공히 독립국으로 處置할 것.
(을) 조선을 명의상 독립국으로 공인하되 제국이 간접·직접으로 영원 혹은 장기간 그 독립을 保翼·扶持하여 他의 侮를 막아내는 勞를 취할 것.
(병) 일·청 양국이 조선영토의 안전을 담보할 것.
(정) 조선을 구주의 벨기에 혹은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으로 만들 것(≪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438, 647∼649쪽).
무쓰외무대신의 설명에 따르면, ‘을’안은 조선의 보호국화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일본정부는 개전 당시 조선의 독립을 확립시켜 준다고 공언한 것과는 반대로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겠다는 은밀한 목표를 설정·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잠정적인 정책목표는 1895년 2월 24일 이후에 약간 변동되었고 드디어 청일전쟁이 종결된 1895년 6월 4일에 이르러 수정·포기되었다. 그러므로 청일전쟁 전기간을 통해서 일본정부는 조선의 보호국화를 그들의 정책목표로 삼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436)
일본내각이 채택한 보호국화정책을 조선에서 실행에 옮기는 임무는 맨 먼저 오오토리공사에게 맡겨졌다. 그는 8월말까지<朝日暫定合同條款>과<朝日盟約>등을 체결하여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법적 근거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집권자들이 일본에 반발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이들의 즉각적인 실현을 요구하거나 급격한 제도개혁을 서두르는 따위의 강압적 간섭행동을 자제하면서 전쟁의 추이를 관망하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였다. 때마침 일본군이 9월 15∼16일의 平壤戰鬪와 9월 17일의 黃海海戰에서 대승을 거두자 내각의 이토오수상과 제1군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 일본의 지도자들은 대한정책의 담당자로서의 오오토리공사의 무능력을 비판하고 그의 교체를 거론하였다. 그 결과 10월 15일부로 명치정부의 중직을 두루 거친 원로이자, 조선문제에 정통했던 현직 내무대신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朝鮮駐箚特命全權公使로 임명되었다.437)
이노우에공사는 일본정부로부터 전쟁 중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略取할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정부와 체결할 각종 조약의 협상·체결권, 주한 일본수비대의 지휘권, 조선정부에 고용될 일본인 고문관의 선발권, 그리고 조선정부에 공여할 차관의 주선권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권한을 본국정부로부터 위임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서울에 도착한 직후(10월 28일) 고종과의 첫 알현에서 조선 국왕과 정부에 대한 자문권까지 부여받음으로써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간여할 수 있는 최고고문관 내지 外臣으로 자처할 수 있게 되었다.438) 그 결과 이노우에공사는 1885∼1894년간에 조선에 군림했던 청국의 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원세개처럼 조선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노우에공사가 부임한 10월말에는 청·일간의 戰局이 압록강 너머로 확대되어 조만간 구미 열강-특히 러시아-의 간섭이 예상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외교적 문제점을 감안하면서 조선의 보호국화라는 구체적 정책목표를 달성해야만 했다. 따라서 그는 서울에 도착한 다음 우선적으로 러시아공사와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던 미국공사와 각별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기의 대한활동에 대한 주한 러시아공사의 방해 내지 간섭을 배제하려 했다.439) 바로 이러한 속셈에서 그는 10월 28일에 자기의 隨員 사이토오 슈이치로오(齋藤修一郞)로 하여금 정동에 있는 미국공사관을 예방케 하여 주한 미국공사 씰(John M. B. Sill)과 서기관 알렌(Horace N. Allen)을 만나 그들의 조선 정세관을 청취하고, 나아가 조선왕실과 친분이 두터운 알렌서기관으로 하여금 이노우에공사와 閔妃간의 면담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때 씰공사와 알렌서기관은 일본정계의 거물인 이노우에가 조선공사로 내임한 것은 조선왕조의 개혁을 위해 다행한 일이라고 그의 부임을 축하한 다음 앞으로 일본공사가 조선의 내정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노령이고 신빙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진’ 대원군 대신에 ‘排淸·獨立主義’사상을 가진 고종 및 ‘强骨優智’의 민비와 제휴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이 자리에서 알렌은 또 이노우에공사가 원하는 민비와의 알현을 주선해 보겠다고 약속하였다.440) 이렇게 형성된 서울에서의 일·미 양국공사간의 유대는 그후 이노우에공사가 고종과 민비를 조종함에 있어, 그리고 조선의 친일내각을 조성·조종함에 있어 중요한 외교적 뒷받침이 되었다.
436) | 陸奧宗光,≪蹇蹇錄≫(東京:岩波書店, 1983), 160·167∼1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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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 | 井上馨의 임명 배경 및 조선관련 활동에 관해서는 柳永益,≪甲午更張硏究≫(일조각, 1990), 29∼34쪽 참조. |
438) | ≪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469, 19∼20쪽;문서번호 475, 42쪽;문서번호 476, 51∼52쪽 참조. |
439) | ≪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471, 22∼25쪽. |
440) | ≪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468, 12∼14쪽. Spencer J. Palmer, ed., Korean-American Relations:Documents Pertaining to the Far Eastern Diplomacy of the United States. Volume II:The Period of Growing Influence, 1887∼1895(Berkeley and Los Angeles: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3), # 65, pp.257∼259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