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2권 대한제국Ⅰ. 대한제국의 성립2. 고종의 황제즉위 과정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1. 대한제국의 성립 배경
          • 1) 청일전쟁 이후 동아정세의 변화
          • 2) 조선의 위기와 정부의 대응
        • 2. 고종의 황제즉위 과정
          • 1) 황제즉위의 논리
          • 2) 고종의 황제즉위식
        • 3. 대한제국의 성립과 열국의 반응
          • 1) 국호 ‘대한’의 제정과 반포
          • 2) 열국의 승인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1. 대한제국의<국제>및 군사제도
          • 1)<대한국국제>의 제정 과정
            • (1) 교전소의 설치
            • (2) 법규교정소를 통한<대한국국제>의 제정
          • 2)<대한국국제>의 내용과 역사적 성격
            • (1)<대한국국제>의 내용
            • (2)<대한국국제>의 역사적 성격
          • 3)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 (1) 군제개혁의 방향
            • (2) 원수부를 통한 황제권 강화
          • 4) 중앙 및 지방군의 기능과 역할
        • 2. 광무양전·지계사업
          • 1) 양전사업의 추진 배경과 목적
          • 2) 양지아문의 설립과 양전시행
            • (1) 양지아문의 토지측량과 광무양안
            • (2) 광무양안과 ‘시주’의 성격
          • 3) 지계아문의 설립과 관계발급사업
          • 4) 광무양전·지계사업의 성과와 의의
        • 3. 산업진흥정책
          • 1) 광무정권과 궁내부
          • 2) 광무년간의 근대화정책
            • (1) 교통·운수업
            • (2) 화폐·금융
            • (3) 상공업
            • (4) 광산
        • 4. 대한제국기의 자강·구국교육정책
          • 1) 경본예참의 국가주의 자강교육
          • 2) 국민주의 자강교육
          • 3) 구국교육정책과 의무교육운동
        • 5. 대한제국기의 재정정책
          • 1) 재정정책 기조의 변화
          • 2) 정부세입의 축소와 황실수입의 확대
            • (1) 정부세입의 만성적 부족
            • (2) 재원의 내장원 이관과 황실수입의 확대
          • 3) 황실·군사부문의 지출 증대와 황실의 자금 축적
            • (1) 황실·군사비의 팽창과 행정·사업비의 축소
            • (2) 황실재정의 지출 양상과 여유자금의 축적
      • Ⅲ. 러일전쟁
        • 1. 러일전쟁의 배경
          • 1) 러일전쟁과 한국
          • 2) 청일전쟁 후 동아시아 국제관계
          • 3) 의화단사건과 열강관계
          • 4) 영일동맹과 러일협상
        • 2. 러일전쟁의 경과와 전후처리
          • 1) 러일전쟁의 경과
          • 2) 전후처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
            • (1) 영일동맹의 개정
            • (2) 태프트-가츠라밀약
            • (3) 포츠머스조약
          • 3) 러일전쟁과 한국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1. 국권의 제약
          • 1) 한일의정서와 부수협정의 체결
          • 2) 일제의 한국 ‘보호국’화와 을사5조약
            • (1) 일제의 한국 ‘보호국’화 정책과 국제적 승인과정
            • (2) ‘보호’조약 체결을 위한 사전공작
            • (3) 을사5조약의 체결
        • 2. 통감부 설치기의 통치체제
          • 1) 보호국체제와 통감부
            • (1) 보호국체제
            • (2) 통감과 통감부의 권한
          • 2) 통감부의 군사·경찰제도
            • (1) 러일전쟁과 한국주차군의 탄생
            • (2) 군사제도
            • (3) 헌병경찰제도
        • 3. 통감부의 식민지화 정책
          • 1) 식민지화의 기반조성
            • (1) 만한경영론
            • (2) 경제의 장악과 이식민 촉진을 위한 기반 조성
            • (3) 군사기지화 작업
            • (4) 행정·사법제도의 개정
            • (5) 기타 식민지화를 위한 기반조성
          • 2) 통감부시기 재정제도의 개편
            • (1) 일제의 재정제도 이식과 재정기구 장악
            • (2) 식민지화를 위한 재정운영-세입·세출예산 분석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1. 고종의 국권회복 노력과 강제퇴위
          • 1) 밀사파견 외교의 전개
          • 2) 고종의 통치권 회복 시도
          • 3) 이완용 내각의 성립과 고종의 강제퇴위
        • 2.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체결
        • 3. 군대해산과 사법권 피탈
          • 1) 군대해산과 의병봉기
          • 2) 일제의 사법권 장악
        • 4.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
          • 1) 일진회의 창립과 정계진출
          • 2) 3파연합과 합방청원운동
        • 5. 한일합병조약의 체결
          • 1) 일본정부의 한국병합 방침
          • 2) 병합조약의 체결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고종의 황제즉위식

 고종의 황제즉위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연호의 제정과 圜丘壇030)의 설치 그리고 환구단에서의 황제즉위식 행사 등이다.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대 왕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가 중국의 연호를 썼다. 중국의 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래 중국은 동양의 중심적 역할을 상실해 가기 시작하였고, 청일전쟁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 결과 조선도 1896년에는 建陽이라는 새 연호를 쓰게 되었다. 그 점에서 조선은 청국으로부터 ‘독립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조선의 독립’이란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청국의 간섭은 벗어났다 하여도 일본의 간섭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양이란 연호의 채택도 일본의 간섭하에서 진행되었고, 主上殿下를 大君主陛下로, 王妃殿下를 王后陛下로, 王世子低下를 王太子殿下 등으로 변경한 것도 그러하였다.031) 이를 두고 ‘우리 역사상에 등장한 적이 없는 기이한 명칭’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032) 결국 아관파천과 환궁 등을 거치면서 조선이 일본의 구속을 잠시 벗어난 사이에 문제의 연호와 존호가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얼마 후 沈舜澤이 議政에 임명되어 황제즉위식에 관한 의례와 그때까지 장례를 미루어 두었던 왕비의 장례식 준비에 착수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가 光武와 慶德 두 개의 안을 놓고 建元건을 상주하자, 광무가 새 연호로 확정되었다(1897. 8. 16).033) 광무라는 새 연호에는 모든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힘을 기르고 나라를 빛내자는 의미가 있었다.

 연호를 제정한 뒤 9월에 들어서면서 정부관료들이 고종의 황제즉위를 요청하는 상소를 다시 올렸다. 관료·유생들의 상소를 바탕으로 심순택과 趙秉世·朴定陽·南廷哲 등이 고종을 알현하여 거듭 황제로 즉위할 것을 진언하였고, 李秀丙 등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도 이어졌다. 아홉 번의 사양 끝에 고종은 마침내 이를 재가하였다. 아홉이란 숫자는 동양적 의미로는 가장 큰 수, 사양할 만큼 사양했다는 뜻이니 다분히 의식적이었다.034)

 즉위식 행사는 11일에서 12일에 걸쳐 행해졌다. 황제즉위를 경축하는 태극기가 장안에 물결치는 가운데 치러졌다. 장소는 ‘환구단’, 서울의 南署 會賢坊 小公洞契였다.035)

 원래 환구단은 천하를 다스리는 지상의 황제가 천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이니 원칙적으로는 황제의 나라에만 존재한다.036) 그럼에도 우리 나라에서 ‘圜丘祭’가 제도화된 것은 고려 성종대부터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 전기에 행해졌던 환구단에서의 제천행사는 고려 말기에 와서 背元親明策을 취한 이후 명나라 사신의 혁파종용과 당시 신진사류층의 성리학적 명분론 등에 의해 폐지되고 말았다. 조선왕조의 건국 이후로도 태종 및 세조 때 기우제 등의 경우에 방편적으로만 거행된 것 외에는 환구제를 국가적 행사로 거행할 수 없었다.037)

 이처럼 중국을 의식하여, 혹은 주자학적인 명분론에 입각한 중화사상에 의해 조선왕조 5백년 동안 행해지지 못했던 제천행사를, 이제 황제즉위식과 함께 환구단에서 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완성된 환구단의 모습을≪독립신문≫에서는 이렇게 소개하였다.

이전 남별궁 터전에 단을 모았는데 이름을 환구단(圜丘壇)이라고도 하고 황단(皇壇)이라고도 하는데 역군과 장색 천여 명이 한달이 못되어 거의 다 건축을 하였는데 단이 삼층이라. 맨 밑층은 장광이 영척으로 일백 사십 사척 가량인데 둥글게 돌로 쌓아 석자 길이 높이를 쌓았고, 제이층은 장광이 칠십 이척인데 밑층과 같이 석자 높이를 쌓았고, 맨 윗측은 장광이 삼십 육척인데 석자 길이로 둥글게 높이를 쌓아서 올렸고, 바닥에는 모두 벽돌을 깔고 맨 밑층 가으로는 둥글게 석축을 모으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 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하여 세웠는데 남문은 문이 셋이라. 이 단은 금월 십이일에 황제폐하께서 친행하시어 거기서 백관을 거느리시고 황제위에 나아가심을 하느님께 고하시는 예식을 행하실 터이라(≪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12일, 논설).

 이상으로 보아 이때의 환구단은 규모는 작았지만, 대체로 명대와 청대에 걸쳐 중국 천자의 제천행사에 쓰였던 북경의 환구단 형태를 따른 것이었다.038) 황제즉위식 광경은 서울의 내외국인들에게 좋은 구경거리였다. 먼저 즉위식 전날의 광경에 대해≪독립신문≫에서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십일일 밤 장안의 사가와 각 전에서는 등불을 밝게 달아 길들이 낮과 같이 밝았다. 가을 달 또한 밝은 빛을 검정 구름 틈으로 내려 비쳤다. 집집마다 태극 국기를 높이 걸어 애국심을 표하였고, 각 대대 병정들과 각처 순검들이 만일에 대비하여 절도있게 파수하였다. 길에 다니던 사람들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십이일 새벽에 공교히 비가 왔다. 의복들이 젖고 찬기운이 성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경사를 즐거워하는 마음에 젖은 옷과 추위를 개의치 않고 질서 정연히 각자의 직무를 착실히 하였다. 십일일 오후 두시 반 경운궁에서 시작하여 환구단까지 길가 좌우로 각 대대 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다. 순검들도 몇백 명이 틈틈이 벌려 서서 황국의 위엄을 나타냈다. 좌우로 휘장을 쳐 잡인 왕래를 금하였고 옛적에 쓰던 의장등물을 고쳐 황색으로 만들어 호위하게 하였다.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고 지나갈 때에는 위엄이 웅장했다. 총끝에 꽂힌 창들이 석양에 빛을 반사하여 빛났다. 육군장관들은 금수로 장식한 모자와 복장을 하였고, 허리에는 금줄로 연결된 은빛의 군도를 찼다. 옛 풍속으로 조선군복을 입은 관원들도 있었으며 금관조복한 관인들도 많이 있었다. 어가 앞에는 대황제의 태극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탔다. 그 뒤에 황태자가 홍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채 붉은 연을 타고 지나갔다. 어가가 환구단에 이르자 제향에 쓸 각색 물건을 둘러보고 오후 네시쯤 환어하였다(≪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14일, 논설).

 이어 황제즉위식은 다음날 새벽에 고종이 다시 환구단에 나아가 천신에게 고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십이일 오전 두시 다시 위의를 갖추어 황단에 가서 하느님께 제사하고 황제위에 나아감을 고했다. 황제는 오전 네시반에 환어했다. 동일 정오 십이시에 만조백관이 예복을 갖추고 경운궁에 나아가 대황제폐하께와 황태후폐하께와, 황태자전하께와 황태비전하께 크게 하례를 올리니 백관이 즐거워들 하더라(≪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14일, 논설).

 환구단에서의 황제즉위식 행사는 동양의 전통적인 양식에 서양의 양식이 일부 혼합된 모습이었다. 이러한 행사는 한·당·송·명으로 이어지는 계통을 우리 나라가 직접 계승하여 衣冠文物과 典章制度를 모두 皇明의 遺制를 따랐다고 주장하던 관료와 일부 유생들의 주장과도 부합하는 내용이었다.039) 즉 한편으로는 만국공법 질서하의 자주독립한 나라라는 근대적 의식,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의 정통을 우리 스스로가 이었다는 ‘주체적 중화의식’이 뒤섞여 있었다.

 이로써 비록 취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한국사상 초유의 황제국이 탄생하였다.≪독립신문≫에서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광무 원년 시월 십이일은 조선사기에서 몇 만년을 지내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 천년을 왕국으로 지내어 가끔 청국에 속하여 속국대접을 받고 청국에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더니…이달 십이일에 대군주폐하께서 조선사기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 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는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뿐이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으니…어찌 조선인민이 되어…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오(≪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14일, 논설).

030)환구단은 원구단이라고도 읽는다. 그러나 1897년 당시의≪독립신문≫에서는 환구단으로 거듭 쓰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당시의 표현을 따라 환구단으로 표기하였다(≪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12일, 논설).
031)≪官報≫, 개국 503년 12월 12일.
032)≪淸季中日韓關係史料≫8, No. 3430, 5040쪽.
033)≪官報≫, 건양 2년 8월 14·17일.
034)≪高宗實錄≫권 35, 광무 원년 9월 25∼30일.

≪大韓季年史≫上, 162쪽.
035)현재 소공동에 위치한 웨스틴조선호텔(Westin Chosun Hotel) 자리이다. 환구단의 조성 경위에 대해서는≪高宗實錄≫36, 광무 원년 9월 21일·29일, 10월 1일·12일조 및≪官報≫, 광무 원년 9월 21일·10월 4일<宮廷錄事> 등을 참조.
036)그의 원형은 현재 북경성의 동남부에 위치한 방대하고도 웅장한 규모의 天壇에서 잘 느껴볼 수 있다(望天星·曲維波編,≪天壇≫, 北京:中國世界語出版社, 1996).
037)韓佑劤,<朝鮮王朝時代에 있어서의 儒敎理念의 實踐과 信仰·宗敎>(≪韓國史論≫3, 1976).

金泰永,<圜丘壇>(서울市史編纂委員會,≪서울市六百年史-文化史蹟篇≫, 1987), 201∼204쪽.

平木實,<朝鮮半島における王權-朝鮮王朝時代を中心に>(松原正毅編,≪王權의 位相≫, 弘文堂, 1991).
038)북경의 天壇은 북쪽에 위치한 祈年殿과 皇乾殿, 남쪽에 위치한 환구단과 皇穹宇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望天星·曲維波編, 앞의 책 참조)
039)≪高宗實錄≫권 35, 광무 원년 10월 10일.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