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충청지역
충청도지역에서의 의병의 항일전은 충주부의 제천과 홍주부의 홍주에 의병의 본영이 설치되어 전국 의병을 선도하는 등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제천의병은 1896년 1월 12일 安承禹·李春永이 거의한 지평의진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지평의 포군장 金伯善을 비롯한 포수 400여 명을 주병력으로 하여 1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원주관아를 점령하였으며, 이어서 1월 17일 제천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때 서상렬이 李弼熙·吳仁永·裵是綱 등과 함께 의진에 참여하였다. 이필희를 대장에 추대한 지평의병은 단양군수를 구금시키고 일본군과 관군과의 장회나루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계속된 추격에 의진을 영월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인석은 이 소식을 듣고 요동행을 포기하고 제천의병의 총대장에 추대되었다. 곧 유인석은 의진을 제천으로 옮겨 관아를 접수하고 관아 뒷산인 아사봉에 본영을 설치하였다. 이어 중군장에 이춘영, 전군장에 안승우, 후군장에 申芝秀, 선봉장에 김백선, 소모장에 서상렬을 임명하고 격문을 띄워 전국민의 항일전에의 참여를 호소하였다. 제천의병은 단발을 강요한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를 처형하고 2월 17일 충주성을 점령, 충주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였다. 이어서 천안군수 金炳肅, 평창군수 嚴文煥을 처형하고 선유사 신기선을 잡아 가두었다. 소모장 서상렬은 안동부 일대에서 7읍의 맹주로 추대되어 예천군수 柳仁馨을 처단하고 안동의병과 연합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이로써 제천의병은 충주부를 중심으로 중부지역 일대를 장악하는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제천의병은 수안보와 가흥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격퇴를 주요 목표로 삼아 작전을 폈다. 그러나 2월 26일 수안보전투에서 이춘영이 전사하고 충주성 공방전에서는 朱庸奎가 전사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제천의병은 3월 5일 다수의 희생자를 낸 채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후퇴하였다. 유인석은 안승우를 중군장으로 삼아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때 李康秊이 의병을 이끌고 의진을 찾아와 유인석과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강년은 유격장에 임명되어 이후 다수의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외에도 영춘에서 權灝善이 포수를 이끌고 왔으며 李明魯의 횡성의병도 합류하였다. 그러나 3월 27일 선봉장 김백선 처형사건이 일어났다. 가흥전투에 원군을 보내지 않은 중군장 안승우와의 불화 때문에 군기문란죄를 적용하여 처형한 것이다. 김백선의 처형은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더욱이 그를 추종했던 병사들은 군진에서 이탈하기까지 하였다. 제천의병은 결국 5월 25일 제천의 남산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패하여 서행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이후 제천의병은 단양·충주·원주·영월·춘천·양구 그리고 안변·영흥·맹산·덕천·운산을 거쳐 8월 24일 초산에서 압록강을 거쳐 중국의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懷仁縣宰의 제지를 받고 8월 29일 무장해제를 당하였으며 유인석 등 21명을 제외한 219명은 강제 귀국당하였다. 유인석 일행은 심양으로 들어가 심양현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일본과의 전쟁의 사단을 일으킬 수 없다고 거절당하였다. 유인석 일행은 중국의 원병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元世凱에게 가려던 길을 돌려 1896년 9월 고구려 구토인 通化縣 五道溝로 들어가 ‘復古制 斥倭獨立’을 위한 기지로 정하고 재기를 준비하였다.1140)
홍주의병은 지방의 선비들과 金福漢을 비롯한 관료출신들에 의해 일어났다. 이들의 거의계획 추진은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된 후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11월 28일 100여 명에 이르는 홍주 일대 유생들이 化城에서 향회를 실시하고 군사활동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180여 명의 민병이 모집되었으며, 다음날 安炳瓚·蔡光黙이 이들을 인솔하여 홍주성에 입성하였다. 12월 1일 저녁에는 정산과 청양의 李鳳學·李世永·金正河 등 수백 명이 성안에 들어왔으며, 12월 2일에는 朴昌魯가 士民 수백 명을, 청양의 선비 李彰緖는 청양군수 鄭寅羲의 명령을 받아 수백 명을 인솔하고 각각 홍주부에 집결하였다. 이들이 안병찬·채광묵의 민병 180여 명과 합세하여 홍주 관아를 점령하였다. 김복한의 지시로 민병들은 경무청을 부수고 참서관과 경무관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어 결박 구타하였다. 관찰사 李勝宇는 이 기세에 눌려 의병에 참여할 것을 승복하였다. 의병들은 ‘尊華復讐’의 기를 세우고 거의방략을 협의하였다. 다음날 홍주부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을 수석으로 추대하였다. 김복한은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의병에 응모하기를 청하였다. 김복한은 이설·안병찬·李相麟 등과 함께 창의소에서 지휘하였으며, 宋秉稷·蔡光黙·朴昌魯·鄭濟驥 등은 의병초모와 산성수리를 위하여 파견되었다. 청양군수 정인희는 창의소를 별도로 청양읍내에 설치하고 홍주부에 연락을 취해 포군 5백 명과 화포 1천 자루를 관찰사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룻만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는 배반하고 말았다. 그는 유생들의 권유와 위협에 마지못해 거의에 참여는 하였으나 실패를 두려워하였다. 관찰사는 거의의 뜻을 번복하고 김복한·이설을 비롯한 23명을 구금시켰다. 이들 중 김복한·이설·洪楗·안병찬·송병직·이상린(이상 홍주의병 6의사) 이외의 17명은 모두 무죄 석방시키고, 1월 12일 김복한 등 6명을 법부의 훈령에 따라 서울의 한성재판소로 이송하였다. 2월 23일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이 이들을 불러 공초를 하고 25일에는 실형을 선고하였으나 이날 밤 자정 임금의 특지로 전원 사면 석방되었다.
한편 홍주지역 유생들은 의병의 재기를 시도하였다. 李根周·趙儀顯·安昌植·鄭寅羲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특히 청양군수 정인희는 12월 6일 정산읍에 진을 치고 분연히 일어났다. 12월 7일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으며 공주부의 具完喜 부대와의 치열한 전투를 정산의 철마정 일대에서 벌이기까지 하였다. 한편 이세영은 홀로 홍주를 빠져나가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 남포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켰다. 이때 같이 거의한 인사에는 黃載顯·李寬·金弘濟 등이 있다. 이 거사 역시 성공을 보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지만 이세영 등 홍주지역 유생들의 끈질긴 항쟁의 모습을 알 수 있다.1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