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영남지역
진주의병은 1896년 2월 17일 노응규에 의해 安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거의한 인물로는 덕유산 기슭에 위치한 長水寺의 승려로 徐再起를 비롯하여 鄭道玄·朴準弼·崔斗元·崔斗淵 등 그의 문인과 그 외에 林景熙·成慶昊 등이 있다. 노응규는 서재기를 선봉장에 임명하는 등 의병진을 편성하고 그날로 진주로 진격하였다. 진주향교에서 공격의 기회를 살핀 노응규 의진은 2월 20일 새벽 순식간에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진주성을 점령한 노응규는 고종에게 倡義疏를 올려 “節士는 목숨을 경솔히 버리지 않으며, 義理를 붙잡는 것은 君子의 의무이옵기에 적개심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일으켰다”고 거의의 뜻을 밝혔다. 또한 그는 “석달안에 왜적을 축출하고 선왕의 문물과 토지를 회복할 것”을 천명하였다.
노응규 의병진이 진주성을 점령하자 진주부민들도 鄭漢鎔을 대장으로 의병진을 결성하여 성 밖에 진을 쳤다. 노응규는 성안에 招賢館을 임시로 설치하고 인근에 榜文을 내걸고 ①경륜이 뛰어난 자 ②도략이 過人한 자 ③籌術에 능통한 자 ④臂力이 過人한 자를 초빙하여 각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케 하고자 하였다. 노응규는 또 한편으로 의병초모를 위해 각 면리에 전령을 보내 매 2호당 군사 1명씩을 내게 하는 한편, 임진왜란 때 진주수성전에서 순절한 3壯士 및 義妓祠에도 제사를 올려 지역 주민의 의기를 고무시켰다.
이와 같이 부대를 정비한 진주의병의 수는 수천 명에 달했으며 대구부에서 파견된 관군을 두 차례에 걸쳐 격파하고 다수의 전리품을 노획하여 의병의 사기는 더욱 고무되었다. 노응규는 점차 활동범위를 넓혀 부산과 근접한 함안, 김해 일대까지 진출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의령 출신의 李淸魯 부대도 합세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이간책으로 토착세력인 鄭漢鎔이 배신하였다. 진주의병은 관군에 진주성을 빼앗겼으며 선봉장 서재기마저도 안의의 서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결국 노응규는 안의의 서리들에 의해 부친과 친형이 살해당하는 아픔을 겪고 의병을 해산하였다.1142)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안동부를 중심으로 안동의병이 결성되었다. 안동은 1881년 전개되었던 영남만인소의 진원지였다. 1894년 갑오변란과 청일전쟁에 항거하여 청풍의 유생 서상철이 안동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음은 이러한 안동의 사상적 특성과 관련이 크다.
단발령 공포소식을 듣고 金道和·金興洛·柳止鎬 등 대표적인 안동 유생들은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1896년 1월 초 의병을 모아 1월 17일 안동관찰부를 공격, 점령하였다. 안동향교에 본영을 설치하고 참봉 權世淵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李晩燾·李中麟 등이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의병에 합세하였다. 그러나 안동을 탈출한 관찰사 金奭中이 경군을 이끌고 의병진을 불시에 공격하자 의병진은 1월 29일 안동에서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金道鉉·柳時淵은 청량산에서, 李相龍·柳昌植은 고운사에서 의진을 수습하여 김도화를 대장에, 柳蘭榮을 도총에 추대하고 2월 중순 다시 안동부를 공격하였다. 의병의 총공격에 관찰사 김석중은 도망가다가 문경의 이강년 부대에게 체포되어 처단되었다. 김도화가 이끄는 안동의병은 제천의병의 소모장 徐相烈이 안동지역에 남하하자 그를 안동을 비롯한 의성·영양·예천·청송 등 7읍의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연합작전을 전개하여 예천군수 柳仁馨, 의성군수 李觀永, 영덕군수 鄭在寬 등을 처단하고 함창군 태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태봉전투는 4일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러나 3월 29일 대구에서 증파된 일본군의 공격에 의병은 예천·풍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4월 2일 일본군은 안동으로 침입하여 부내의 노약자와 부녀자를 무차별 학살하고 민가 1000여 호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친일정부조차 일본에 항의하였으며 신임 관찰사 李南珪도 항의 사표를 제출하였으니 그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안동의병은 정부의 권유로 해산하고 김도현만이 민용호부대와 연합하여 항전하다가 10월 15일 영양군 청기면에서 부대를 해산하였다.1143)
한편 김천·선산 그리고 상주 등지의 유생들은 을미사변의 소식을 듣고 이에 통분, 상호 연락을 취해 거의를 실현시켰다. 우선 상주의 유생 李起燦은 목천에 거주하는 친척인 李起夏와 함께 許蔿를 찾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협의하였다. 이때 허위는 이미 金山(현재의 김천)과 龜城지역에서 진사 趙東奭·柳道燮 등과 비분강개하며 의병을 규합하고 있었다. 이기찬은 이들과 합세하여 1896년 2월 11일 군사적 요충지인 김산으로 들어가 의병근거지로 삼았다. 이곳에는 이미 향반출신인 呂永韶·呂中龍 등이 중심이 되어 통문을 띄우고 거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김산군수 李範昌을 영입하여 관민이 합세한 의병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범창은 관찰사 李重夏의 친척으로 거사를 무산시키는 데 뜻이 있었으며 거사일을 2월 22일로 늦추도록 하고 감영으로 가버렸다. 이러한 가운데 상주·선산측의 이기찬·허위 등이 의병을 이끌고 김산에 들어와 김산 지역의 여영소 등이 이끄는 의병과 연합하여 3월 10일 김산향교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이 부대 이름을 金山義陣이라고 부른다.1144)
이기찬은 이때 운집한 의병들에 의하여 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이어서 의진의 진용을 갖추었으니 趙東奭을 軍門都摠, 姜懋馨을 贊劃, 許蔿를 參謀將, 李時佐와 呂永韶를 書記, 梁濟安을 中軍, 尹鴻采를 先鋒에 임명하고 인근에 격문을 발송하여 국난에 처하여 모든 이가 의병대열에 나서서 국치를 설욕할 것을 천명하였다. 김산의병은 김산 장날에 읍으로 들어가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김산군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하는 등 군세를 강화하였다.
김산의진은 대구부를 공격하기 위해 군량 확충과 모병을 계속해 나가던 중 3월 14일 知禮에서 관군을 맞아 전투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합부대로 형성된 김산의병은 지휘체계의 미비와 전투력의 열세로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 의병장 이기찬을 비롯한 주력부대는 부득이 충청북도 黃澗으로 이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흩어졌던 장졸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으며 이기찬은 이들을 훈련시켜 재기를 준비할 수 있었다. 또한 의병중 민가를 약탈하는 이를 체포, 효수하여 군율을 엄정히 하였으며, 영동군수 閔致純에게 가렴주구의 죄를 추궁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인근의 수령들이 도망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4월 5일 김산의병은 구성면 도곡천에서 경상감영의 관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접전에서 의병들은 패하였다. 의병장 이기찬은 여영소·여중용·양제안 등 지휘부를 이끌고 황간으로 돌아왔다. 그 후 김산의진은 속리산 아래 帳內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문경으로 옮겨 李康秊 부대와 합세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고종의 哀痛詔書와 義兵解散勅諭를 받고 의병을 해산하였다.1145)